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한번 해보자, 돼지
정광이 찾는 건 사마련주의 제자, 악상(惡象) 상소운이었다.
그의 수하였던 자오의 말에 따르면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 하북성에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올랐던 게 하북팽가였다.
팽가주가 무림맹주로 추대되었으니, 무림맹의 기세를 꺾으려면 팽가에 타격을 주는 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팽가에 도착한 정광은 큰 잔치를 연다는 말을 듣고 눈치채게 되었다.
‘팽가를 축하하러 올 각계의 유력자들을 해치려는 건가.’
물론 팽가의 짓으로 꾸밀 것이다.
그래야 팽가의 힘이 약해지고 무림맹 또한 타격을 받을 테니.
처음에는 팽강웅이 사마련과 손을 잡은 줄 알았다.
그에게서 풍겼던 사기 때문이었다.
무림인에게 무공은 생명보다 소중한 것, 더 나은 무공을 갖기 위해선 가문을 배반하는 일 정도는 비일비재했기에.
게다가 권력.
정광이 본 팽강웅은 아우인 팽강휘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했다.
지금이야 앞서고 있지만 얼마 안 가 뒤처질 게 뻔히 보였다.
팽강웅도 그것을 느꼈을 터.
권력욕이 강한 그로선 가주의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좀 무리가 있는 가설이긴 했지.’
팽강웅의 성품은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아무리 무공과 권력에 목말라 있다 하더라도 가문을 망치는 패륜을 저지를 정도의 망종은 아니었다.
정광은 팽강웅이 사공을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확신하게 되었다.
‘팽강웅은 장기판의 말이었군.’
상소운이 그를 움직일 것이다.
그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뭐 여기까지였으면 대충 처리하면 되는데.’
황태손이 예고도 없이 팽가에 와버렸다.
이곳에 모인 모든 손님들을 다 합쳐도 그의 가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리라.
‘팽강웅이 황태손을 치면…….’
황제와 황태자가 가만히 있을 리 있나.
팽가는 멸문(滅門)을 당할 것이다.
당연히 무림맹도 성치는 못할 것이고.
‘사마련으로선 이만한 기회가 없지.’
물론 이 미친 짓을 실행할 만큼 미쳤을 때의 일이다.
발각당하면 사마련이 날아가 버릴 테니까.
안타깝게도 상소운은 충분히 미친놈이었다.
‘뭐 나였어도 이 수를 썼을 거고.’
성공만 한다면 이만큼 좋은 수가 없지 않은가.
실패하면 혼자 튀면 된다.
‘근데 어디 있는 거야?’
정광은 기감을 퍼뜨려 주변의 기운을 살폈다.
철혈장에서 만났던 악상(惡象) 상소운의 사기(邪氣)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워낙 사람이 많았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운을 느끼며 구분하던 정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없어?’
아예 눈을 감고 기감을 키웠다.
아주 미세한 기운이라도 느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것 봐라?’
그래도 상소운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 왔을 리가 없는데.’
자오는 상소운이 사악한 사술(邪術)에 능해서 그런지 의심이 많고 간교하다 했었다.
정광이 봤던 바로도 그랬다.
상소운에게서 느껴졌던 독특한 사기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런 이들은 결코 수하들을 믿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일을 주도하며 확인해야 안심하기에 직접 나서는 것이다.
‘강호에서 고수라 불릴 만한 이들이 많이 왔으니 수하들은 당연히 데려오지 않았을 테고.’
정광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괜히 들켰다간 시작도 못 한 채 물러나야 할 테니.
정파에 세작으로 보내기 위해 정공을 익히게 한 수하들을 데려왔을 수도 있지만, 그런 놈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머리를 잡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머리가 기감에 잡히질 않아서 문제였다.
‘돼지가 기운을 감췄다는 건데.’
천변만화역용축골마공의 마기를 알아챌 만큼 감각이 유난히 날카로운 상소운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사기를 감출 수 있는 건 아니다.
‘뭔가 기물(奇物)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선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정광은 혹시 몰라 역천경에게 물었다.
-못 찾았어?
-……웅.
단단히 주의를 줬었으니 거짓말일 리는 없었다.
‘이 녀석의 눈을 가릴 정도의 귀물이라…….’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뺏어야지.’
꽤 괜찮은 수고료 아닌가.
팽가에 와서 상당한 이득을 본 상황이었는데 그런 것까지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천상 돼지가 사술을 부릴 때까지 기다려야겠군.’
아무리 기물이 있다 해도 사술을 쓰는 순간만큼은 사기가 일어날 터.
그때 잡으면 된다.
정광은 황태손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본 백승무가 기겁하여 전음을 보냈다.
-사형! 또 뭘 하려고 그러십니까?
-별것 아니야.
-전혀요! 아주 큰 것으로 보입니다!
정광이 감탄했다.
-사제. 눈치가 제법 늘었네. 데리고 다닌 보람이 있어.
