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10화 (110/569)

110화

계약 아닌 계약

정광은 현통사를 둘러보며 만족했다.

생각보다 볼 것이 많아서였다.

기분이 좋아지니 통도 커졌다.

“사제. 불전함(佛錢函)에 시주 좀 해.”

“네? 시, 시주요?”

“응. 뭐 잘못됐어?”

그냥 잘못된 것도 아니고 아주 크게 잘못됐다마다.

정광이 시주를 하다니!

이게 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사형. 진심이십니까?”

“응.”

“……갑자기 왜……?”

“절이나 우리나 그 나물에 그 밥인데 돕고 살아야지.”

“……알겠습니다.”

백승무가 전표를 꺼내려 하자 정광이 말했다.

“제일 적은 금액으로 한 장만.”

“……네.”

“그거 얼마짜리야?”

백승무의 대답을 들은 정광은 말을 조금 바꿨다.

“그냥 은자 하나만 내. 부처님도 종이쪼가리보단 그게 더 좋으실 거야.”

그때, 정광을 계속 따라오던 불존이 끼어들었다.

“안 넣어도 된다. 네 마음만으로도 기뻐하실 게야.”

“마음이 없으니까 이거라도 넣어야죠.”

“……그것도 맞는 말이구나.”

“근데 왜 따라오시는 거예요?”

“우연히 가는 길이 같을 뿐이다.”

정광이 얼굴을 찡그렸다.

“공우 스님이 뭐라 했죠?”

“어떻게 알았느냐?”

“뻔하잖아요. 와. 소림사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

“말싸움에서 져놓고 사문 어르신한테 고자질을 하네.”

“……고자질?”

“설욕해 달라고 했죠? 하실 거예요?”

불존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정광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이상한 녀석이었다.

“그래도 강호에서 고룡이라 불리는 아이니라. 그런 짓은 안 해.”

마침 공우가 나타났다.

그는 정광을 향해 정중하게 반장했다.

“아미타불. 진옥룡을 뵙습니다.”

“무량수불. 안녕하세요.”

“오면서 들었습니다. 그런 일은 없었으니 안심하시지요.”

백승무와 자오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광이 부끄러워서였다.

하지만 정광은 당당했다.

“그럼 됐고요.”

“…….”

“그럼 두 분이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저희는 저희끼리 놀게요.”

정광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불존이 따라갔고, 자연히 사손인 공우도 따랐다.

백승무는 은근히…… 아니, 몸서리쳐질 정도로 불편했다.

극강의 무인인 십존 중 한 명이 사손과 함께 졸졸 따라오는 건 흔한 경험이 아니었기에.

결국 참다못한 백승무가 전음을 보냈다.

-사형. 이대로 계속 가실 겁니까?

-그럼?

-……자꾸 신경이 쓰여서 말입니다.

-그냥 무시해.

-……네?

-없는 사람 취급하라고. 그럼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

백승무는 가슴이 덜컥했다.

‘……아, 알아서 떨어져 나가?’

전음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말로 했다면 불존이 아니라 부처였어도 칼춤을 췄으리라.

‘더 이상 묻지 말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거야.’

하지만 쉽게 될 리가 있나.

그의 안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빠졌다.

반면 자오는 경험이 많은 만큼 백승무보다 한 수 위였다.

정광에게 물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머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쉽게 말해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든 상태.

정광에게 복종하기로 몇 번이나 맹세하다가 깨달은 장수 비결이었다.

이렇게 다섯 명이 현통사를 돌아다니는데 경내를 기웃거리는 사슴들이 보였다.

녀석들을 본 정광이 침을 삼켰다.

이에 화들짝 놀란 백승무가 다급히 말했다.

“사, 사형. 절에서 육식은 안 됩니다.”

정광이야말로 놀랐다.

“사제.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설마 현통사 같은 청정도량(淸淨道場)에서 그런 짓을 하겠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사형이라면…….”

“사형이라면?”

백승무는 입에서 나오려던 말을 가까스로 바꿨다.

조금이나마 좋게 들리게.

“……사형께 불가능한 일은 없지 않습니까?”

“에이. 전부 그렇진 않아.”

“…….”

“사슴을 보니 배가 고파지긴 하네. 볼 건 다 봤으니까 그만 내려가자.”

“……네, 사형.”

“그 전에 여기 스님들께 가서 좀 물어보고 올래?”

“네? 무얼 말입니까?”

정광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말했다.

“근처에 있는 반점 중 고기 요리와 술 괜찮은 데가 어디냐고. 현지인한테 물어야 제대로 된 곳을 소개받을 것 아냐.”

* * *

당연히 백승무는 정광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했다.

대신 참배객들에게 물어물어 괜찮은 곳을 알아냈고, 산에서 내려온 그들은 오미반점(五味飯店)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들을 따르던 불존과 공우는 밖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이는 오미반점이 무척 비싼 고급 반점이기 때문이었다.

