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04화 (104/569)

104화

삼호는 항거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 정말 곤륜파의 도사가 맞기는 한 건가?’

아닐 테다.

도교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적지만, 정상적인 도사라면 저런 눈빛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만은 잘 알았다.

‘천하에 이런 마인이 있다니!’

그는 공포에 질려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렸다.

“크윽. 오, 오늘 일은 함구하겠소. 또 무엇을 하면 되오?”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던 정광은 대충 대답했다.

“네 사부와 생각해 봐.”

“……?”

“너희들의 목숨값이 얼마나 될지.”

“……!”

삼호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사부의 안위와 무공의 보완은 물론, 목숨까지 구하려면 그래야만 했다.

“……알겠소이다. 그럼…….”

사라지려는 삼호를 정광이 불렀다.

“하나 더. 흑서한테 이렇게 전해줄래?”

“……뭐라 말이오?”

정광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혁련후가 명했다고. 도망치거나 준비해 놓은 게 시원찮으면 어떻게 될지 잘 상상해 보라고.”

삼호는 이 말의 무거움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기에 반드시 전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 그에게 정광이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가는 김에 내 숙소에 저것 좀 갖다 놓을래?”

“……보따리 말이오?”

그랬다.

정광이 아까 싸놓은 전표와 금원보가 가득한 보따리였다.

그는 어리둥절해 하는 삼호에게 신신당부했다.

“투명암혼마공 펼쳐서 몰래 갖다 놓아야 해. 알았지?”

* * *

팽가로 돌아온 정광은 팽강휘의 전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황태손과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팽강휘의 처소에서 지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대표로 황태손이 물었다.

“대체 어디를 갔다 온 것이오?”

“과식해서 소화 좀 시키고 온다고 했잖아요.”

“소화를 시키는데 옷은 왜 그렇게…… 아!”

황태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광의 찢어진 옷 틈으로 보이는 무각사룡의 비늘 때문이었다.

“……잠깐 들어갑시다.”

정광은 황태손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황태손은 자리에 앉자마자 무각사룡의 비늘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을 어찌 그대가 입고 있소?”

“도마뱀 내의요?”

“……허어. 천고의 보물인 철혈무쌍용갑(鐵血無雙龍甲)을 도마뱀 내의라니…….”

황태손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정광도 마찬가지였다.

‘철혈장 소장주가 말했던 촌스러운 이름이잖아.’

잠깐 머리를 굴리자 어찌 된 연유인지 짐작이 갔다.

‘이걸 안다는 건…….’

과거 정광은 백가상단주 부부에게 무각사룡의 꼬리 두 덩이를 줬었다.

그들은 그것을 철혈장으로 보내서 보의 두 벌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는 정광이 입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관의 유력자에게 뇌물로 줬다고 했는데…….

‘관이 아니라 황실이었나. 관에 줬는데 그자가 황실에 진상했을지도.’

정광은 황태손에게 물었다.

“똑같은 거 입고 계세요?”

“……아니오.”

“흠. 그럼 황태자 전하나 황제 폐하께서 입고 계시구나.”

“……!”

놀라서 침묵하던 황태손이 쓰게 웃었다.

“그대 앞에선 비밀이 없구려.”

“그러게요.”

“하하하. 전설의 쌍각사룡을 잡은 것도 그대요?”

“전설은 무슨. 그냥 도마뱀인데요.”

감탄한 얼굴로 정광을 보던 황태손이 나직이 말했다.

“다른 한 벌에 대해선 비밀을 지켜주시겠소? 부탁이외다.”

황실의 안전을 위해 누가 입고 있는지 함구해 달라는 얘기 아닌가.

황궁은 복마전 중의 복마전이라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내심 혀를 차던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하하. 고맙소이다.”

“근데 너무 쉽게 믿으시는 거 아니에요?”

황태손이 어깨를 으쓱했다.

“진옥룡이 약조했는데 믿어야지 어쩌겠소?”

정광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사람 마음을 움직일 줄 아시네.”

“이제 내게 올 마음이 드오?”

“그 정도는 아니죠.”

“이런. 너무 성급했군.”

입맛을 다시던 황태손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슬슬 말해보시지 그러오.”

“뭘요?”

