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09화 (109/569)

109화

잣대

전생에 진천마였던 시절, 정광은 정파 무림을 싫어했다.

말만 번드르르한 위선자에 현실을 모르고 이상만 지껄이는 바보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곤륜에서 환생한 뒤 그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곤륜 도사들은 실로 도사다웠다.

게다가 정광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천마신교의 공격에 꾸준히 단련된 덕분에 현실감각도 제법 있는 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중원에 나와보니 대부분의 명문정파는 전생의 정광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아. 하북팽가는 그래도 괜찮지. 사천당가나 개방, 그 외의 몇몇 애들도 쓸 만하고.’

많은 문파의 사람들을 겪어본 건 아니었지만 기운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 놈들과 하나로 묶여 불린다는 게 불쾌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남궁 놈들처럼 어설프게나마 영악한 게 낫지. 이도 저도 아니고 뭐 하는 건지 원.’

이런 문파들과는 조금 다르게 한심한 문파들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소림사(少林寺)와 무당파(武當派)였다.

각각 불교와 도교의 성지요, 중원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이며, 구파일방에서 수위를 다투는 명문이었으나 정광의 눈에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이는 그들의 무공이 아닌 기조(基調)를 말함이었다.

‘세상 밖의 존재인 것처럼 구는 꼴이라니.’

오만하단 얘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세속의 일에 극도로 관여하지 않았다.

무림맹에 와 있던 자들도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뜬구름 잡듯 원론적인 얘기만 지껄이면서.

‘그럴 거면 왜 내려와?’

지금 눈앞에 있는 중도 마찬가지였다.

별호부터 고룡(高龍) 아닌가.

정광이 봤던 소림승들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녀석이었다.

‘아니지, 아까 손속이 어떻고 하는 걸 보면 더해.’

파격적으로 꽉 막힌 돌중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건만.

이놈은 불만이었나 보다.

“표현이 과하십니다, 소협.”

“음. 그럼 벽창호?”

“……지금 시비를 거시는 겁니까?”

“네? 제가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정광은 변명 대신 백승무와 자오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제, 내가 방금 이분께 시비를 걸었어?”

“아닙니다.”

“자오는요? 어떻게 생각해요?”

“평소의 진옥룡이셨습니다.”

정광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공우를 바라봤다.

“거봐요. 아니라잖아요.”

“…….”

공우는 어이가 없는 눈초리로 정광 일행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정광이 원래 그런 자이기 때문이리라.

‘……예의가 없고 제멋대로라더니, 오히려 소문이 모자란 감이 있군.’

공우는 정광에 대해 신경을 끊기로 했다.

수양하는 이로서 이런 자와 가까이해봐야 좋을 것이 없어서였다.

“소승이 실례했습니다.”

“그죠.”

“……조심히 가십시오.”

“스님도요.”

발걸음을 옮기던 정광이 우뚝 멈췄다.

“아. 깜빡할 뻔했네.”

“……?”

“저 사람들, 어떡할 거예요?”

공우가 마혈을 짚어놓은 혈혼방도들을 말함이었다.

“아미타불. 뉘우칠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광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중얼거렸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

정광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동시에 굳어 있던 혈혼방도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각자 팔다리가 하나씩 꺾인 채.

“……!”

공우의 눈이 커졌다.

‘이, 이렇게 빠를 수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정광이 신법을 펼쳐 혈혼방도들의 팔다리를 꺾고 돌아온 것이다.

경악한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분명 말했거늘. 이런 짓을!’

이제껏 담담했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물론 소림까지 무시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진옥룡. 왜 독수를 쓴 것이오?”

“독수라뇨? 가볍게 한 건데.”

“……그 말이 아니잖소. 지금 소승과 소림을 무시하는 것이오?”

“말이 왜 그렇게 돼요?”

“저들이 뉘우칠 기회를 줘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그대는 도사 아니오? 교화할 의지는 아예 없는 것이오?”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교화?”

“그렇소이다.”

정광은 뭐 이런 물건이 있냐는 듯 공우를 훑어봤다.

“아니, 저분들을? 무슨 수로요?”

“힘들더라도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소.”

“그냥 노력 안 하면 편한데.”

“……어려워도 해야 하는 일이외다. 교화에 실패하면 그때 가서 징치하면 되오.”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와. 벽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네.”

대화를 나눠보니 더 확실해졌다.

이 대머리는 조금이나마 현실에 눈을 떠야 했다.

