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07화 (107/569)

107화

협객행(俠客行)

정광 일행이 잡은 행화춘풍(杏花春風)은 살구꽃과 봄바람이라는 이름처럼 화사한 느낌의 객잔이었다.

특히 별채가 아주 아름다웠는데, 그에 딸린 후원에선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고기 요리와 함께.

“으음. 괜찮군.”

정광은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투명한 빛깔에 우아한 향, 깨끗한 목 넘김까지.

맛과 향이 긴 여운을 남기는 훌륭한 술이었다.

백승무도 동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껏 분주(汾酒)를 안 마셔본 건 아니지만, 역시 본고장의 것은 다르군요.”

본디 분주(汾酒)는 산서성 분양현(汾陽縣)에 있는 행화촌(杏花村)에서 빚은 것이 유명했다.

비록 행화춘풍이 행화촌에 있는 건 아니었으나 그곳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 그런지 맛이 아주 대단했다.

“사제. 운강석굴이랑 오대산에 갔다가 행화촌에도 들를까?”

“하하. 좋습니다. 가서 허리띠 풀고 마음껏 마셔보지요.”

평소의 백승무라면 정광이 술판 고기판을 벌이는 걸 탐탁지 않아 해야 했으나 지금의 그는 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림맹, 철혈장, 하북팽가라는 대단한 곳들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그도 모르게 항상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순수한 유람을 하게 되자 마음이 탁 풀려 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은 어느새 불콰하게 물들어 있었다.

정광도 그런 그를 이해했기에 아낌없이 술을 권했다.

“자, 자. 마시자고.”

“네! 사형!”

“자오도요. 고생하셨는데 팍팍 드셔야죠.”

“……알겠습니다. 그럼…….”

자오는 대답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홀짝거렸다.

그는 백승무가 아니었다.

정광 앞에선 한시도 긴장의 끈을 풀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오래였다.

‘소채와 차가 당긴다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술판을…… 방심하면 안 된다, 자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위험을 느끼자 마음 한편에 밀어두었던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련에 너무 오랫동안 소식을 안 보냈어.’

사마련은 중원 사파의 총연합체였다.

그곳에 몸담았던 자오는 그들의 힘을 잘 알았다.

‘지금이야 내가 실종됐다고 생각하겠지만…….’

배반했다는 게 알려지면 반드시 척살대를 보낼 터.

실패하면 계속 보낼 것이다.

정광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홀로 사마련을 대적할 순 없으리라.

‘돼지는 반드시 오겠지.’

상소운을 한동안 보필했던 자오는 그가 얼마나 잔인하고 위험한 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오는 이를 지그시 물었다.

‘쓸데없는 생각. 난 이미 진옥룡에게 모든 걸 걸었다!’

그가 어떤 고민을 하고 결심을 하든 간에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잔뜩 취한 백승무는 탁자에 얼굴을 처박고 곯아떨어졌다.

“사제, 벌써 자면 어떡해. 일어나.”

정광이 뒤통수를 때려도 백승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흥미를 잃은 정광은 시선을 자오에게 돌렸다.

움찔한 자오는 팽팽한 김장감을 느끼며 정광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자오.”

“네, 진옥룡.”

“사마련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딸꾹. 그,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화들짝 놀란 자오가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피식 웃어 보인 정광이 담담하게 물었다.

“협을 행하며 사는 것도 나름 할 만하죠?”

“……네?”

자오는 그도 모르게 되물었다.

대체 언제 협을 행했다고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정광은 진심이었다.

전생의 삶과 비교하면 현생의 그는 협객(俠客) 그 자체 아닌가.

대협(大俠)이라 불려도 무리가 없으리라.

“몸에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으셨으니 한동안은 좀 어색할 거예요.”

자오는 크게 부르짖었다.

‘당신이 곤륜의 도사라는 것이야말로 어색함을 넘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소!’

다행히 속으로 부르짖었기에 정광에겐 들리지 않았다.

“근데 계속 입다 보면 적응되더라고요. 다른 옷을 입으려 해도 몸이 거부할 정도로.”

그의 도복이 그 증거였다.

“자오도 그럴 거예요. 반드시.”

말을 끝낸 정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근래 들어 조금 고생한 자오에게 따뜻한 충고를 건넸기 때문이다.

‘그래. 사람은 이렇게 덕으로 다뤄야지.’

하지만 그의 덕은 자오에게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다가왔다.

‘배반할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내 몸에 고통을 새기겠다는 거구나!’

처음 한 번만 빼면 해독약을 꼬박꼬박 내려주고 있는 정광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뭔가 다른 금제(禁制)를 걸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자오는 바로 바닥에 엎어졌다.

“진옥룡!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그러죠. 아, 짧게 하세요.”

“진옥룡을 뵙고 입게 된 이 옷은 이미 저와 하나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이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절대 변하지 않을 불변의 진리가 될 것임을 맹세합니다!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짧게 하시라니까.”

