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옷
역천경은 귀물 중의 귀물이었다.
때문에 아무에게나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을 감당할 만한, 아니면 먹어치울 만한 가치가 있는 이에게만 들어갈 뿐이었다.
그래서 정광을 처음 만났을 때 무척 기뻐했다.
집어삼킬 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광은 역천경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였다.
오히려 먹혀 버렸다.
이제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런데 정광이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사기를 막으란다.
사마련이라 했던가?
뭐 그런 족보 없는 사파가 있지?
이깟 어설픈 사기쯤이야.
화풀이나 해버려야지.
비록 정광에게 구박받는 처지였으나 역천경은 자신이 있었다.
기세 좋게 상소운의 사기를 덮쳤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쉽게 제압할 수 없었다.
아니, 간간이 역습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제야 역천경은 깨달았다.
동남동녀의 피를 먹어가며 힘을 키우진 못할망정, 지하에서 먼지에 싸인 채 갇혀 있었던 탓에 요기가 줄어버렸구나.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마음을 안 것일까?
상소운의 사기가 기세등등하게 덤벼왔다.
황당함도 잠시, 오기가 치솟았다.
이놈이 감히!
날 우습게 봐?
아예 박살을 내주마!
즉시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상소운의 사기에 반쯤 잠식되어 있던 팽강웅이 신음했다.
“으으…….”
그의 머릿속이 전장으로 변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모았던 힘을 터뜨리려는 그때!
정광의 의지가 전해져 왔다.
-야! 뭐 하는 거야! 당장 멈춰!
-……!
잡으라 해서 잡는데 왜?
역천경이 억울해하는데 정광의 의지가 이어졌다.
-사기 잡으라 했더니 왜 사람을 잡으려 해? 팽강웅 걔 머리 이상해지면 안 돼. 앞으로 팽가에서 받아낼 게 많단 말이야.
-…….
욕심 많은 녀석 같으니.
무슨 놈의 요구 사항이 이리도 많은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억눌러졌던 분노가 폭발하려는데, 정광이 선수를 쳤다.
-느껴지는 기운이 영 그렇네. 혹시 방금 짜증 낸 거야?
-…….
그럴 리가 있나.
역천경은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그리고 사기를 상대하는 방법을 바꿨다.
강(强)이 아닌 쾌(快)로!
맛이 어떠냐!
하지만 역천경의 진정한 힘은 강대한 요기 아니던가.
이것을 봉인하고 기예로 상대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상소운의 사기가 짓쳐 들어왔다.
마치 이 정도쯤이야 맞아도 안 아프다는 듯!
어? 이게 아닌데.
역천경이 나지도 않는 식은땀을 훔치는 그때!
정광의 의지가 들려왔다.
-하여간에 쓸모가 없어요. 무슨 놈의 조요경(照妖鏡)이 이렇게 약해?
-…….
가슴에 비수가 꽂힌 것만 같았다.
역천경에게 가슴 따위는 없었지만 말이다.
약해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매몰차게 말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비켜. 내가 들어가마.
-……웅.
역천경은 서러운 마음을 애써 삼키며 길을 열었다.
정광의 의념이 그 길을 달려 팽강웅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머리의 주인인 팽강웅은 황태손이 따라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멍한 눈빛을 흘리며.
“공자, 왜 그러시오?”
당연히 황태손은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 *
정광은 상소운의 사기와 부딪혔다.
그놈은 오직 하나만 집요하게 노렸다.
팽강웅이 무명심법(無名心法)을 익히며 키워왔던 사기(邪氣)였다.
그것을 삼켜서 팽강웅을 조종하려 하는 것이다.
‘제법 하는데.’
정광은 방어에 약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성격에 안 맞았다.
‘좋아. 제대로 해보자.’
바로 집중해서 의념을 움직였다.
역천경을 두들겨 팰 때처럼.
의념으로 뭉쳐진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빠악! 뻐억! 꽈앙!
한 대, 한 대에 살기를 실었다.
정광의 몽둥이가 상소운의 사기를 쉴 새 없이 두들겨 팼다.
팽강웅의 정신에 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절묘하게.
‘어라?’
그런데 별 효과가 없었다.
힘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상소운의 사기가 실타래처럼 나풀거리며 충격을 흘렸기 때문이다.
‘모양만 그런 줄 알았더니 성질도 그렇네.’
그렇다면 방법을 바꿀 수밖에.
정광의 의지가 변화했다.
변화한 의지는 새로운 의념으로 발현됐다.