“잠시만요.”

정광은 공우에게 양해를 구한 뒤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분들이 뉘우칠 거라 생각하시는 분 계시면 손 좀 들어주실래요?”

아무도 들지 않았다.

“팔다리가 조금 부러지셨는데 동정심을 느끼시는 분은요?”

참배객들이나 대동문도들이나, 정광이 손을 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소림사의 공우가 그렇다 하니 반신반의하는 중이었다.

‘……동정심을 느끼냐고?’

사람들은 바닥에 구겨져 있는 혈혼방도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마 안 가 그들의 눈에 통쾌한 빛이 떠올랐다.

‘흉악한 흑도 놈들! 꼴좋다!’

‘소신선께서 천벌을 내리셨어!’

힘없는 민초들에게 가장 무서운 건 관리와 흑도인이었다.

그중 하나가 저 꼴이 났으니 그저 고맙기만 할 뿐이었다.

대동문도들도 비슷했다.

‘저 신선 같은 자가 곤륜의 진옥룡이었구나!’

‘악독한 놈들을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처리하다니 명불허전이군!’

동정심은 개뿔.

조금 전만 해도 오랫동안 지켜온 터전을 뺏기고 죽을 뻔했다.

아무리 불심이 깊다 해도 자신들을 죽이려 한 적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물론 부처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들 중에 활불(活佛)은 없었다.

참배객들이든 대동문도들이든 정광을 고마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 손을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역시 없으시네.”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린 정광이 공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셨죠?”

“…….”

“아무도 안 믿으세요. 손 좀 보니 오히려 좋아하시잖아요. 그럴 만도 하지. 나 같아도 그럴 텐데.”

“…….”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공우가 입을 열었다.

“……과한 처분이오. 저들에게 일말의 기회도 안 주는 건 너무한 일이외다.”

“저분들은 대동문에 기회를 줬나요? 모조리 죽여 버리려고 하던데.”

“……그래도…….”

“풀어주면 감동받아서 새사람이 될 것 같아요? 체면 깎였다고 오늘 일을 본 분들에게 패악을 부릴 게 뻔하구만.”

“……그땐 소승이 좌시하지 않고 징치를…….”

“여기서 계속 사실 것도 아니면서 장담하지 마시죠. 저는 곧 떠날 거라 뒤처리를 한 거예요. 스님과 저 중 어느 쪽이 대동현에 도움이 될까요?”

“……하지만…….”

공우는 반박하려다 말끝을 흐렸다.

정광의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 때문이었다.

사실 정광은 공우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전생에 들었던 소림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원래 이랬는데 내가 몰랐던 건가?’

더 있다간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 팰 것 같았다.

“스님. 개방의 후개 유정풍 소협 아세요?”

“……안면은 있소.”

“그분은 자신을 희생하는 게 협이라고 하더라고요.”

“…….”

“근데 스님은 약하고 죄 없는 이들을 희생시키는 게 협이라 생각하시나 봐요.”

“……!”

“여기는 소림이 아니니까 소림의 잣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공우의 눈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속세에 맞지 않는 잣대를 억지로 들이밀려면 그냥 산에서 내려오시질 말던가.”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다 날 새겠네. 그만 가요.”

그는 백승무, 자오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참배객들은 그들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대동문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습을 보는 공우의 눈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 * *

정광 일행은 영암사와 운강석굴을 둘러본 뒤 행화춘풍으로 돌아왔다.

민초들에게 축원을 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에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정광은 탁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수많은 요리와 술을 시켰다.

“자. 내일은 오대산으로 출발할 거예요. 점심을 걸렀으니 든든히 먹고 마십시다.”

“네! 사형!”

“알겠습니다! 진옥룡!”

힘찬 대답과 함께 시작된 저녁 식사였지만…….

백승무와 자오는 요리에만 손을 댈 뿐,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정광이 권해도 마찬가지였다.

‘분주 맛있다고 좋아하더니만. 갑자기 왜 이래?’

왜냐니.

모두 정광 때문이었다.

백승무와 자오는 분주에서 풍기는 향을 외면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오늘은 취하면 안 돼! 또 탁자에 버려진다!’

‘혹시 실수라도 했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를 터! 자오! 긴장을 풀지 마라!’

떠들썩하기는커녕 침묵이 가득한 식사였다.

원래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정광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조용하자 식욕이 떨어졌다.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나죠.”

“네, 사형. 푹 주무십시오.”

