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뜻밖의 자질
정광은 봇짐을 지고 팽강웅과 함께 방을 나섰다.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모이셨어요?”
팽만소가 대표로 대답했다.
“자네 일행이 짐을 들고 나와 있더군. 떠나기 전에 인사는 해야 하지 않나.”
정광은 먼저 팽만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잘 풀렸으니 이따가 대공자와 얘기해 보세요.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팽강웅의 안색을 본 팽만소는 그답지 않게 고마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광의 전음을 또 듣기 전까지는.
-그런데 아무리 사정이 있어도 그렇지, 왜 그렇게 입이 가벼우세요?
“…….”
-이제 어르신과 얘기 안 할 거예요.
팽만소에게 일침을 준 정광은 팽강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 먹고 놀았네요.”
“하하. 다행이외다.”
“그만 갈게요.”
“자주 들러주시오. 기다리고 있겠소. 아니, 내가 강호에 나가리다.”
“뭐 그것도 좋죠.”
다음은 팽수빈이었다.
“제자야. 수련 잘하고 있어. 다음에 보자.”
“네, 사부님. 그런데……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사부님의 본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아. 깜빡할 뻔했네.”
정광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얼굴 몇 군데를 찔렀다.
그러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본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됐지?”
“……네.”
“어째 반응이 영 시원찮네. 마음에 안 들어?”
머뭇거리던 팽수빈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소문보다는 좀…….”
좀?
좀 별로라고?
뭐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얘 눈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정광은 옆에 있던 백승무와 자오의 역용까지 풀어버렸다.
그들은 각각 곱상한 부잣집 도련님과 평범한 중년인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쪽과 비교하면 어때?”
“…….”
“왜 우물쭈물하는 거야?”
“…….”
이젠 아예 기가 찼다.
반응을 보니 차라리 저들이 낫다는 말 아닌가.
“……제자야.”
“네. 사부님.”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미남자니?”
팽수빈은 두 사람을 힐긋거렸다.
자신의 오라비인 팽강웅과 팽강휘였다.
정광은 내심 탄식했다.
‘산적 같은 놈들만 보면서 커서 미적 감각이 망가졌구나.’
그가 비록 사부라 하나 취향까지 바로잡아 줄 수는 없는 일.
깨끗이 포기한 뒤 황태손을 바라봤다.
“저하. 보중하세요.”
“하하. 그대의 본 얼굴을 보게 되어 보중 못 하게 됐소만.”
“저런. 힘내세요. 제가 대역 죄인이 될 수는 없잖아요.”
“으하하하. 노력해야겠군. 약조는 지킬 거라 믿소.”
“그 정도야 뭐.”
정광은 시선을 내렸다.
황태손의 그림자를 향해서였다.
-응삼아. 일 똑바로 해라.
-……알겠소이다.
-이야. 내가 지었지만 딱인데. 응삼아, 응삼아. 아주 그냥 입에 착착 달라붙네.
-…….
모두와 인사를 끝낸 정광은 장내를 한 바퀴 둘러보며 포권을 했다.
모든 이들은 두 손을 모아 답례하며 정광의 무운을…… 사고만 안 치기를 빌었다.
“가자!”
“네!”
정광은 백승무, 자오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들의 행선지는 산서성(山西省)이었다.
* * *
정광 일행이 산서성으로 향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첫째, 그들이 있던 하북성 바로 옆이었다.
둘째, 정광이 주장했던 그 나물에 그 밥, 도교와 친우인 불교의 명승고적들이 많았다.
비록 정광의 독단으로 결정된 여정이었지만 백승무는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사대불교명산(四大佛敎名山)인 오대산(五臺山), 아미산(峨嵋山), 보타산(普陀山), 구화산(九華山) 중 문수보살(文殊菩薩)께서 상주하신다는 오대산을 가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기쁘군요. 안 그렇습니까, 자오 대협?”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한참 밑자락에 있는 귀주성(貴州省)에서 태어나 사마련에 몸담았던 자오가 언제 그런 곳에 가봤겠는가.
