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소신선(小神仙)
중의 나이는 이립이 안 되어 보였는데, 그를 본 대동문도들은 탄성을 질렀다.
“아아! 드디어 오셨구나!”
“소림에서 신승(神僧)이 오셨어!”
중은 예의 있게 반장(半掌)하며 입을 열었다.
아까의 웅혼했던 사자후와 달리 조용조용한 목소리였다.
“아미타불. 신승이라니요. 공우라 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의 법명(法名)을 들은 대동문도들의 눈이 커졌다.
“……고, 공우?”
“……구, 구룡사봉 중 수위를 다툰다는 고룡(高龍)!”
잠시의 침묵 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어느 분이 오실지 몰랐건만 고룡께서 오시다니!”
“소림은 본문을 기억하고 있구나! 이렇게 영광스러울 수가!”
대동현 토박이였던 대동문의 개파조사는 소림 속가 출신이었다.
불심이 깊었던 그는 대동문을 개파하고 운강석굴을 드나드는 참배객들을 보호했다.
명승고적에서 패악을 일삼곤 하는 흑도문파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그의 무공 수위는 낮지 않았기에 많은 제자를 모을 수 있었다.
제자들 역시 불심이 깊은 이들이어서 오랜 시간 동안 대를 이어가며 대동현과 운강석굴을 지켜왔다.
하지만 남부 지방에서 신흥 세력에게 밀려난 혈혼방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이곳까지 흘러들어 온 그들이 대동문을 밀어내고 대동현을 집어삼키려 한 것이다.
중과부적임을 깨달은 대동문은 연이 있던 오대산 현통사(顯通寺)에 구원을 청했다.
비록 현통사가 무문(武門)은 아니지만 호위 무인들이 있기에 그들의 손이라도 빌릴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리고 받은 소식에 대동문은 들끓었다.
마침 현통사로 소림사의 승려들이 오고 있는 중인데 그들이 도착하면 간절히 부탁해 보겠다는 것 아닌가!
대동문의 뿌리는 소림 속가였다.
자연히 그들은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거절당할까 하는 두려움도 품은 채.
‘그런데 이렇게 와줄 줄이야!’
‘그것도 중원 전역에 명성이 퍼진 고룡 공우 스님이!’
열광하는 대동문도들과 달리, 백승무와 자오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얼마 전 떠나온 팽가에는 현대의 구룡은 물론 전대의 구룡까지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황태손과 겸상까지 해본 그들이 고룡이라는 별호에 놀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들의 이런 반응에 공우는 의아함을 느꼈다.
‘특이한 시주(施主)들이시군.’
기분이 나쁘거나 한 건 아니었다.
명성이란 헛되고 헛된 것이기에.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는 백승무와 자오를 넌지시 책망했다.
“시주들께선 손속이 너무 과하시군요.”
“……?”
“그만한 무위를 지니셨으면 일을 더 부드럽게 푸실 수 있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멀뚱거리던 백승무와 자오가 손가락을 들어 자신들을 가리켰다.
“저한테 하시는 말씀입니까?”
“내게 말한 것이오?”
공우는 반장을 함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백승무와 자오의 눈에 어처구니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손속이 너무 과해?’
‘우리가?’
이곳저곳 좀 베이고 여기저기 약간 부러진 이들밖에 없는데 무슨!
백승무가 반박했다.
“과하다니요. 손속에 사정을 충분히 뒀습니다만.”
“그러기엔 흘린 피가 너무 많습니다.”
자오도 반박했다.
“내가 쓰러뜨린 자들은 피를 흘리는 이가 없소이다.”
“대신 뼈마디가 부러졌지요.”
다시 반박하려던 백승무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더니…….’
정광과 지내다 보니 이 정도쯤은 별것 아니라 느끼게 된 것이다!
물론 정광을 따르기 전보다 손을 가볍게 쓴 자오는 뭔가 깨닫긴커녕 억울할 뿐이었다.
그래서 당당히 따졌다.
가슴을 쭉 펴고!
“정파인 대동문과 선량한 참배객들을 위해 가볍게 손을 썼을 뿐이오. 그게 잘못이라면 사과하리다.”
공우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손을 가볍게 쓰시지 않은 게 문제란 말입니다.”
“가볍게 했거늘 왜 자꾸 그러시오!”
“시주의 손속은 분명 무거웠습니다.”
참다못한 자오가 분노했다.
“어떻게 해야 가볍게 하는 것이오? 한번 구경이나 해봅시다!”
“그야 어렵지 않지요.”
공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직 쓰러뜨리지 않은 혈혼방도들 앞에 나타난 그는 섬전 같은 손놀림으로 혈도를 짚었다.
마혈을 짚인 혈혼방도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
자오는 할 말이 없었다.
정말 가볍긴 가벼운 손속 아닌가.
사마련 출신인 그로선 상상조차 못 했을 정도로.