“네. 진옥룡.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들을 정광이 잡았다.

“어디 가요?”

“……네?”

“……방으로 갑니다만…….”

정광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새 해이해졌네. 수련해야죠.”

“……!”

폭풍 같은 수련이 시작됐다.

새벽이 되자 백승무와 자오는 기절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정광은 그들을 보며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성과가 보여서였다.

‘계속 나아지고 있군.’

두 사람의 자질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구파일방의 제자들에 비하면 꽤 처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백승무의 투지와 자오의 끈기는 그들의 모자란 자질을 상쇄해 나가고 있었다.

‘가만히 보면 둘이 잘 맞는단 말이야.’

투지로 전진하는 백승무와 끈기로 암습하는 자오.

정파와 사파라 안 어울릴 것 같았지만 둘의 성품과 무공을 떠올리자 제법 괜찮은 그림이 나왔다.

‘흐음. 쓸 만할 것 같은데. 한 번 짜볼까?’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건 괜찮은 놀이였다.

얼마 후 나온 결과에 정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굴려보자.’

날이 밝자 정광은 후원에 놓인 의자에 앉아 탁자 위의 요리들을 즐겼다.

두 사람으로 데워놓은 덕분에 어제보다 따뜻했다.

“사제, 뭐 해? 어서 먹어. 자오도 깨작대시지 말고 맘껏 드시고요.”

“……네, 사형.”

“……알겠습니다, 진옥룡.”

식사 후, 정광은 두 사람에게 각자의 병기를 꺼내라 했다.

두 사람은 기겁했다.

“서, 설마 사형과의 대련입니까?”

“그, 그랬다간 오대산으로 출발하지 못합니다. 며칠은 몸져누워야 하지 않습니까.”

정광은 그들을 안심시켰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지잖아요.”

“……저희는 사람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광은 그들을 한 번 더 안심시켰다.

“좋은 것 알려 드리려는 거예요. 아주 마음에 들걸요.”

당연히 두 사람은 믿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광이다.

그의 기준으로 ‘좋은 것’이 그들의 기준으로 좋은 것일 리가 없어서였다.

“……사형, 번거로우실 텐데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고기를 좀 더 가져올까요?”

하지만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그들의 표정이 변했다.

“괜찮은 합격술(合擊術)인데.”

“……!”

“잘 익히면 구파일방 장로쯤은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백승무와 자오는 동시에 외쳤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두 사람은 기절할 때마다 사흘 전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입을 꿰매 버리는 꿈을 꿨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정광 일행은 오대산으로 향했다.

물론 수련은 오대산에 이를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의 비명과 함께.

* * *

오대산은 산세가 무척 수려하면서도 기이했다.

불교 명산답게 수많은 사찰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건 현통사(顯通寺)였다.

정광은 저 위에 보이는 현통사를 보며 서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오래전 천축의 고승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중원에 들어와 낙양에 백마사를 세운 뒤 두 번째로 만든 절이라 했지.’

역사가 깊은 만큼 볼 것도 많을 터.

기대를 품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얼마 전 접했던 기운이 느껴졌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의 것보단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는 것.

정광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공우와 함께 현통사에 왔다는 소림 땡중인가?’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맞았다.

한 노승이 정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곤륜의 진옥룡이냐?”

종이 울리듯 큰 목소리였다.

“그런데요.”

“노납(老衲)은 불존(佛尊)이라 한다.”

“아.”

정광은 놀란 눈으로 노승을 바라봤다.

정파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으로 꼽히는 십존(十尊) 중 한 명인 불존!

……이어서가 아니라 노승의 외모가 불존이란 별호와 너무 안 어울려서였다.

‘아무리 봐도 시장통에 있는 차력사 같은데.’

승복이 꽉 낄 만큼 엄청난 근육 덩어리라니.

누가 저 노인이 중이란 걸 믿겠는가!

정광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량수불. 하루에 고기 얼마나 드세요?”

“……아미타불. 안 먹는다.”

“에이. 말도 안 돼. 육식을 안 하는데 몸이 어떻게 그래요.”

“…….”

“뭐 어쨌든 수고하세요.”

정광은 불존을 지나쳐 걸었다.

백승무와 자오가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불존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허어…….’

하지만 십존이라는 지고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은 없었다.

‘공우의 말대로구나. 파격적이다 못해 정신 나가 보이는 녀석 아닌가?’

그렇다면…….

조금 더 알아봐야 할 터.

불존의 신형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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