“그러게 말입니다, 백 공자. 먼저 들릴 운강석굴(雲岡石窟)은 또 어떻고요. 하남성의 용문석굴(龍門石窟), 감숙성의 막고굴(莫高窟)과 함께 삼대석굴(三大石窟)에 꼽히는 대단한 곳 아닙니까.”
오직 정광만이 침착했다.
그는 당장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자오. 임무를 드릴게요.”
평소답지 않게 들떠 있던 자오가 즉시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팽가에서 나오자마자 떨어진 임무였다.
어떤 일인지 모르지만 필시 중요한 것이리라.
“말씀만 하십시오, 진옥룡.”
“자오의 장기를 살려서 앞길을 정탐하세요.”
“알겠습니다. 혹 신경 써서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자오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정광의 입을 바라봤다.
어떤 무리의 움직임을 주시해야 하는지, 무엇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하는지 듣기 위해서.
정광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우리의 경로에 있는 유명한 반점, 객잔, 주루를 알아보시고 적당한 곳을 정해 미리 셈을 치르세요.”
“……네?”
“돈 아끼지 말고 최고의 곳으로…… 아니지, 깎을 수 있을 만큼 깎는 것 잊지 마세요. 정상적인 방법으로요.”
“……네?”
정광은 황당해하는 자오에게 덧붙였다.
“어디로 정했는지는 중간중간에 암어(暗語)로 남겨놓으시는 게 좋겠네요. 그 사마련 것 있잖아요. 고위층이 쓴다는 거.”
자오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혹시 그걸 보고 사마련에서 찾아오면 어떡하시려고…….”
“때려잡고 탈탈 털어야죠.”
“……일단 가겠습니다.”
정신이 다시 혼미해진 자오가 한시바삐 자리를 뜨려 했으나 정광은 꼼꼼한 사내였다.
“아. 암어를 못 볼 수도 있구나. 정하신 곳 입구에 검은색 천으로 매듭을 지어놓으시면 되겠네.”
“……왜 하필 검은색 천입니까?”
“자오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으니까요.”
“…….”
쉽게 말해 그걸 찢어서 매듭을 지으란 얘기였다.
자오는 더 이상 대꾸할 힘도 없어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떠났다.
그간 일취월장한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놀라운 신법이었다.
정광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백승무가 허리를 숙였다.
“사형.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응? 어디 가려고?”
“따라가서 제대로 깎으라고 말씀하실 참 아닙니까?”
정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제. 우리가 지낸 시간이 있는데 내가 설마 사제를 그렇게 쓰겠어?”
“……사형.”
백승무의 감동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박살 났다.
“사제가 그럴 시간이 어딨어. 어떡하면 돈을 더 불릴까 고민해야지. 각자에게 맞는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저는 그렇다 치고 사형은 무얼 하실 겁니까?”
“나? 사제가 벌어온 돈으로 뭐 하고 놀까 고민 중인데?”
“……고생하십시오.”
이렇게 세 남자의 여정이 시작됐는데 평탄하지는 않았다.
모두 자오 때문이었다.
“아니, 이게 깎은 거예요?”
“……저, 저는 최선을…….”
“최선이 무슨 쓸모가 있어요. 최고로 해내야지.”
“……흐윽.”
자오는 사파 출신이다.
정광을 만난 뒤 개과천선…… 은 절대 아니고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돌아섰지만, 불혹이 넘게 남의 것을 빼앗기만 했던 그가 제대로 된 협상을 어떻게 하겠는가?
장기인 구타와 협박을 봉인 당하니 반점, 객잔, 주루의 전문가들이 펼치는 현란한 말발을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
자연히 자오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살아가는 존재이거늘,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가슴에 쌓이는 울화를 풀기 위해 산적이라도 나타나 줬으면 했지만, 그들에게 몰려온 건 수많은 여인들뿐이었다.
“어머, 어머, 세상에나.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잘생겼지?”
“하아아. 우아한 도복하며 화려한 검이며 얼굴이랑 아주 딱 맞네.”
당연히 자오가 아닌 정광을 평하는 말들이었다.
역용을 안 한 정광은 그런 찬사들을 듣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도사여서 더 좋아! 감히 범접하지 못할 금단의 존재 같잖아!”
“내 말이! 가슴이 떨려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다니까!”
