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멸구(滅口)
펼쳐선 안 되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정광의 실력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고 나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
숨기고 있던 투명암혼마공(透明暗魂魔功)을 펼친 중년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모르게 떨리는 입술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사부님의 말씀이 맞았구나. 이것이 천마신교의 마인인가!’
그것도 보통 마인이 아니었다.
감히 황태손을 해하려 했던 사마련 돼지의 말처럼 좌우광명사자 중 한 명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직책과 상관없이 그가 상대할 수 있는 경지의 고수가 아니었다.
‘이런 자일 줄 알았다면 따라오지 않았을 것을…….’
생각을 멈춘 중년인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설령 정광이 지고한 경지의 마인인 걸 알았다 하더라도 황태손의 명을 어길 순 없다.
어차피 그는 정광을 따라올 운명이었다.
‘최선은 다해보겠다만, 여기가 내 무덤이 되겠군.’
죽음을 직감해서일까.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삼호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아들이 일곱 살이 되자 고환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 황궁으로 보냈다.
제법 똘똘한 아들이었기에 훗날 태감(太監)의 자리에라도 오르면 자신도 부귀영화를 맛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남성의 상징을 뺏기면서까지 황궁에 들어갔건만. 삼호가 배속된 곳은 십이감(十二監) 중에서 제일 끗발이 떨어지는 직전감(直殿監)이었다.
황궁에서 청소나 하는 아문(衙門)의 어린 환관이 힘을 얻을 수 있을 리 있나.
삼호는 상관과 동기에게 갖은 구타와 욕설을 당해가며 일 년을 굴렀다.
아무런 연줄도 돈도 없이 황궁에 팔려온 그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삶에 대한 절망만 이어지던 어느 날 지금의 사부를 만났고, 그의 자질을 눈치챈 사부가 그를 거뒀다.
‘네게 새로운 삶을 주겠다. 나를 따르겠느냐?’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 있나.
그때부터 삼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처음엔 환관으로 이루어진 첩보기관, 동창(東廠)에 온 것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은 물론 녹봉까지 풍족해졌다.
게다가 이 모든 것들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놀라운 무공을 배우게 되었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고통스러운 수련을 거친 뒤, 그에게 새로운 직함이 내려졌다.
황실의 적통을 이은 자들을 그림자처럼 호위하는 비밀수신호위(秘密守身護衛), 황실수호암응(皇室守護暗鷹)이 된 것이다!
그것도 황실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요인인 황태손을 호위하는 삼호가!
‘사부님. 부디 보중하시길…….’
상념을 지운 삼호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그의 양손에는 두 개의 괴(拐)가 쥐어져 있었다.
보통 괴(拐)라 하면 목봉(木棒)에 수직으로 된 손잡이가 달린 것을 말하는데 그의 것은 달랐다.
칙칙한 검은색을 띤 철괴(鐵拐)였다.
그 끝은 여느 괴와 달리 검 끝처럼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무인이라면 보자마자 경각심부터 들 기문병기(奇門兵器)였다.
안 그래도 특이한 모양과 다양한 파지법 때문에 기괴한 초식을 펼치기로 유명한 병기 아닌가.
거기에 단단한 재질과 검첨(劍尖)까지 추가했으니, 얼마나 현란한 공격을 쏟아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정광의 감상은 달랐다.
물끄러미 철괴를 보던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장난감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네.”
“……?”
“북천호가(北天扈家)의 어떤 놈이 황궁까지 흘러들어 간 거야? 살아남은 놈은 거의 없을 텐데.”
“……!”
삼호는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한눈에 모든 걸 간파당해서였다.
순간 사부에게 끊임없이 들어왔던 절규가 떠올랐다.
‘진천마가 죽었다고? 웃기는 소리! 그는 악신이야! 아직도 천마신교는 그의 수중에 있을 것이다! 마공을 쓰는 이를 만나면 어떻게든 피해! 우리를 쳐죽이러 올 것이야!’
근래엔 늙어서 거동도 제대로 못 하지만 그토록 강했었던 사부다.
