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01화 (101/569)

101화

아련한 추억

정광은 전각 안으로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여러 놈이 은신해 있다가 덮칠 게 뻔한데 뭐 하러 그러겠는가.

좁은 곳에서 투덕거리는 건 체질상 안 맞았다.

‘어디 보자.’

전각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본 정광은 운룡을 뽑았다.

운룡의 검붉은 검신이 세상에 나와서 햇빛을 반사했다.

“합.”

내공을 밀어 넣자 녀석이 찬란한 황금빛을 토해내며 울었다.

우우우우웅-

정광은 손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진동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운룡을 휘둘렀다.

사아아악-

뭔가가 베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광은 발걸음을 옮겨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사아악- 사아악-

어느새 운룡을 검집에 넣은 정광이 뒤로 물러났다.

‘이쯤이면 되려나.’

뒷걸음질을 멈춘 정광은 한 발을 들어 올렸다가 강하게 내디뎠다.

쿵!

그 충격에 놀란 땅이 진동을 일으켰다.

그 진동은 앞으로 달려가 전각을 흔들었다.

끼기기긱-

그러자 전각을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기둥 몇 개가 움직였다.

사선으로 베어진 그것들은 좌우로 엇나갔고, 지지력을 읽은 전각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쿠쿠쿠쿠-

그리고 얼마 안 가 굉음을 내며 주저앉았다.

콰아아아앙!

‘아. 시끄러워.’

전각이 무너지며 엄청난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중 일부는 정광을 덮쳤는데, 미리 준비하고 있던 정광이 소맷자락을 휘젓자 깨끗하게 소멸되었다.

‘생각보다 먼지가 많이 나네. 역시 중원의 건축 양식은 다르구나.’

전생의 경험과 비교하던 정광이 한 발짝 옆으로 움직였다.

쐐액-

독을 발라 요사하게 번들거리는 비수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신호였을까.

무너지는 전각 안에서 튀어나왔던 무인들이 정광에게 달려들었다.

“와. 고마워라.”

도발이 아닌 진심이었다.

적을 쫓아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닐 필요가 없어졌지 않은가.

게다가 이자들은 아까의 적들보다 훨씬 강했다.

사기가 뚝뚝 떨어지는 게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울 정도.

“잘 먹겠습니다.”

정광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몸을 움직였다.

마령보(魔靈步)!

햇볕이 따가운 대낮이었으나 정광의 신형은 유령처럼 흔들거렸다.

적의 봉이 찔러오면 그 바람에 밀린 것처럼 뒤로 밀려났고, 도가 베어오면 그 날에 베어진 것처럼 흩어졌다.

물론 피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광의 허리춤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금룡(金龍)이 튀어나왔다.

꽈아아아아-

흉포한 창룡후를 터뜨린 금룡은 그대로 주변을 휩쓸었다.

병기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았다.

금룡은 정광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물러서지 않고 덤벼들던 적들의 눈이 공포에 젖었다.

그들의 적은 사람이 아니었다.

마(魔), 그 자체였다.

“뒤, 뒤로…… 끄악!”

수하들을 뒤로 물리려던 무인의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그는 목이 잘린 채 모로 쓰러지는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봤다.

‘마, 마신(魔神)…….’

거기까지였다.

혼백이 흩어진 그는 자신의 죽음은 물론 수하들이 참살당하는 모습도 못 보게 되었다.

이는 그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정광이 부리는 금룡에 의해 빠른 속도로 죽어갔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그들의 눈동자에는 오직 공포심만이 새겨져 있었다.

그 공포심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도 전염되었고, 견디다 못한 한 무인이 울부짖었다.

“아, 악귀(惡鬼)! 악신(惡神)이다!”

“내가?”

“헉! 어, 언제?”

무인은 경악했다.

저 멀리서 날뛰고 있던 정광이 그의 코앞에 와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정말 경악한 건 정광이었다.

‘다른 놈도 아니고 사파 놈에게 악(惡)이란 말을 듣다니.’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냔 말이다.

정광은 전생에서부터 사파를 싫어했다.

정파보다 더.

‘잠깐. 정파 애들도 어이없긴 하지.’

그들은 마도(魔道)나 사도(邪道)나 똑같이 천인공노할 무리로 취급했다.

‘엄연한 차이가 있는데 무슨.’

천마신교의 경우 자신의 혼을 스스로 단련해 마(魔)를 품고, 그것을 바탕으로 마공을 수련한다.

그 와중에 정신이 나가 버려서 악행을 저지르는 녀석도 조금…… 조금 많이 있지만 세상일이 다 그런 거 아닌가.

하지만 사파는 아니었다.

타인의 생명과 혼을 갈취하는 사악한 편법으로 무공을 닦는 놈들이 허다했다.

특히 상소운 같은 경우엔 풍기는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악질이었고.

‘물론 사파에도 예외는 있지.’