“하지만 그래선 제 마음을 다 보여 드리지 못합…….”

“그냥 안 볼게요. 여기까지 하죠.”

“……요,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용서랄 게 뭐 있어요. 앞으로도 잘하신다는데.”

“……가, 감사합니다!”

정광은 무척 흡족했다.

자오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했다.

오랜만에 잔뜩 취한 백승무를 포함해 모두에게 좋은 밤이었다.

* * *

정광과 자오는 숙면을 취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사람을 시켜 거하게 한 상 차리게 했다.

해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정광은 한 숟갈 떠서 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괜찮군.”

“그러게 말입니다. 국물이 따뜻한 것이 속을 부드럽게 달래주고 은은한 감칠맛이 미각을 돋우는 게 해장에 아주 그만인 데다…….”

열심히 떠드는 자오를 누군가 막았다.

정광이 아니라 백승무였다.

“대협. 그만 말씀해 주십시오.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 울립니다.”

“이런. 미안하오. 아직도 취기가 가시지 않소?”

“취기야 사형께서 전수해 주신 주즉시공(酒卽是空)으로 날렸지요.”

“그럼……?”

백승무는 자신의 벌건 이마를 가리켰다.

“탁자에 머리를 박고 자서 이마가 아픈 겁니다.”

은근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정광이야 원래 그런 인간이니 그렇다 치고, 자오 너는 왜 나를 방에 안 넣어줬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후원에서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자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하군요.”

물론 엄살이었다.

단련된 무인인 그가 그 정도로 감기에 걸릴 리는 없지 않은가.

자오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정광 몰래 전음으로.

-백 공자, 미안하오.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소이다.

-어떤 연유로 그러셨습니까?

-진옥룡께서 직접 챙기시겠다며 먼저 들어가라 하셨소.

백승무가 어이없어하는데 정광이 말했다.

“그냥 나한테 묻지 왜 전음을 나눠.”

백승무와 자오가 입을 떡 벌렸다.

“……서, 설마 전음도 들으실 수 있으십니까?”

“……저, 저는 사실만 말했을 뿐입니다. 어떤 악의도 없이 그저 백 공자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정광은 자오의 변명을 신경 쓰지 않고 백승무의 질문에 답했다.

“아무리 나라 해도 전음은 못 듣지.”

“……그, 그런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공기와 기가 움직이잖아. 뻔히 보이는데 왜 몰라?”

“……!”

뭐가 보인다고?

그것도 뻔히?

백승무와 자오의 입은 아예 턱이 빠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정광은 우아한 동작으로 입을 닦은 뒤 백승무를 바라봤다.

“사제. 사제를 밖에서 자게 한 건 깊은 뜻이 있어서야. 알려줄까?”

“……아, 아닙니다. 그냥 모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고.”

백승무로선 현명한 판단이었다.

정광이 그를 그대로 뒀던 건 아침 식사를 할 때까지 탁자를 따뜻하게 데워놓으려는 것이었으니까.

정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그만 갑시다.”

“네.”

그들은 객잔을 나와 운강석굴(雲岡石窟)로 향했다.

그곳은 객잔이 있는 대동현에서 서쪽으로 오십 리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무림인이 신법을 펼치면 한 시진도 안 되어 다녀오고도 남을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하루가 걸려도 못 돌아갈 것 같았다.

구경할 게 너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운강석굴 앞에 있는 영암사(靈巖寺) 입구는커녕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멈춘 상태였다.

‘뭐 이리 사람이 많아?’

길이 사람으로 꽉 막혀 있었다.

두 무리가 참배객(參拜客)들을 막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 병기를 들고 살기를 일으키는 것이, 분위기가 보통 흉흉한 게 아니었다.

정광에게는 무료하기만 했지만.

‘빨리 치고받지 뭐 하는 짓이람. 한쪽이 다 죽어야 지나갈 거 아니야.’

그의 생각이 전해진 걸까?

왼쪽 무리에서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자가 크게 외쳤다.

“혈혼방(血魂幇)이여! 계속 협박해도 소용없소! 우리 대동문(大同門)은 오래전부터 대동현을 지켜왔소이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오른쪽 무리에서 얼굴에 문신이 가득 한 자가 받아쳤다.

“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 이건 다 네놈들이 자초한 거야! 어르신께서 오늘 칼춤 좀 춰보마!”

싸움이 시작됐다.

정광은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자오가 말했던 이권 다툼을 하고 있다는 놈들이구나.’

우두머리들의 인상만 봐선 둘 다 흑도 문파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니었다.

‘칼자국의 대동문은 백도고 문신의 혈혼방은 흑도네. 이런 곳에 정심한 기운을 풍기는 백도 문파가 있다니 의외인걸.’

산서성은 천자가 거하는 하북성 바로 왼쪽에 있으며, 위로는 몽고와 대치하는 위치였다.

이는 관의 간섭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고, 언제 남하할지 모르는 몽고군 때문에 항상 불안정한 성임을 의미했다.

