소설리스트

곤륜마협-113화 (113/569)

113화

일탈

“스님? 안 들리세요?”

불러도 소용없었다.

불존은 허허로운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광이 하도 어이가 없어 가만히 있자 불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둔 채.

“현오 사제에게는 작은 문제가 있다.”

멍한 눈빛이 되어버린 노승의 법명이 현오인가 본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작은 문제라뇨. 딱 봐도 치병(癡病)인데.”

“천하의 수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 그에 비하면 현오 사제가 앓고 있는 치병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야.”

아미타불.

자신의 사제보다 힘없는 중생의 아픔을 헤아리다니, 고승다운 품격이 물씬 풍기지 않는가.

물론 정광의 시각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내게는 큰 문제라니까.’

항마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왔거늘, 그걸 알려줄 이가 치병에 걸렸단다.

갑자기 이렇게 됐을 리는 없을 터, 불존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고 정광을 데려온 것이다.

자연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불존의 평가가 달라졌다.

‘선사는 무슨. 스님도 아깝지. 그냥 땡중이잖아!’

이렇게 크게 뒤통수를 맞은 건 환생한 뒤로 처음이었다.

정광은 전생에서부터 뒤통수 맞는 걸 싫어했다.

싫어하다 못해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때리는 자이지, 맞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하도 오랜만에 맞으니 신선하네.’

신선한 건 신선한 거고.

제대로 응징해야 했다.

성질대로라면 바로 검무를 춰야 하건만, 환생하며 성숙해진 정광이었기에 그러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곤륜산에 있는 운후까지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올 게 뻔하지 않은가.

‘조용조용히 해결하자.’

새벽을 틈타 암습을 하고 소림사에 불을 질러 버릴 계획을 세우는데…….

창밖을 보던 불존이 시선을 정광에게 돌렸다.

“속인 건 아니니 안심하거라.”

“네?”

“내 처음 네게 보름을 머물러 달라 했지?”

“그랬죠. 합의해서 칠주야로 줄였고요.”

“보름을 얘기했던 이유가 있다.”

불존은 현오의 치병 증상에 대해 담담하게 설명했다.

“올해 들어 갑자기 발병하곤 하는데, 최대한 길어봤자 닷새더구나. 그 뒤엔 멀쩡해져. 그래도 혹시 몰라 세 배로 여유를 두려 한 게다.”

정광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대충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불존이 정중한 자세로 청했다.

“너에 대해 많은 소문을 들었다. 의술에도 조예가 깊다던데, 사제를 치료해 줄 수 있겠느냐?”

정광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뇨.”

“최대한 성의를 보이마. 다시 한번 생각해 다오.”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

“정신의 병은 천하의 그 누구도 못 고쳐요.”

정광의 의술과 무공으로도 손을 댈 수 없는 병들이 있었다.

탈모, 고자, 정신의 병이 그랬다.

앞의 두 개야 슬프지만 포기하고 산다 한들, 마지막 정신의 병…… 그중에서도 치병은 재앙에 가까웠다.

병에 걸린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너무나 힘들어지는 것이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현오는 멍한 눈빛으로 자신의 암자 안을 두리번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불존은 그런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정광은 그들을 지켜보며 머리를 긁었다.

‘진짜 치료해 주고 싶네.’

그래야 항마주에 대해 빨리 알아낼 수 있는데.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정광이 정신의 병까지 치료할 능력이 있었다면, 천마신교에 즐비했던 미친놈들도 모두 정상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령제혼술을 쓸 수도 없고 말이야.’

마령제혼술은 강대한 마기로 상대의 이지를 제압해 명령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만약 쓴다면 항마주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순 있겠지만, 현오는 남은 생을 이지를 상실한 채로 살게 된다.

환생한 정광은 죄 없는 약한 노인에게 그런 짓을 저지를 정도로 악하진 않았다.

‘결국 기다려야 하나.’

답이 없어 그러려고 하는데.

현오가 일어서더니 비척비척 걸었다.

책장까지 다가간 그는 서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진지한지 지켜보는 이의 마음마저 경건해질 정도였다.

문제는 눈만큼은 여전히 멍한 상태라는 것.

정광은 슬그머니 일어나 현오의 곁으로 갔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탐독을…….’

서책을 들여다본 정광의 눈이 흔들렸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나직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럴 수가…….”

놀랄 만큼 훌륭한 그림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모든 걸 걸고 겨루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과연 소림이구나. 천하공부출소림이라더니 이런 기서(奇書)까지 있을 줄이야…….’

얼마 전, 불존에게 천하공부가 아니라 중원공부라고 폄하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집중해야 했다.

현오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정광의 표정은 더 진지해졌다.