그런 사부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릴 정도로 진천마는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물론 삼호는 진천마가 아직도 살아 있으리라곤 믿지 않았다.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천마신교에 대한 두려움은 가지고 있었다.
과거 마도(魔道) 칠대가문(七大家門) 중 하나였다가 진천마에게 멸문당해 중원으로 흘러들어 온 북천호가였다.
그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사부와 그 제자인 삼호를 천마신교에서 따뜻이 맞아줄 리는 없었다.
‘옳다구나 하고 제거할 거라 하셨지.’
천마신교의 칠대가문은 경쟁자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가 무너지면 새로운 하나가 끼어 일곱 개의 숫자를 유지했지만, 무너진 가문은 철저히 짓밟아 재기할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정광을 죽이고 흔적을 지워야 했다.
삼호의 손에 들린 쌍괴가 어두우면서도 투명한 빛을 띠었다.
그 빛은 그의 몸으로 번졌고 얼마 안 가 신형 자체를 덮어버렸다.
‘투명암혼살법(透明暗魂殺法)!’
어두운 빛이 사라지며 삼호의 모습도 없어졌다.
북천호가의 비전 살법을 펼쳐 허공 속으로 녹아든 그는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은밀하지만 위력이 담긴, 기괴하다 못해 환상적인 초식으로 정광을 덮친 것이다!
정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분이 미치셨나.”
전생에 마도(魔道) 칠대가문(七大家門)을 끊임없이 갈아치우며 싸웠던 정광이었다.
그가 누구던가?
고금제일천재(古今第一天才)가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무공을 그들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그것들을 효율적으로 깨부수는 파훼법(破毁法)을 창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깟 투명암혼쯤이야.’
한 끼 식사거리도…… 지금은 너무 어리니 식후 운동거리쯤 되려나.
정광은 뒤로 일장 물러났다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나아갔다.
간발의 차이로 그가 서 있던 곳과 지나온 공간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콰콰쾅!
삼호가 몸을 숨긴 채 휘두른 쌍괴에 공기가 터져 나간 것이다!
그 충격에 정광의 옷이 폭풍을 맞은 것처럼 세차게 나부꼈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할 일을 했다.
“이쯤일 텐데.”
좌로 이보를 갔다가 뒤돌아 운룡을 찔러 넣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운룡이 허공의 한 점에 박혔다.
그리고 그대로 그어 내렸다.
찌지지직-
뭔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이 벌어졌다.
그 속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삼호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쌍괴를 들고 있었다.
정광이 씩 웃었다.
“무량수불.”
“……!”
거대한 금룡이 삼호의 시야에 급격히 확대됐다.
삼호는 이를 악물며 혼신의 힘으로 쌍괴를 휘둘렀다.
콰차창!
* * *
정광은 손목에 찬 사불주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공을 강하게 쓰자 마기가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감출 수 있는 마기에 한계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쓸모가 많이 적어질 터.
앞으로 알아봐야 할 문제였다.
‘돼지에게 자세히 물어볼걸 그랬네.’
그놈은 살이 워낙 쪄서 필요할 때만 억지로 끼어 사용하는 것 같았지만 정광은 계속 찰 생각이었다.
상소운에게 생각이 미치자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아차. 역천경한테 돼지 피를 흠뻑 먹여주겠다고 했었지.’
정광은 약조를 지키는 남자였다.
상소운이 피를 흘렸던 자리로 가서 역천경을 꺼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았는데…….
‘이런.’
피가 이미 말라 굳어서 역천경이 흡수를 못 하는 것 아닌가!
흠뻑 먹이긴커녕 표면에 묻지도 않는다니!
‘이대로 물러날 순 없지.’
정광은 약조를 지켜야 했다.
바닥의 핏자국에 역천경을 박박 문댔다.
끼릭, 끼릭, 끼이이익-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 진짜. 이래도 안 되네.’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장원에 넘쳐나는 게 시신 아닌가.
-야. 양해 좀 해라. 다른 놈 피 먹여줄게.
-……웅.
-어라? 너 왜 그렇게 얌전해?
길길이 진동할 줄 알았건만 새색시처럼 조용한 반응이라니.