“누구와 싸웠소? 그대가 이겼을 터, 이제 위험은 없어진 것이오?”

정광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너무 똑똑해서였다.

‘시기를 많이 사겠는데. 이래서야 오래 살 수 있으려나.’

슬쩍 시선을 돌려 황태손의 그림자를 봤다.

먼저 돌아와 그곳에 숨어 있는 삼호를 보자 웬만하면 죽지 않을 거란 믿음이 들었다.

‘북천호가 놈들은 싸움보다 암습과 호위에 능한 놈들이니 괜찮을지도.’

그러고 보니 삼호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황태손한테 잘 말했지?

-……물론이오. 그대를 열심히 쫓았으나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말씀드렸소.

-잘했어. 근데 너보고 쓸모없는 놈이라 안 해?

-…….

-앞에는 칭찬이잖아.

-……고맙소이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정광은 고개를 돌려 황태손을 바라봤다.

“저하.”

“말하시오.”

“그냥 지나가죠.”

“……!”

어이없어하는 황태손과 달리 정광은 태연했다.

“안전해지신 건 맞아요. 더 놀다 가셔도 될 정도로.”

“흐음…….”

황태손은 정광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림의 일인가 보오.”

“네.”

“무림과 관이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도 있소.”

“그거야 그렇죠.”

“그런데 그냥 지나가자?”

“역시 무리인가.”

정광이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리자 황태손이 피식 웃었다.

‘더 다그치면 도망가고도 남을 자지. 잡을 수 있을 리도 없고. 어쩐다?’

정광에 대한 소문이나 겪어본 바로 판단하면, 그가 상대한 이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부지휘사조차 경지를 측량할 수 없다는 진옥룡이다. 그의 옷이 저렇게 된 걸 보면 보통 적이 아니란 건데…….’

감히 황실의 적통을 노린 자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으나 알려고 해도 말해줄 정광이 아니었다.

‘외부의 적뿐만이 아니겠지.’

잔치에서 자신이 따라준 술을 마시고 멍하니 있다가 쓰러진 팽강웅이 떠올랐다.

‘그도 연관되어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안 좋은 일이었다.

사부처럼 생각하는 팽만소를 생각해도 그렇고, 자신을 위해서도 그랬다.

팽가는 그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가문이었다.

팽가에 온 것은 팽만소를 만나기 위함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광이 말했다.

“내부의 적 같은 건 없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

원래 없었다는 건지, 이제는 없다는 건지.

뭐가 됐든 정광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만약 황태손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함께 있던 그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기에.

‘기껏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왔는데 그르칠 필요는 없지.’

하북팽가의 대공자 팽강웅은 야심도 있고 능력도 있었다.

한마디로 쓸 만한 자였다.

이제껏 관계를 쌓아온 이들 중 몇몇처럼 조금만 신경 써서 다루면 되리라.

‘잠깐. 그러고 보니 기회군.’

이번엔 물러나더라도 약조는 받아놔야 하지 않겠는가.

황태손은 태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흐음. 위험은 없어졌다 해도 혹시 모르니 빨리 돌아가야겠군.”

“그게 낫겠죠.”

“좋아. 이렇게 합시다.”

“네?”

“누가 날 노렸든 이미 지나간 일. 앞으로가 중요한 것 아니겠소?”

정광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의 예감은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지난 일은 잊을 테니 일 년 안에 날 찾아오시오.”

“네?”

정광이 놀라자 황태손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칠주야 정도 머물며 술 한잔하는 거로 퉁 칩시다.”

황태손치고는 무척 저렴한 표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 때문에 그의 배포를 느낄 수 있었다.

하여 정광도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러죠, 뭐. 제가 손님일 테니 술값은 낼 필요 없겠죠?”

* * *

정광은 승낙한 뒤 방을 나왔다.

그에게도 나쁜 얘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황궁 구경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으니까.

‘뭐 끈질기게 끌어들이려고 하면 도망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팽강휘가 말을 걸려 했으나 팽만소가 빨랐다.

“둘이 얘기 좀 하세.”

“와. 오늘 인기 좋네요.”

두 사람은 정광이 머물고 있는 방에 들어갔다.

“어찌 된 건가?”

정광의 대답은 아까와 같았다.

“그냥 지나가죠.”

팽만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광은 대충이라도 얘기해야 했다.