‘하물며 이렇게 위쪽 동네엔 제대로 된 문파가 들어설 이유가 없지. 그런 애들은 밑에서 놀지 뭐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오겠어.’

정광의 생각대로였다.

산서성은 하남성이나 하북성처럼 중원을 대표하는 성은 아니었으나, 곤륜이 있는 청해성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번화한 곳이었다.

그래서 아랫동네엔 이름 있는 문파들이 꽤 있었다.

‘사파야 중원 남부가 세력권이니 생각할 필요도 없고.’

정파를 보면 육방칠단삼장에 속하는 석가장(石家莊)이 있었다.

과거 다관에서 당예지에게 추근댔던 녀석이 속한 초가장이란 덜떨어진 가문도 있었다.

이들 모두 한참 아래쪽에 있는 태원(太原)을 근거지로 하는 가문들.

운강석굴이 있는 산서성 북부는 허접한 흑도 문파의 차지일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 빈집털이라고 할까.

‘그런데 불문(佛門) 냄새가 풍기는 대동문이란 문파가 있다? 꽤 명문의 속가무문인 것 같긴 한데 숫자가 저래서야 원.’

무공 수준은 대동문이 더 높았지만 숫자로 보면 혈혼방의 압승이었다.

결국에는 혈혼방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인 것이다.

문제는 꽤 큰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동문이 쓸데없는 투혼을 발휘해서 그 격차를 메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래서야 언제 끝나려나. 날 새겠네, 진짜.’

누가 됐든 한쪽이 이겨야 길이 트일 것 아닌가.

정광의 짧은 인내심이 끊어졌다.

-자오. 가서 몸 좀 푸시죠. 혈혼방이라는 애들이 흑도니까 걔들만 때리세요.

-기다리고 있었…… 명을 따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화풀이를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던 자오다.

가리지 않고 양쪽 다 패고 싶었지만 하나라도 팰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그의 몸이 비조처럼 날아올랐다.

정광은 백승무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사제도 가지그래?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 협객행(俠客行)을 할 기회잖아. 어느 쪽이 흑도인지 알지?

백승무도 안목이 있었다.

정파가 핍박당하고 선량한 참배객들이 불편을 겪고 있는 상황.

정파인으로서 나서야 할 상황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응. 수고.

백승무도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가 목표로 했던 곳에 내려섰을 땐 이미 자오라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상태였다.

“끄아악!”

“누, 누구시…… 어억!”

칙칙한 단봉(短棒)을 양손에 꼬나쥔 자오는 평소와 달랐다.

입도 벙긋 안 한 채 혈혼방 패거리를 두들겨 팼다.

패면 팰수록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대, 대체 누구길래 저런 신위를!”

대동문의 칼자국은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아차 했다.

혈혼방도가 찔러 온 단창이 그의 옆구리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내가 이런 개죽음을 당하다니!’

자책감과 분노에 휩싸여 절망하던 그때!

은은한 검은빛을 띤 검신이 장중하면서도 우아한 움직임으로 혈혼방도를 갈라 버렸다.

‘이건 또 무슨 괴물이냐!’

급히 몸을 돌리자 곱상한 귀공자가 보였다.

흑우를 든 백승무였다.

“다, 당신은 누구요?”

백승무가 대답하려는데 멀리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금권검협(金權劍俠) 백승무!”

“그, 금권검협!”

칼자국 사내는 경악하고,

백승무는 얼굴을 붉혔다.

“그, 그대가 정녕 금권검협이오?”

“……그냥 백승무라 불러주시오.”

“이럴 수가! 악을 용서치 않는다는 그대를 여기에서 보게 되다니!”

백승무는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후우우. 대체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 이 먼 곳까지…… 제발 그만 말하시오. 부탁이외다.”

“겸손하기 그지없다더니 사실이구려. 그대가 하남성과 하북성에서 행한 협행은…….”

“조심하시오!”

“어억!”

칼자국은 조심할 틈도 없이 혈혼방도에게 목이 베일 판이었다.

하지만 그의 곁엔 금권검협 백승무가 있었으니.

백승무의 손에 들린 흑우가 우아하면서도 멋진 호선을 그리며 혈혼방도를 베었다.

싸우는 와중에도 곁눈질로 그 신위를 본 대동문도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과연 금권검협!”

“정파무림이 기대하는 후기지수라더니 명불허전이구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질 것처럼 뜨거워진 백승무가 몸을 날렸다.

‘빨리 끝내야 해!’

흑우가 장내를 휩쓸었다.

“으아아악!”

“끄아악!”

자오가 날뛰고 백승무도 날뛰었다.

얼마 안 가 혈혼방 패거리는 한 명도 남김없이 바닥에 쓰러질 판이었다.

바로 그때!

“아! 미! 타! 불!”

웅혼한 사자후(獅子吼)와 함께 한 인영이 장내에 내려섰다.

검박한 승복를 입은 마른 체격의 중이었다.

그를 본 정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어쭈. 제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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