그때, 곤륜을 드나들던 여인들의 남편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 대장군 같은 새색시도 꽤 있다고 했지.’
어찌 됐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너 아까부터 왜 자꾸 가늘게 떨어? 어디 아파?
그럴 리가 있나.
역천경은 겁을 먹은 것이었다.
정광이 괴물인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언젠간 집어삼키리라 다짐하고 있던 역천경은 생각을 바꾼 지 오래였다.
‘흐음. 이놈이 겁먹었나?’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
역천경의 마음을 짐작한 정광은 마기를 담아 물었다.
-그냥 굶는 건 어때? 질척질척한 피를 먹어봐야 몸에도 안 좋은데.
-……웅.
정광은 역천경의 표면을 대충 쓰다듬었다.
-잘했어. 머리가 아주 나쁘진 않구나.
울컥하려던 역천경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역천경은 조요경(照妖鏡)의 일종이었다.
조요경을 제대로 다루려면 지고한 경지의 마기나 사기, 그리고 절대로 꺾이지 않는 의지가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정광은 그 모든 것을 가진 이였다.
그런 그에게 어찌 반항하겠는가?
침묵하는 역천경을 보던 정광은 내친김에 할 말을 다하기로 했다.
-반불이랑 친하게 지내. 알았지?
반사적으로 ‘우웅’이라고 하려던 역천경은 가까스로 참았다.
마기와 요기를 찾아내는 역천경.
마기와 요기를 감춰 버리는 사불주.
성질이 전혀 다른 귀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안 들려? 사이좋게 지내라고.
-…….
-너는 생각이라도 하고 웅웅거릴 수도 있지, 얘는 생각조차 없는 애잖아.
-……웅!
역천경은 혼신의 힘을 다해 대답했다.
정광의 말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정광의 손아귀 힘에 항복한 것이었다.
-진작 이러지.
역천경을 품속에 넣은 정광은 옷자락에 내공을 주입했다.
짧게 폭발시키자 옷에 묻어 있던 핏자국이 튕겨 나갔다.
옷매무새를 확인한 정광은 피식 웃었다.
‘아주 넝마가 됐네.’
사실 넝마까지는 아니었으나 여기저기 찢어진 곳이 꽤 있었다.
사마련의 무인들과 삼호가 남긴 흔적들이었다.
정광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하아아암.”
간만에 사정없이 손을 쓴 건 좋았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전생은 물론 현생의 정광도 이런 조잡한 싸움으로는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갈증을 채우러 갔다.
시신들은 물론 전각 안까지 뒤져서 탈탈 털었다는 말이다.
현생을 살며 생긴 취미였다.
“오오.”
전표, 금원보, 책자 등 상당히 많은 것들이 나왔다.
그중 부피가 작고 값나가 보이는 것들을 추리던 정광은 깊은 후회를 했다.
‘사제를 데려올걸.’
그래도 데려오지 않은 게 옳은 선택이었다.
마공으로 살육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주긴 좀 그렇지 않은가.
‘아 몰라. 작은 거로만 대충 챙기자.’
전각에 들어가 침상의 천을 찢어서 나왔다.
거기에 추린 것들을 쏟아붓고 묶자 적당한 크기의 보따리가 되었다.
그것을 짊어지려던 정광은 뒤처리 문제에 생각이 미쳤다.
황태손이 보낸 것이 뻔한데 죽이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역시 살리는 게 편하려나.’
그는 쓰러져 있는 삼호에게 다가가 세차게 걷어찼다.
퍼억!
“크흑!”
기절했던 삼호가 눈부신 속도로 재주를 넘었다.
제법 먼 곳에 내려선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했다.
그리고 정광을 발견하자 역천경이 그랬던 것처럼 몸을 가늘게 떨었다.
“이리 와서 앉아. 얘기 좀 하자.”
“……!”
“아, 어서.”
머뭇거리던 삼호가 정광의 말을 따랐다.
“너, 살고 싶지?”
“……!”
“머릿속에서 오늘 일을 지워. 살인멸구(殺人滅口)가 아니라 활인멸구(活人滅口)로 가줄게.”
“…….”