“대공자가 사술에 걸렸었어요.”

“……!”

“제가 지웠고요.”

“…….”

“이제 됐죠?”

“……자네라면 됐겠나?”

“아마?”

나직이 한숨을 쉰 팽만소가 물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걸 어찌 알고 왔나? 강웅이가 사술에 걸린 건 어떻게 알았고? 자네의 옷이 찢어질 정도면 강한 놈들이란 말인데, 누구지? 어디에 있…… 자네가 이미 죽였겠군.”

“우와. 이제 보니 말 많으시네요.”

“이런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어서 대답해 주게.”

정광은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말하면 사마련과 당장 전면전을 벌이려고 할 텐데 내가 왜?’

사마련과 싸우는 건 무림맹으로 충분했다.

팽가 전체가 나서선 안 됐다.

왜?

아무리 팽가라 해도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될 테니까.

‘아니, 아예 망해 버릴지도.’

그랬다간 팽수빈의 수업료를 한 푼도 받을 수 없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게다가 마공을 쓴 걸 들키게 될지도 모른단 말이지.’

사마련과 팽가는 물론 누구도 알아선 안 됐다.

‘뭐 삼호…… 아니지, 응삼이 그놈은 제어할 방법이 있으니까 상관없고.’

팽만소는 정광의 말을 기다리다가 눈매를 좁혔다.

“……말할 생각이 없군.”

“네.”

“……이유는?”

“해결했으니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말해 보게나.”

“대공자 있잖아요. 깨어났죠?”

“그렇네만.”

“정신이 좀 멍할 텐데.”

“……확실히 그렇네. 뭔가에 깊이 실망한 듯 넋이 나가 있더군.”

정광은 맞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제 말이. 그대로 뒀다간 폐인이 될지도 몰라요.”

“……폐, 폐인?”

핏줄은 어쩔 수 없는 걸까?

팽만소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그에 비해 정광의 어조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러니까 제 방으로 보내주실래요? 고쳐 드릴게요.”

팽만소는 복잡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이렇게 넘어갈 생각이군.”

“더 적당한 표현을 황태손 저하께 배우고 왔죠. 퉁 치는 겁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고민하던 팽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강웅이를 만나보겠네.”

그는 손자에게 물어볼 게 무척 많았다.

* * *

정광은 무척 바빴다.

팽만소가 떠나자 백승무와 자오를 방으로 불렀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사형! 대체 어떤 고수와 싸우셨길래 옷이 그 지경이 됐습니까?”

“믿을 수가 없군요. 천하의 진옥룡께 그런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자가 천하에 몇이나…….”

정광은 자오의 수다를 냉정하게 끊었다.

그리고 삼호가 침상 밑에 쑤셔놓은 보따리를 꺼냈다.

그것을 풀자 금은보화가 가득 나왔다.

“이것 좀 같이 정리하죠.”

“……사형! 또 어디를 턴 겁니까?”

“……이 정도 양이면 아마도…….”

“그만. 그만. 더 말하면 수련시킬 거예요.”

백승무와 자오는 묵묵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해본 경험이 있는지라 무척이나 빠른 손놀림이었다.

얼마 안 가 정리가 끝났다.

“사제. 대충 얼마나 돼?”

백승무가 대략적인 금액을 말했다.

정광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사형. 이 정도면 결코 적지는 않습니다.”

“그런가?”

하도 많이 털다 보니 감각이 둔해졌나 보다.

정광은 백승무에게 잘 보관하라고 한 뒤 일어섰다.

주저하던 백승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사형.”

“왜?”

“팔목에 차신 것 말입니다. 단주(短珠) 아닙니까?”

“아, 이거? 이상해?”

반불(半佛)을 말함이었다.

정광이 단주의 구슬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넘기자 더 이상해 보였다.

구슬 하나하나마다 요귀와 부처의 형상이 번갈아 새겨져 있는 것 아닌가.

백승무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모양도 그렇지만 도인이 승려들이나 하는 단주를 차다니요. 태상노군께서 화를 내실지도 모릅니다.”

진지한 충고였건만 정광의 반응은 달랐다.

“사제는 도가 너무 얕구나.”

“……네?”

“태상노군께서는 그렇게 쩨쩨하신 분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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