공우는 묵묵히 서 있는 불존을 힐끔거리다가 정광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가 따라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행동하다니…….’

명백한 무시였다.

종잡을 수 없는 성품이라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너무 과해서 머리가 많이 이상한 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도문에서 어떻게 저런 자가 나왔을까. 그것도 곤륜에서.’

곤륜은 변방인 청해성에 있기에 만성적인 인재 부족에 시달리는 문파였다.

그쯤 되면 어느 정도의 자질만 있어도 제자로 거둬야 하거늘, 당사자의 심성을 철저히 따지기로 유명했다.

그렇게 입문한 제자는 항상 도(道)에 대해 궁리(窮理)를 해야 했기에 성품이 어긋날 일 또한 거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게다가 진옥룡의 사조는 덕성(德聖) 운후 진인이요, 사부는 평판 좋은 허청 도장 아닌가. 그런데 대체 왜……?’

모두 오해였다.

허청이 산에 버려진 정광을 발견했을 때, 정광은 갓난아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심성을 따지겠는가.

게다가 정광은 도에 대해 궁리하긴커녕 도경 읽는 소리조차 싫어했다.

환생했어도 그는 그였다.

그나마 운후와 허청의 아낌없는 사랑이 있었기에, 무림공적으로 안 몰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공우는 지금의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사조님께 괜한 말씀을 드렸구나.’

공우는 운강석굴에서 벌인 정광과의 논쟁에서 민초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충격을 받았다.

소림에서 배우고 닦아온 이치를 부정당해서였다.

‘게다가 더 뼈아팠던 건…….’

정광의 논리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오대산으로 돌아가 사조인 불존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묵묵히 듣던 불존은 대뜸 정광을 살펴봐야겠다며 나섰다.

‘대체 왜……?’

공우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그 후로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정광 일행이 반점에서 나왔다.

배가 볼록하고 얼굴이 불콰한 것이, 제대로 먹고 마신 게 확실했다.

공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사가 된 몸으로 술을?’

코를 킁킁거리자 고기 냄새도 났다.

‘이건 그냥 망나니 아닌가!’

공우는 지금껏 들어왔던 소문을 다시 떠올렸다.

예의가 없고, 손속은 거칠기 짝이 없으며, 오만하기 그지없는 데다, 재물을 심하게 밝히지만 협의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안 좋은 얘기가 더 많아. 협의에 어긋난 일은 안 한다는 건 잘못된 소문 아닐까?’

그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여인들이 정광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꺄아아아! 너무 멋져!”

“세상에 저런 미남이 있다니!”

순간, 정광이 신법을 펼쳤다.

벌써 저 멀리서 뛰고 있었는데, 백승무와 자오는 당황하지 않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사숙조님.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우의 물음에 불존이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가보자꾸나.”

“……네, 사숙조님.”

두 사람은 정광 일행의 뒤를 따랐다.

공우는 이때만 해도 미처 몰랐다.

지옥 같은 고난이 시작되리라는 걸.

* * *

끼니때마다 고급 반점 밖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며 기다렸다.

밤이 되면 화려한 객잔 밖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노숙했다.

여인들이 정광에게 몰려올 땐 정광을 따라 뛰었다.

이런 똑같은 나날이 되풀이되자 공우의 마음속에 있던 의혹이 짙어졌다.

‘사조께선 대체 저자의 무엇을 살피시는 것인가? 무엇이 됐든 간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애초의 예상대로라면 금방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째 계속 구르다 보니 이 일이 언제 끝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나야 그렇다 쳐도…….’

공우는 사조인 불존을 봤다.

고강한 무공 덕분에 큰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식사가 너무 부실했나.’

지나다니는 시주들의 보시(布施)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불존의 우람한 근육이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잠자리도 문제지.’

매일매일 노숙이었다.

더러워진 승복이며 얼굴하며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역시 이쯤에서 그만둬야 해.’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랬지만…….

‘……사조께서 행하시는 일인데 내가 어찌 나선단 말인가.’

법도를 생각하면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이를 어쩐다.’

공우의 머릿속에서 두 생각이 싸웠다.

그 싸움은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적절한 타협으로 끝났다.

‘언제까지 이렇게 따라갈 순 없다. 목적지라도 물어보고 방도를 찾아야 해.’

공우는 앞에서 걷고 있는 정광을 불렀다.

“진옥룡. 소승이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정광은 발걸음을 계속 옮기며 대답했다.

“그러세요.”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가시는 건 아닐 테고. 목적지가 어딘지요?”

정광은 맑은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청명시절우분분(淸明時節雨紛紛).

노상행인욕단혼(路上行人欲斷魂).

차문주가하처유(借問酒家何處有).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

청명절에 비가 많이도 내리니.

길 가는 나그네는 넋이 나가려고 하는구나.

술집이 어디쯤 있냐고 물어 보니.

목동은 살구꽃 핀 마을을 가르쳐 준다.