한편, 멀리서 지켜보던 정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상상조차 못 한 방법에 기가 차서였다.
‘쯧쯧. 뭐 하러 저래? 두들겨 패야 그나마 손맛이라도 보지.’
정광은 소림 승려를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무림맹에서 몇 번 봤었다.
그들은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고고한 태도를 취했다.
한마디로 나대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부인 허청이 말하길 승려의 본분을 지키기 위함이라 했는데…….
그것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계속 산에 박혀 있지 뭐 하러 내려온 거야?’
속세에 왔으면 속세에 맞게 행동해야 하거늘.
정광은 소림과 달리 그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래서 더 고기와 술을 탐하는 것이란 의미다.
‘제법 자질은 있는 편이지만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네.’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이제껏 만나본 구룡사봉 중 가장 빼어난 무공을 가진 자였다.
헌데 그러면 뭐 할까?
손속이 어쩌고 하며 제대로 쓸 생각조차 못 하는데.
‘어쨌든 정리됐으니까 빨리 가자.’
참배객들 중 제일 뒤에 있던 정광은 앞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무량수불. 좀 지나갈게요.”
“아. 그러시구려…… 어억!”
무심코 비키던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정광을 보고 놀라서였다.
“……시, 신선?”
사내의 혼잣말에 주위의 이목이 집중됐다.
불교의 성지 중 하나인 이곳에 신선이 웬 말인가?
그런데.
“헉!”
“허어!”
금사(金絲)로 수놓은 우아한 구름 문양,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눈처럼 하얀 도복.
정교하게 새겨진 구름 문양이 눈에 띄는 찬란한 황금빛의 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얼굴이라니!
흔히 옷이 날개란 말이 있다.
입은 옷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인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를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 있었으니…….
얼굴은 신이다!
얼굴이 잘나면 신격화까지 될 수 있는 것이다!
무림과 상관없는 산서성의 민초들이 진옥룡이라는 별호를 들어봤을 리가 만무한 일.
그들의 눈엔 정광이 그저 신선으로 보일 뿐이었다!
“지, 진짜다!”
“시, 신선! 소신선님이야!”
이곳에 모인 참배객들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연배가 높은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명승지에 젊은 선남선녀가 없다고?
모르는 이라면 이런 의문을 품겠지만 사정을 살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운강석굴은 절벽에 새겨진 크고 작은 불상과 만 개가 넘는 석굴로 유명한 곳이었다.
애초에 절이란 곳에 가면 경건함을 느끼기 마련, 하물며 이런 장관을 보게 되면 어떤 마음이 되겠는가?
그렇다.
피 끓는 사내도 부처가 된다.
여인 역시 마찬가지다.
함께 다녀온 연인은 한동안 경건함에 젖어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다.
이러니 그 어떤 사내도 연모하는 소저를 데려오지 않을 수밖에.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에 오는 참배객들은 연배가 지긋했다.
당연히 몸도 아픈 곳이 많았고 생에 대한 애착도 강했다.
얼마 전 정광이 백승무에게 설파했듯, 불교든 도교든 복을 받을 수만 있다면 가리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였다는 말이다.
“아이고! 소신선님! 부디 제게 축원을 내려주십시오!”
“집이 터가 안 좋은지 나쁜 일이 끊이질 않습니다! 간략하게나마 제를 지내주시면 안 될까요?”
불교의 성지인 이곳에서 도교의 인기가 폭발했다.
이런 일에 익숙한 정광은 담담히 대응했다.
‘그냥 신법을 펼쳐서 뛰어넘어 버릴걸’ 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 아닌가.
그럼 제대로 해야 했다.
사조인 운후의 당부대로.
‘다른 건 괜찮다. 다만 어려운 민초들의 청은 거절하지 말아다오. 어찌 됐든 너는 도사 아니더냐.’
돈을 쥐여주거나 협객행을 하라는 게 아니었다.
복을 받기를 원하는 그들의 마음을 외면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이쯤이야.’
망할 도경 읽기에 비하면 할 만한 일이었다.
‘후딱 해치우자.’
정광은 두 손을 모으며 외쳤다.
“무량수불! 줄을 서세요!”
여건상 제까지 지낼 수는 없는 일.
빠른 축원이 이어졌다.
정광의 태도가 진지했고 공손했기에 참배객들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조금 이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네? 부적이요? 본문은 그런 거 취급 안 하는데요.”
“도술 같은 건 몰라요. 그런 거 할 줄 알면 제가 여기 안 있죠.”
“네? 나는 걸 보여달라고요? 아주 오래는 못 나는데.”
감격해서 우는 사람, 재밌어서 웃는 사람.
따뜻한 분위기가 장내에 퍼져 나갔다.
축원을 받은 이들은 고이 가져온 것들을 내밀었다.
영암사와 운강석굴에 시주할 것들 중 일부였다.