옥기린과 자오가 그랬다.

만약 그들이 이곳에 있는 놈들처럼 사악한 기운을 품고 있었으면, 지금과는 무척 다른 관계가 되었으리라.

‘아.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정광은 눈앞에 있는 무인의 허리를 양단한 뒤, 짓쳐 드는 병기들을 향해 운룡을 휘둘렀다.

스으으윽-

기괴할 정도로 조용한 소리와 함께 수많은 병기와 사람이 갈라졌다.

“끄아악!”

“커억!”

정광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의 운율에 맞춰 검무를 췄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룡이 허공을 노닐며 무인들을 희롱했다.

그 결과 그들은 단말마를 토해내며 생을 마감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살육!

무인들은 질린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세상에 또 없을 대마두(大魔頭) 같은 짓을 벌이면서도 담담한 표정이라니!

그것이 더 큰 공포심을 불러왔다.

“아, 안 돼! 더는 안 돼!”

“크흐흑. 악신이다! 도망가야 해!”

이성을 잃은 무인들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여태껏 잔잔했던 정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진짜. 사파의 정예란 애들이 왜 이리 투지가 없어.”

한마디로 귀찮아서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보내줄 수는 없는 일.

정광은 사방에 널린 주인 잃은 병기들을 걷어찼다.

쐐애애액- 스윽.

“컥!”

검이 놀라운 속도로 날아가 달아나는 무인을 꿰뚫었다.

부우우웅- 콰직!

“끄아아악!”

도나 봉처럼 끝이 뾰족하지 않은 병기들은 무인들의 뒤통수를 박살 냈다.

“아. 발 아파.”

이런 일을 몇 번 반복하자 더 이상 죽일 이들이 없어졌다.

다섯 명만 빼고.

정광은 발끝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아주 딱 맞게 끝났네.”

그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네 명의 노인과 상소운이 보였다.

그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ꠎꠐꠓꠜꠡꠁꠖꠅꠃ…….”

“뭐래. 어디 말이야?”

정광과 상소운의 시선이 마주쳤다.

원래의 비대한 몸을 한 상소운은 작은 눈에서 소름 끼치는 빛을 쏘아냈다.

그것은 살기와 자신감이었다.

“호오. 잠깐만. 내가 맞춰볼게.”

정광은 운룡을 검집에 넣고 양손의 손가락들을 하나씩 꼽았다.

“잡스러운 기운이 오행(五行)을 따라 움직이는데…….”

“…….”

“어라? 역오행(逆五行)으로 바뀌고 역팔괘(逆八卦)까지 더해져? 육십사괘(六十四卦)가 자리를 바꾸고 음양도 뒤틀리잖아.”

“……!”

“재밌는데. 그 술법 이름이 뭐야?”

작은 눈을 찢어져라 뜬 상소운이 악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네 명의 노인들과 함께 주술을 완성했다.

“……ꠢꠀꠄꠄꠐ!”

“오. 이제 시작인가?”

정광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그 순간.

세상이 짙은 어둠으로 변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나왔다.

* * *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정광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흐으으읍.”

그의 입꼬리가 살짝 휘었다.

기억하고 있던 공기, 그것도 십만대산(十萬大山)의 것이었다.

‘무척 맑긴 한데…….’

곤륜의 것과 비견될 정도.

‘다른 것이 섞여 있군.’

다름 아닌 피 냄새였다.

그것을 인식하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사람들로 변했다.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전생에 부대꼈던 자들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병기를 꼬나쥔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이곳은 하북성이 아닌 신강(新疆).

그중에서도 십만대산에 있는 천마신교였다.

정광은 씩 웃으며 검을 뽑았다.

운룡이 아니었다.

전생에서 약관이 되기 직전에 썼던, 태어나서 마흔세 번째로 썼던 검이었다.

그 순간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무시무시한 마공들이 정광을 노렸다.

사마련의 무인들과는 비교하기가 미안해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당연히 정광은 신이 날 수밖에.

‘이 정도 수준의 녀석들과 노는 게 얼마 만인지 원.’

검에 진기를 불어넣자 검은 마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휘두르며 사방팔방을 헤집었다.

살을 자르고 뼈를 갈랐다.

비명이 귀를 찌르고 호흡할 때마다 피안개가 섞여 들어왔다.

전생에 진천마였던 시절, 그가 살았던 삶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너무나 똑같았다.

“아야.”

적들을 밀어내고 숨을 고르고 있던 정광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구리에 자루까지 박혀 있는 비수가 보였다.

고개를 들자 그 비수를 쥐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전생의 정광이 갓난아이일 때부터 이십 년 가깝게 시중들었던 시비였다.

‘얘는 여기서도 이러네.’

피식거리던 정광이 일권을 내질렀다.

퍼억!

얼굴이 함몰된 시비가 비명도 못 지른 채 날아갔다.