“흐음. 죽고 싶어? 뒤처리가 좀 귀찮지만 어쩔 수 없네.”
침묵하던 삼호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가늘고 뒤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를 믿는 것이오?”
“아니.”
“……그럼 뭘 믿고 살려주겠다는 것이오?”
정광은 북천호가의 인물들을 떠올렸다.
누가 삼호의 사부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흑서(黑鼠) 그놈이 네 사부지?”
“……처음 듣는 별호요.”
“어라? 그 녀석, 스스로 지은 별호를 알려줬나 보네. 뭐였더라? 말도 안 되게 부끄러운 거였는데.”
기억을 뒤지던 정광이 손가락을 튕겼다.
“흑암표류살객(黑暗漂流殺客)!”
“……!”
삼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아는지 놀라서였는데 정광은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다.
“너도 역시 어이없어하고 있었구나. 어둠 속에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살객은 개뿔. 방향감각 없는 까만 쥐새끼지. 안 그래?”
그로서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삼호에겐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살기를 일으키며 외쳤다.
“사부님을 모욕하지 마시오!”
“그러게.”
“……!”
“제자인 네 앞에서 그러면 안 되지. 너 제법 괜찮은 제자구나?”
정광은 칭찬을 던진 뒤 삼호를 노려봤다.
그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쏘아졌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다고 감히 내 앞에서 살기를 일으켜?”
“크흑!”
이를 악물고 견디던 삼호는 마기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더 기특하네. 어쨌든 그놈 가문 무공엔 문제가 있어. 너도 슬슬 느끼고 있을걸?”
“……!”
정광의 말대로였다.
북천호가의 근원 심법인 투명암혼마공(透明暗魂魔功)에는 경지가 높아질수록 깊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덕분에 삼호의 사부는 거동을 제대로 못 한 지 꽤 됐고, 삼호 역시 진기가 아주 미세하게 새어나가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시오?”
“나니까.”
“…….”
“흠. 말보단 행동이 나으려나.”
정광은 삼호의 혈도들을 짚었다.
천용(天容), 협백(俠白), 천돌(天突), 양문(梁門), 천추(天樞) 기사(氣舍), 인영혈(人迎穴) 순이었는데 어찌나 빠른지 삼호가 반응할 시간조차 없었다.
“어때?”
정광의 물음에 삼호는 토혈로 대답했다.
“우웩!”
시꺼먼 핏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정광은 그것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운공해 봐. 한결 나을걸.”
“…….”
삼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얼마 안 가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 어떻게!”
“진기가 하나도 안 새지?”
“……그렇소.”
정광이 별것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
“내가 찌른 순서대로 흑서한테도 펼쳐. 그 녀석, 걸음마는 할 수 있게 될 거야.”
“……왜 이런 은혜를 베푸는 것이오?”
정광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착각하지 마. 그거 임시방편이거든.”
“……조만간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는 말이오? 당신에게 배워서?”
“응.”
고민하던 삼호가 입을 열었다.
“입만 봉하면 되는 것이오?”
“설마.”
정광은 머릿속에서 주판알을 튕겼다.
전생에 그의 뒤통수를 쳤던 건 흑서가 아니라 흑서의 할아비였다.
오히려 흑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일이라 믿고 자신의 할아비를 결사적으로 막기까지 했던 것이다.
‘판단력은 있는 놈이니 확실히 고쳐서 써먹는 게 나으려나.’
임시방편으로 입을 막아놓고 언젠가 찾아가서 죽이려 했던 정광은 마음을 바꿨다.
“아예 제대로 고쳐주고 제대로 받아낼게.”
삼호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사부와 무공만큼 소중한 건 없었으니까.
동시에 거부하고 싶은 제안이었다.
황실을 배신하는 건 둘째치고 정광이 뭘 요구할지 두려웠기에.
‘그런데…….’
삼호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정광.”
“…….”
진실한 정체를 물었건만, 힘이 쭉 빠지는 삼호였다.
하지만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또 있었기에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약조를 지키지 않으면 어떡하려고 그러시오?”
“뭐 그것도 괜찮겠지.”
“……?”
정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름 재밌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