옥수수, 밀가루, 각종 과일 등을 비롯하여 다리를 묶인 채 홰를 치는 닭까지.
정말 없는 게 없을 지경이었는데…….
정광은 모두 거절했다.
“본문은 속세에 내려와 축원이나 제를 지낼 때 대가를 받는 걸 금해요. 마음만 받을게요.”
“그래도 받아주십시오, 소신선님. 이것밖에 못 드려서 죄송한데 거절하시니 더 그럽니다.”
“음. 솔직히 말하죠. 제가 꽤 부자라서 필요 없거든요. 무겁기만 하고. 그냥 집에 가져가셔서 맛있게 드시는 게 어떨까요.”
사람들은 정광의 말을 오해했다.
‘우리 처지를 생각해 저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그러시면서도 농을 섞어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는구나!’
이런 긍정적인 오해는 물론 정광의 외모 덕분이었다.
만약 자오가 이런 말을 했다면 ‘거짓부렁이나 일삼고 싸가지 없는 사이비 도사놈’ 소리를 들었을 게 뻔했다.
“역시 소신선님! 외모 그대로이십니다!”
한 노인의 칭찬에 정광이 고개를 저었다.
“외모 가지고 저를 평가하지 마세요.”
“……그럼 무엇으로?”
“음. 보이는 건 그거밖에 없네. 그냥 그렇게 가죠.”
듣기에 따라 굉장히 저속한 성품을 가졌다 생각할 수 있었지만 정광의 행동은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날려 버렸다.
그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똑같이 대했다.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마찬가지였다.
외모 역시 상관하지 않았다.
참배객들에게 정광은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는 신선 그 자체였다!
‘신선님. 선계에서만 계시지 말고 자주 내려오시길.’
‘오늘 신선님을 뵌 건 가문의 영광이로다. 길이길이 전해야겠어.’
이렇게 극찬을 넘어 경배까지 받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남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칼만 있으면 상대를 죽일 수 있고 찔리면 죽는 건 똑같은데.
나이도 마찬가지.
백 년을 훌쩍 넘게 살다가 갓난아이로 환생한 정광 아닌가.
당연히 나이 따윈 괘념치 않을 수밖에.
돈이나 외모 또한 그렇다.
정광은 아주 부자인 데다 천하제일미남이다.
그의 기준으로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비슷비슷했다.
이렇게 전혀 다른 이유로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리네.’
속도를 더 높였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정광은 해가 중천을 지나 내려오기 시작했을 때야 백승무와 자오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축원이 모두 끝난 것이다.
“휴우. 해냈다.”
정광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은 뒤 사람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갈게요.”
수많은 목소리들이 모여 장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조심히 살펴가십시오, 소신선님!”
어차피 영암사와 운강석굴에서 다시 만날 사이였지만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 정광의 앞길을 축원했다.
정광은 씩 웃어서 화답했고.
“사제, 가자.”
“아! 네!”
“자오, 뭐 해요? 어서 와요.”
“아, 알겠습니다!”
백승무는 정광을 따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사형에 대해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무공을 모르는 이들을 대할 땐 정말 도사다우시단 말이지.’
과거 백가상단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을 때, 정광은 오늘과 비슷한 행동을 했다.
‘그때야 상대가 진옥룡수호단을 비롯해 여인들이 대다수였고, 본문의 어르신들께서도 계셨으니 그렇다 쳐도…….’
오늘처럼 민초들에게, 눈치 볼 사람이 없는데도 이러는 게 신기했다.
‘사형은 강한 이에겐 강하고 약한 이에겐 약하다. 이것이야말로 협이 아닐까?’
곰곰이 화두를 곱씹는 백승무와 달리, 자오는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악(惡)의 화신 같은 사람이 있나! 본성을 철저히 숨기고 신선 같은 행동으로 사람들을 홀리다니!’
그야말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표본이었다.
당장 종교(宗敎)를 하나 설립해도 금세 중원을 휩쓸 판 아닌가!
‘이런! 의구심을 내비치지 마!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해!’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걷던 그들은 얼마 안 가 멈춰야 했다.
정광이 사람들을 축원하는 동안 미동도 안 한 채 지켜보던 공우가 나서서였다.
“아미타불. 무례하지만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냥 안 물어보시면 되는데.”
“……소협이 요즘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진옥룡이신지요?”
“소협은 아닌데 진옥룡은 맞아요.”
“……만나 뵙게 되어 무척 기쁘군요. 소승은 소림의 공우라 합니다.”
“네. 아까 들었는데요.”
공우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그를 이렇게 무례하게 대하는 자는 처음 만나서였다.
그래도 그의 수양은 낮지 않았기에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듣던 대로 파격적이시군요.”
“네? 제가요?”
정광이 어이없어하자 공우가 물었다.
“그럼 아니십니까?”
“스님이야말로 파격적이신데요.”
“……소승이요?”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님처럼 파격적으로 꽉 막힌 분은 처음 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