정광은 눈을 끔뻑거리는 공우에게 물었다.

“아시죠?”

“……모릅니다.”

“어? 시성(詩聖)으로 추앙받는 두보(杜甫)의 유명한 시, 청명(淸明)을 모르세요?”

정광이 깜짝 놀라며 묻자 공우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도사인 자가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나!’

버럭 화를 내려던 공우는 목에 걸린 염주를 한 알씩 돌리며 탄식했다.

‘아미타불…… 승려 된 이로서 이렇게 수양이 얕아서야…… 부처님을 뵐 낯이 없구나.’

하지만 이는 공우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가 아니라 부처였어도 화를 냈으리라.

염주를 손가락으로 돌리며 마음을 가라앉히던 공우는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염주 알을 부숴 버릴 뻔했다.

“글을 모르시는구나.”

“……!”

말도 안 되는 소리!

글은 당연히 알았다.

그래야 불경을 읽을 것 아닌가.

다만, 아주 어릴 때 소림에 입문했기에 시는 잘 모를 뿐이었다.

중이 시를 알고 즐기는 것 자체도 이상한 일이었고.

“쉽게 풀어드릴까요?”

“…….”

공우는 속으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웠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정광은 말을 이었다.

사실 알아도 그랬을 것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살구꽃 핀 마을은 산서성 분양현(汾陽縣)에 있는 행화촌(杏花村)을 말하는 거거든요. 그곳을 가는 중입니다.”

공우는 머릿속에 채웠던 반야심경을 밀어내고 행화촌이란 이름에 집중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가는 걸까? 범상치 않은 이유일 텐데.’

그거야 물어보면 될 일.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가시는 겁니까?”

다행히 정광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

“거기서 빚은 분주(汾酒)가 유명하거든요. 그거 마시러 가요.”

공우는 고강한 무공 때문에 구룡사봉 중 고룡으로 추앙받았지만, 그 자신은 무인이 아니라 승려라고 생각했다.

이는 소림의 기조(基調) 때문이었고, 자연히 그는 마음을 수양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오랫동안 키워온 불심과 타고난 의지력을 합치니,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리지도, 정광을 때려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입에서 나오는 소리마저 고울 수는 없었다.

“……참 대단한 이유군요.”

“그렇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니까요. 같이 한잔하실래요?”

다시 한번 반야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운 공우는 간신히 대답했다.

“소승은 곡차(穀茶)를 마시지 않습니다.”

“이런. 아쉽네요.”

그때, 묵묵히 있던 불존이 끼어들었다.

“내가 상대해주마.”

“네?”

“사, 사조님! 곡차라니요!”

불존은 공우에게 손짓을 한 뒤 정광에게 말했다.

“곡차를 마시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차를 마시며 너와 대화를 나누겠다는 것이지.”

“생각만 해봐도 재미없을 것 같은데요.”

“내가 꽤 재밌는 얘기를 해줄 것이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정말요?”

“물론. 대신 너도 내 질문에 답을 해다오.”

정광은 불존을 빤히 바라봤다.

외형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분위기, 기운, 냄새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흐음. 지금껏 만나본 십존들과는 다르단 말이야.’

소림 중들과도 달랐다.

어딘지 그의 사조 운후가 생각나기도 하고.

한마디로 제법 중다운 중이었다.

‘따라온 꿍꿍이라도 들어보자.’

정광은 흔쾌히 승낙했다.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러죠.”

계약 아닌 계약이 성립됐다.

이렇게 그들은 행화촌으로 향하게 됐다.

정광은 도착하자마자 술판을 벌였다.

예의 있게 불존에게 권하는 것도 잊지 않으며.

“그냥 드시죠.”

“괜찮다.”

“그럼 고기를 드릴까요?”

“그것도 괜찮다.”

정광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술이야 그렇다 치죠. 고기 좋아하시면서 왜 그러세요.”

“불문에 든 뒤론 육식을 금했다. 그러니 좋아할 일도 없지.”

“육식을 안 하는데 몸이 그렇다고요? 말도 안 돼.”

“네가 알고 있는 지식이 모두 사실일 거라 믿느냐? 세상엔 예외인 것도 많아.”

정광이 정색했다.

“제가 곤륜에 이모가 많거든요. 그분들 중에 물만 드셔도 살찐다는 분들이 꽤 있는데, 그거 전부 다 거짓말…….”

계속되는 정광의 버릇없는 말에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백승무가 끼어들었다.

“사, 사형. 사형께서도 도사지만 엄청난 잔 근육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난 고기 먹잖아.”

“……아.”

백승무는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입을 봉하고 지켜보던 자오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백승무를 봤다.

아직도 정광을 모르느냐는 의미였다.

불존은 빙그레 웃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 지금부터 재밌는 얘기를 해주마.”

순수한 웃음이었지만, 불존의 우락부락한 얼굴에서 발현되자 마치 협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광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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