몽둥이가 날카롭게 갈리더니 도(刀)로 바뀌었다.
‘베는 건 역시 도가 최고지.’
도라면 역시 패력(覇力)과 연환(連環)이다.
적당한 도법이 떠올랐다.
팽강휘를 통해 견식했던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였다.
정광의 의념으로 만들어진 도가 폭풍처럼 날뛰었다.
도법 이름처럼 넋을 빼앗진 못했지만, 상소운의 사기를 갈라 버리기엔 충분했다.
끄아아아아아-
놈이 도망치려 했지만 정광은 놔주지 않았다.
계속 베었다.
아주 가루가 되어버릴 때까지.
얼마 안 가 상소운의 사기는 전부 사라지게 되었다.
예상보다 빠른 도주였다.
‘벌써 가? 좀 이따 보자.’
이는 역천경이 상소운의 사기에 상당한 타격을 준 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천경이 자신의 공을 알아달라며 진동했지만 정광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너는 이 쉬운 걸 못하냐.
-…….
정광은 팽강웅이 키워온 사기를 소멸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팽강웅의 머릿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황태손이 따라준 술을 한 잔 마신 뒤 멍하니 서 있던 팽강웅이 쓰러졌다.
정신을 잠식했던 상소운의 사기는 물론, 자신도 모르게 키워왔던 사기가 사라지며 기절해 버린 것이다.
정광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를 부축했다.
살펴보니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대충 됐네.’
오래전 일들을 떠올리자 자그마한 즐거움이 몰려왔다.
전생의 그는 사기를 상대할 때마다 호쾌한 방법을 썼었다.
살이든 뼈든 알 바 없었다. 혼조차 모두 가르고 부숴 버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피 한 방울 안 보고 해결해 보니 나름의 재미가 있지 않은가.
미미하게 미소를 짓는데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음?’
황태손과 주변 사람들이 그와 팽강웅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 팽강웅을 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 이놈이 꽤 오래 멍하니 서 있다 쓰러졌지.’
황태손이 있는 자리였기에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경계하는 자들도 있었다.
부지휘사는 아예 칼자루에 손을 얹고 내공을 일으키고 있었다.
‘힘들게 해결했는데 마무리가 어설프면 안 되지.’
의심을 씻어내야 했다.
정광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런. 완전히 뻗으셨네. 대공자께선 술이 약하시구나.”
사람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술이 약해?’
‘호한 중의 호한들이 모였다는 팽가의 자제가?’
‘항아리째로 마신 것도 아니고, 단 한 잔에 정신을 잃었다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술에 취해서 그랬다니!
천하의 누가 납득하겠는가!
정광이 생각해도 그랬다.
‘내가 말하니까 설득력이 좀 부족하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되지 뭐.
마령제혼술(魔靈制魂術)을 쓰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지만, 팽강웅이 이지를 상실하게 된다.
마침 정광에겐 이 상황에 맞는 기예가 있었다.
‘오랜만인데 제대로 되려나.’
팽강웅의 몸속으로 내공을 불어넣어 안면근육을 움직였다.
정확히 말하면 팽강웅의 입술을 움직임과 동시에 복화술을 펼쳤다.
“아. 취한다.”
“…….”
정광은 내심 만족했다.
팽강웅의 목소리를 제대로 흉내 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황당해했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지 않은가.
“쯧쯧. 눈 좀 붙이세요.”
팽강웅을 대충 의자에 구겨놓은 뒤 시선을 돌렸다.
거지로 역용한 상소운이 있던 자리였다.
‘오. 뚱뚱한 놈이 제법 빠르네.’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럼 가볼까.’
즉시 신형을 낮추고 땅을 박차려고 하는데, 황태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혁련 공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오?”
정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황태손의 의혹에 물든 눈동자가 보였다.
‘눈치 한번 빠르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쯤은 돼야 황궁이라는 복마전에서 살아남고, 황태손이라는 지고한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을 것 아닌가.
정광은 간단히 대답했다.
“별일 아닌데요.”
“……그건 그렇다 칩시다. 어디를 가려는 것이오?”
“산책요.”
“……산책?”
“네. 너무 많이 먹었거든요. 배 좀 꺼뜨려야죠.”
황태손이 뭔가 또 물으려는데 정광이 씩 웃었다.
“일단 다녀올게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정광의 모습이 사라졌다.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황태손이 눈을 빛냈다.
그의 입이 미세하게 열렸다.
“궁금하군. 좀 알아야겠어.”