정광은 주먹에 묻은 피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주먹으로 날렸었지. 아련한 추억이네.’

전생과 똑같은 흐름이었다.

헌데,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윽. 이건 좀 아픈데.”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검신이 그의 가슴을 뚫고 나와 있었다.

뒤를 돌아본 정광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유모?”

전생의 세 번째 유모였다.

“유모는 나 지키다 죽었잖아. 안 어울리게 왜 이래.”

그녀는 대답 없이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정광의 목을 향해 밀어 넣었다.

서걱-

정광은 그 비수를 뺏어서 그녀의 목을 베었다.

붉은 실선이 생기더니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웃차.”

정광은 목각인형처럼 쓰러지는 그녀를 두 손으로 받았다.

“일단 여기 누워 있어. 일 끝내고 묻어줄게.”

그녀를 눕힌 뒤 얼굴을 쓸어내리자 원통한 듯 부릅뜨고 있던 눈이 평온하게 감겼다.

마치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이래야 유모답지.”

정광은 서서히 일어서며 내공을 일으켰다.

그의 몸에서 칠흑보다 어두운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좀 놀다 가려고 했는데 선을 넘으려 해?’

정광은 다시 다가오기 시작하는 적들을 휩쓸려다가 멈칫했다.

‘이런. 사부가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 했지.’

정광은 그도 모르게 땅바닥에 장력을 펼쳤다.

쿠웅!

폭음과 함께 큰 구덩이가 패였다.

“잘 자 유모.”

그곳에 유모를 넣고 소맷자락을 휘둘러 흙을 덮었다.

할 일을 다 한 정광이 이빨을 드러냈다.

“일단 온 김에 다 죽여주마.”

검에서 세상을 집어삼킬 정도로 짙은 어둠이 치솟았다.

정광이 땅을 박차고 몸을 날리려는 그때!

적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능글맞게 웃고 있는 미중년이었다.

정광의 얼굴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미친.”

그래도 그리웠던 이들을 생생한 모습으로 보게 되어 좋았건만, 순식간에 기분을 잡쳤다.

아비까지 나오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만행이란 말인가!

‘돼지 이놈이 선을 아예 넘네.’

여기서 투덕거릴 때가 아니었다.

현실로 돌아가 돼지의 목부터 따야 했다.

무엇보다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는 아비가 꼴 보기 싫었다.

‘상대도 안 되면서 덤비기는.’

그렇다고 팰 수도 없는 일.

정광은 내공은 물론 마기와 살기까지 끌어 올렸다.

어둠을 뿜어내던 검이 검은 불꽃을 토해냈다.

정광은 거기에 의념을 실었다.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는, 이 거짓된 세상까지 베어 버릴 수 있는 의지였다.

“하앗!”

어둠이 하늘로 올라 검은 불줄기를 쏟아냈다.

그것은 정광이 휘두르는 대로 세상을 갈라 버렸다.

콰지직!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현생의 정광이 있던 곳이었다.

* * *

사술을 깨고 돌아온 정광은 기지개를 켰다.

“아으. 뻐근해.”

동시에 네 명의 노인이 피를 토하며 드러누웠다.

사술이 깨지며 심대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커헉!”

“쿨럭. 쿨럭.”

잠시 경련하던 노인들이 축 늘어졌다.

정광은 노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상소운을 쏘아봤다.

“돼지! 너 때문에 노인들이 죽었잖아!”

“…….”

정광의 말대로 사술이 깨지는 것을 눈치챈 상소운이 술법을 풀고 뒤로 물러나서였다.

노인들은 사술이 깨진 여파를 넷이서 감당해야 했고, 결국 죽어버린 것이다.

정광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상소운은 병기를 꺼내 들었다.

긴 도신(刀身)에 아홉 개의 고리가 칼등에 달린 구환도(九環刀)였다.

기이한 예기가 느껴지는 게 결코 범상한 도가 아니었다.

그것을 본 정광이 손뼉을 쳤다.

“아. 철혈장에서 장만한 병기가 그거였구나. 제법 쓸 만해 보이네.”

“……!”

눈을 크게 떴던 상소운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알겠군.”

“뭘?”

“천마신교의 마수가 중원에 이미 뿌리를 내렸다는 걸 말하는 것이오.”

정광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뭐 이런 미친놈이. 어쩌다 그런 결론이 나온 거야?’

그의 표정을 오해한 상소운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좌우광명사자(左右光明使者) 중 한자리에 앉아 계시오?”

상소운은 말을 뱉어놓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좌우광명사자는 천마신교의 공식 서열 중 이위와 삼위를 차지하는 직책!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마인을 뜻하는 것이었기에!

정광의 눈이 더 커졌다.

그만큼 경악해서였다.

‘이 돼지 새끼가! 내가 겨우 그런 놈들 정도로밖에 안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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