갖가지 초식이 서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상도 해보지 못한, 기묘하고 치명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이 초식을 펼칠 땐 왼발을 축으로 서서 오른팔을 뻗어 상대의 무게중심을 제압하고…… 으음. 상대를 당황하게 할 순 있겠지만 효율적이진 않군. 그래도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

정광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책을 탐독했다.

그만큼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광의 귀에 종이 울리는 듯한 불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보거라.”

“…….”

“그만 보래도.”

“…….”

정광의 시선은 여전히 서책에 꽂혀 있었다.

불존은 나직이 한숨을 내쉰 뒤 짧은 기합을 질렀다.

“갈!”

“깜짝이야.”

정광의 집중력이 깨졌다.

하지만 현오는 여전히 서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히죽거리는 얼굴로 침까지 조금 흘리며.

불존은 현오는 내버려 두고 정광을 책망했다.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정광도 할 말이 있었다.

“춘화도(春畵圖)가 너무 생생하고 기묘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이곳은 사찰이니라.”

“그렇죠. 근데 사찰에 왜 이런 놀라운 춘화도가 있죠?”

정광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전생은 물론, 현생에 몰래 봤던 소녀경(素女經), 음양화합서(陰陽化合書), 옥방비결(玉房秘訣) 등의 고전도 이것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림의 경지부터 다르지 않은가.

정광이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자 불존이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사제가 그린 것이다.”

“……!”

“치병에 걸린 뒤부터 벌인 기행 중 일부지.”

정광은 깨달았다.

‘치병, 그거 꼭 나쁜 건 아니네.’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걸 아시는 걸 보면…… 어르신도 보신 거죠?”

“……후우우. 사제가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보셨죠?”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불존이 계속 회피하자 정광은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반성하세요.”

“……너는 안 하느냐?”

“저야 뭐. 후회 안 하니까 반성도 없죠.”

“……훌륭하구나.”

이 와중에도 현오는 춘화에 꽂혀 있었다.

정광은 그를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진짜 치병 맞아?’

그렇다기엔 집중력이 너무 강하지 않은가.

먼저 불존에게 양해를 구했다.

“현오 스님 진맥 좀 해봐도 될까요?”

“그러거라.”

승낙을 받은 정광은 현오의 손목을 잡고 맥을 느꼈다.

나이가 나이인 데다 책만 붙잡고 산 것답게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얼마 안 남았네.’

천수(天壽)를 다해 가고 있었다.

‘그래서 맑은 정신으로 보내주고 싶은 건가?’

사제를 생각하는 불존의 마음이 느껴졌다.

정광은 현오의 뒤에 앉아 명문혈(命門穴)에 손을 댔다.

진기를 미세하게 운용하려면 이렇게 하는 것이 편해서였다.

‘어디 한번 보자.’

진기를 조심스레 움직여 현오의 머리로 올려 보냈다.

‘여기부터가 문제인데…….’

태상노군쯤이나 돼야 가능하려나.

사람의 뇌는 함부로 건드렸다간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저 머릿속에 있는 생기의 움직임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도 정광이기에 가능한 일.

그의 눈매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이쪽은 별문제 없고…….’

통천혈(通天穴), 후정혈(後頂穴), 뇌호혈(腦戶穴), 풍부혈(風府穴) 등, 혈도가 상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생기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으나 현오의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럼 다음은…….’

사람의 뇌를 들여다볼 순 없다.

그저 주변 혈도의 상태와 탁기의 유무로 그 증상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탁기(濁氣)도 없어?’

정광은 어이가 없어서 두 눈만 깜빡거렸다.

이건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바로 현오가 치병에 걸린 것처럼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이놈의 영감탱이가!’

정광이 손을 들어 올려 현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려 하는 그때!

불존의 전음이 들려왔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얘기 좀 하는 게 어떠냐.

-어르신도 알고 계셨어요?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네 행동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불존의 낌새를 보고 뭔가 더 있다 싶더니만 이런 거였다니.

-잠시 나가자꾸나.

현오를 패는 거야 언제라도 할 수 있었기에 불존의 말에 따랐다.

-그러죠.

밖으로 나가자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암자에서 묻혀온 퀴퀴한 책 냄새가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정광의 분노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와아. 믿고 있다가 뒤통수 거하게 맞았네요.

-사제는 그냥 투정을 부리는 것일 게다.

-투정요?

-그래. 열반에 들 때가 되니 이곳 생활이 답답한 거겠지.

주위를 둘러본 정광은 이것만큼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산기슭에 있는 소림사에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잠깐. 그래도 항상 구름이 낄 정도로 높고 칼바람 몰아치는 곤륜보단 낫잖아.’

소림 정도면 천혜의 자연환경이건만 대체 뭐가 불만인지.

정광과 달리 불존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현오에 관한 얘기를 풀었다.

-……이런 것이다. 이해했느냐?