실제로 여인들은 정광 근처에 오지도 못했다.
그저 멀리 떨어져서 두 손을 모은 채 감탄을 터뜨릴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지!’
자오는 이 정도엔 익숙한 백승무와는 달랐다.
여인들의 고성에 지친 그는 정광에게 애원했다.
“다시 역용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고기와 술을 드시기도 편하실 텐데요.”
“그럴 필요까지야. 최근에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요즘은 소채와 차가 당기거든요.”
자오는 의심했다.
‘이거 혹시 은근히 즐기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환생한 뒤로 이보다 더한 환호를 매일 받으며 살아온 정광이었다.
중원까지 와서 왜 또 그러겠는가?
그에겐 깊은 뜻이 있었다.
새로운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사제. 오늘은 얼마야?”
“……어제보다 많이 와주신 만큼 더 받아냈습니다.”
“오오. 쏠쏠한데. 용돈 좀 되는걸.”
정광은 반점 주인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복 많이 받으시고 사업 번창하세요.”
반점 주인은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아예 바닥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감사합니다, 소신선님. 앞으로도 종종 들려주십시오.”
“그냥요?”
“설마 소인이 염치없게 그러겠습니까? 비율을 더 높여 드리겠습니다.”
“연이 되면 그럴게요.”
“영광입니다! 태상노군께 제를 올리며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자오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여, 여인들이 몰려온 만큼 반점 주인한테 돈을 받아내?’
그랬다.
여인들은 정광의 얼굴을 안주 삼아 술과 요리를 즐겼다.
정광은 천하제일미남이었기에 그녀들의 씀씀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정광은 자오가 눈탱이 맞은 것 이상으로 벌어들이고 있었다.
“자오. 뭐 해요? 다음 곳으로 출발하셔야죠.”
“……네.”
“거래 좀 잘해보세요. 나라고 이러고 싶겠어요? 손해를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이러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자오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후로도 수많은 패배가 쌓였다.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이기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오는 굴하지 않았다.
‘내가 질쏘냐!’
시간이 흐를수록 승리는 못 할지라도 아름다운 패배가 늘어났다.
눈탱이를 덜 맞았다는 말이다.
그 와중에도 정광은 오악(五岳) 중 북악(北岳)으로 꼽히는 항산(恒山)에 들러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오만 빼고.
‘아주 갈 곳은 다 가는구나!’
서러움을 삼키며 용맹정진한 자오는 운강석굴 인근의 대동현(大同縣)에 이르자 감격스러운 첫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시세보다 조금 싼 가격으로 객잔값을 치른 것이다!
백승무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자오를 얼싸안았다.
“자오 대협! 축하합니다!”
“크흑. 고맙소이다, 백 공자.”
정광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야. 멋지게 해내셨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아니, 최고로 해내겠습니다!”
자오의 눈에서 이글거리던 불꽃은 정광의 말에 꺼져버렸다.
“아뇨. 이제부턴 같이 다닐 건데.”
“……네?”
“자오가 맨날 다 정하니까 고르는 재미가 없더라고요.”
자오의 이마에서 핏줄이 불거졌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상대가 정광인 걸 상기하자 온몸의 피가 싸늘히 식었다.
‘안 돼! 흥분하지 마! 나를 또 시험하는 거다!’
그는 즉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알겠습니다. 진옥룡의 뜻대로 하시지요.”
“네. 일단 들어가죠.”
정광의 변덕을 오해한 자오는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광은 그런 그를 진심으로 칭찬했다.
“오오. 여기에 취직하셔도 되겠네. 뜻밖의 자질이 있으시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자오가 잡은 숙소는 산서성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객잔인 행화춘풍(杏花春風), 그곳에서도 제일 비싼 별채였다.
이렇게 대동현에서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근데 뭐 쓸 만한 소문 들은 거 없어요?”
“다른 지역에서 몰려온 흑도 문파가 이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는 문파와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합니다. 분위기가 영 안 좋은 게 조만간 큰 싸움이 터질 것 같다더군요.”
“전혀 쓸모 없는 소문이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광은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자오는 아니었다.
이제껏 쌓여온 울분을 풀 기회였다.
쉽게 말해 화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