그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 * *
정광은 경공술을 펼쳐서 달렸다.
걸음마다 세상이 놀라운 속도로 뒤로 밀려났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면밀히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놈 봐라. 제법 머리를 쓰네.’
상소운의 흔적이 난잡하게 널려 있었다.
혹시 모를 추적을 대비해 이러는 것이리라.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사기를 감췄다고 기운까지 지워지는 줄 아나.’
사람은 저마다 다른 기운을 가지고 있다.
정광은 팽가에서 상소운의 기운을 느끼고 기억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쫓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달리던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긴가.’
한산한 곳에 위치한 큰 장원이었다.
잡스러운 사기가 가득한 게, 사마련 놈들이 모여 있는 게 분명했다.
‘간만에 몸 좀 풀겠네.’
정광은 맘껏 날뛸 생각이었다.
전생에 했었던 것처럼.
‘아. 흔적을 남기면 안 되지.’
곤륜의 무공이 아닌 다른 무공을 써야 했다.
마침 그는 적당히 쓸 만한 무공을 아주 많이 알고 있었으니.
바로 마공(魔功)이었다!
“휘이이이익!”
정광은 긴 휘파람을 불었다.
마기(魔氣)에 휩싸인 그의 몸이 장원의 대문을 뚫고 들어갔다.
콰앙!
박살 난 나뭇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틈을 뚫고 수많은 병장기가 정광의 몸으로 짓쳐들어 왔다.
정광의 양손이 움직였다.
참살마수(斬殺魔手)!
그를 노리던 병장기들이 수수깡처럼 잘려 나갔다.
동시에 병장기들의 주인들 또한 종잇장처럼 찢겨졌다.
“커헉!”
“끄아악!”
십여 명의 무인들이 피분수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정광은 오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숨어 있던 또 다른 무인들이 포위를 좁혀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네놈은 누구…… 크윽!”
그는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목에 작은 구멍이 생겨서였다.
그곳에서 붉은 피가 거칠게 쏟아져 나왔다.
“끄륵…… 크륵…….”
중년인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의 수하인 듯한 무인들이 경악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무슨 수법을 썼는지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광은 지풍(指風)을 날렸던 손가락을 접으며 투덜거렸다.
“왜 기습을 당하면 하는 말이 다 똑같을까. 누군지 알아서 뭐 하려고.”
쓸데없는 짓이다.
일단 잡고 나서 물어보면 되지 않는가.
정광은 그랬다.
그래서 눈앞의 놈들부터 잡고 상소운을 찾기로 했다.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콰직!
“아악!”
동시에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무인의 가슴속에서 두려움이 치솟았다.
그 기색을 눈치챈 한 무인이 내공을 실어 외쳤다.
“물러나지 마! 죽여라!”
말을 뱉자마자 그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정광의 주먹에 맞아서.
그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무인들도 피를 흩뿌리며 죽어갔다.
살육을 자행한 정광이 중얼거렸다.
“몸이 좀 풀렸네.”
“……!”
“본격적으로 가볼까.”
“……!”
무인들은 두려움을 억눌렀다.
사마련에서 팽가를 몰락시킨 뒤 하북무림을 차지하기 위해 엄선한 고수들다웠다,
그들은 정광이 공격하기 전에 덤벼들었다.
갖가지 종류의 병기들을 휘두르며.
정광은 그사이를 누볐다.
천마신교의 비전 보법, 암왕산보(暗王散步)!
칠흑 같은 마기를 흘리며 여유롭게 공간을 헤집었다.
동시에 그의 사지가 소름 끼칠 만큼 화려하게 움직였다.
아수라파천무(阿修羅破天舞)!
천마신교의 비전 체술이 펼쳐진 것이다!
정광은 사마련 무인들의 목숨을 꺼뜨리며 딴생각을 했다.
전생에 대한 후회였다.
‘무공 이름을 다 바꿔 버릴걸.’
천마신교의 마공들은 막대한 위력에 어울리지 않는 조잡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
웬만하면 참겠는데,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 아닌가.
이름은 물론 무공도 멋진 곤륜에서 환생해 어찌나 다행인지.
정광은 안 좋은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더 열심히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장내에 서 있는 존재는 그 혼자였다.
‘흐음. 겨우 익숙해졌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옷을 꺼내 입었기에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서 몸에 맞추니 거칠 것이 없었다.
정광은 장원 중앙에 있는 높은 전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래도 안 나오시겠다?”
그의 발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내가 가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