정광이 요약해서 물었다.

-그러니까. 현오 스님은 너무 어릴 때 불문에 귀의하셔서 세상을 모르신다. 이거죠?

-그렇다.

-전 갓난아이일 때 강제로 도호를 받아서 도사가 됐는데요.

-……그래도 너는 강호로 나왔잖느냐.

-아. 평생 안 나오신 거구나. 근데 그렇게 대단한 춘화를 어떻게 그리신 거죠?

-원래 실제로 접해보지 못한 이가 더 큰 동경을 품고 아름다운 상상을 하는 법이지.

-어르신은 접해보셨군요.

-……아미타불.

정광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본문이 한 수 위구나.”

소림보다 곤륜이 한 수 위란다.

고승의 풍모를 보이는 불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러느냐?

-본문의 어르신들은 진짜 숫총각들이시거든요.

아. 그런 거였나.

별로 이기고 싶지도 않은 건이었다.

-헌데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 것이지?

-그야…… 어라?

자신 있게 대답하려던 정광이 멈칫했다.

그러게.

그걸 어찌 확신한단 말인가.

‘와. 그냥 맹목적으로 믿고 있었네. 나도 도사 다 됐구나.’

사실 여부야 나중에 확인해 보면 될 터.

일단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어쨌든, 현오 선사께선 얼마 안 남은 시간, 일탈을 즐기시는 거군요.

-그렇지.

-그 일탈에 제가 뒤통수를 맞았고요.

불존은 고개를 저으며 전음을 이었다.

-아니. 사제는 네게 알려준다 했으니 약속을 지킬 게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닷새 안에 정신을 차릴 게야. 아니, 차리는 척하겠지.

정광은 가만히 생각해 봤다.

‘어차피 칠주야를 머물기로 했지. 이 땡중이 약조를 어긴 건 아니야.’

물론 ‘아직은’이다.

혹시라도 시간이 지나면 진짜로 뒤통수를 칠지도 몰랐다.

‘그땐 소림에서 약조를 어기는 것이 되니…….’

마음 놓고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되리라.

불도 좀 지르고.

‘나쁘지 않네.’

오히려 이쪽이 더 재밌을지도.

‘이왕 소림에 왔으니 중들과 싸워보는 것도 좋지. 배상도 받아내고. 뭐가 있더라…….’

적당한 게 떠올랐다.

소림칠십이종절예(少林七十二種絶藝)와 달마역근경(達魔易筋經)이 보관돼 있다는 장경각(藏經閣)을 털면 될 터.

‘음. 그래도 뭔가 좀 부족한데.’

정광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때, 불존의 전음이 들렸다.

-닷새 동안 사제와 함께 지내줄 수 있겠느냐.

-네?

-너와 잠시나마 함께하면 사제가 기뻐할 것 같아 그런다. 일탈 하면 너 아니냐?

역시 불존은 땡중이 분명했다.

세상 어느 중이 도사를 불러다가 일탈을 부탁한단 말인가.

정광은 어이가 없어 반론했다.

다른 의미로.

-저는 일탈이 아니라 일상이 이런데요.

-……아미타불.

불존은 반장한 뒤 전음을 이었다.

-사제에게 잠시나마 세상을 좀 보여다오.

-어…… 방금 말씀, 듣기에 따라 여러 방면으로 해석될 수 있는 거 아시죠?

-아미타불. 대신 사고만 치지 말아다오. 특히 색계(色界)를 어기는 건 안 돼.

-아직 하겠다고 말씀 안 드렸는데.

-사제가 즐거워지면 항마주에 대해 빨리 알려줄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럼 너도 빨리 떠날 수 있을 게야.

순간, 정광은 뭐가 부족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 현오라는 중도 가만두면 안 되지. 어쨌든 날 골탕 먹였으니까.’

불존의 부탁을 들어주며 함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소림 분들의 생각을 좀 깨쳐달라고 하신 거요. 그 대가로 항마주에 대한 정보를 받기로 했는데, 현오 선사님 건은 따로 계산해 주실 거죠?

-……무엇을 원하느냐?

정광이 씩 웃었다.

-그건 좀 나중에 정하죠. 일단 현오 선사님 모시고 다녀올게요.

-지객당과 산문에 말해놓으마. 잘 부탁한다.

씩 웃던 정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만 믿으세요.

불존은 갑자기 후회감이 엄습했다.

그간 정광의 됨됨이를 파악했다고 생각했건만, 그게 정광의 모든 것일지 확신이 안 서게 된 것이다.

-사, 살인도, 약탈도, 방화도, 폭행도 안 된다. 알아들었느냐?

-저를 대체 뭐로 보시길래.

어처구니없어하던 정광이 덧붙였다.

-정말 안 돼요? 그중 단 하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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