-하아아. 제발 살려주십시오. 대체 무슨 일인지 말씀 좀 해주세요.
정광은 아예 자오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자오도 잘 들어요. 돼지가 황태손을 습격할지도 모릅니다.
-……!
정광은 두 사람이 경악성을 터뜨리기 전에 전음을 이었다.
-걱정은 접어요. 막을 테니까.
백승무와 자오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광이 어떻게 막으려 하는지 물어보지 않기로 합의를 한 것이다.
‘보나 마나 말도 안 되는 방법일 터. 알아봐야 좋을 게 없어.’
‘지금만큼은 침묵하는 게 더 좋다.’
정광은 그들의 생각을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그가 심술을 부리려는가 싶어 기겁한 자오가 다급히 물었다.
-저, 저희는 뭘 하면 됩니까?
-일이 터지면 수빈이를 지키세요.
백승무와 자오의 눈이 커졌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장내가 혼란에 휩싸일 게 분명해.’
‘그러니 어린 팽 소저를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다른 이도 아닌 정광이 이런 당연한 지시를 하다니.
백승무가 침을 꿀꺽 삼키고 전음을 보냈다.
-사형. 부디 보중하십시오.
-보중은 무슨. 나 몰라?
정광이 싱긋 웃자 백승무도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젠장.’
그래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정광이라 해도 황태손과 관계된 일에 뛰어들고도 무사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구나.’
만약 황태손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무림은 물론 천하를 뒤흔들 만큼.
백승무는 자신의 낮은 경지를 탓했다.
이럴 때 한 손 거들어야 하거늘, 이게 무슨 꼴인가.
‘수련에 더 몰두해야 해.’
그가 이런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정광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곧 터지려나.’
황태손의 말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다들 잔치를 즐기셔야 하는데 말이 너무 길었소이다. 이만 물러날 테니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와아아아아!”
황태손은 사람들에게 포권을 한 뒤 몸을 돌렸다.
팽강웅이 그를 계단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저하.”
“고맙소이다, 대공자.”
황태손이 팽강웅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그의 한 걸음 뒤에서 따르던 부지휘사가 나섰다.
“대공자. 소장이 모실 테니 먼저 내려가시는 게 어떻겠소. 결례인 건 알지만 맡은 임무가 있어 그러니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어림군(御林軍)은 황실의 주요 인사를 근접 호위하는 조직이었기에 그 위세가 대단했다.
하물며 이인자인 부지휘사(副指揮使)는 어떻겠는가.
그런 대단한 자리에 있는 이가 예를 갖춰 청하자 팽강웅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아니,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면을 세워줬기에 기꺼울 정도였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시지요.”
팽강웅이 포권하며 몇 걸음 물러섰다.
황태손과 부지휘사는 계단을 내려가 정광이 있는 탁자로 갔다.
자리에 앉은 황태손은 정광의 시선을 느끼고 마주 봤다.
“왜 그러시오?”
“그냥요.”
정광은 대충 대답하며 시선을 팽강웅에게 돌렸다.
‘부지휘사가 끼어들어서 기회를 놓친 건가.’
사실 강행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암살에 실패하면 어떤가.
황태손을 공격했다는 것만으로도 팽가는 피에 잠길 텐데.
정광은 상소운의 뒤룩뒤룩한 얼굴을 떠올렸다.
‘조심성이 많은 놈이네. 욕심이 너무 많거나.’
더욱 완벽한 기회를 노려서 최고의 효과를 거두길 원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언제 일을 벌일지는 뻔했다.
‘팽강웅이 여기에 올 때겠지.’
아닌 게 아니라 팽강웅은 벌써 술병과 술잔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주인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는데 황태손이 제일 큰 손님이었기에 먼저 오는 것이었다.
정광은 부지휘사와 황실수호암응 삼호에게 전음을 보내려다 말았다.
팽강웅을 주의하라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지 않은가.
‘당장 칼을 빼 들고 난리를 치겠지.’
정광은 시선을 돌려 팽만소를 봤다.
마침 그도 정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광은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조용히 끝낼게요
“…….”
-나 참. 눈빛하고는. 좀 믿어봐요. 팽가가 잘못되면 수빈이도 잘못돼요. 내가 설마 그러겠어요?
“…….”
-게다가 앞으로 수업료도 계속 받아야 하는데.
팽만소는 그제야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정광은 피식 웃은 뒤 술을 한 잔 마셨다.
이곳에 오자마자 요리와 술에 독이 없다는 걸 확인했었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흐음. 꽤 괜찮단 말이야. 나중에 몇 병 챙겨달라 해야지.’
쓸데없는 생각이 끝났을 때 팽강웅이 탁자 앞에 섰다.
그는 황태손에게 예를 표한 뒤 술병을 내밀었다.
“저하. 소인이 한 잔 올리겠습니다.”
“하하. 고맙소이다.”
팽강웅은 황태손의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주인과 객으로서 당연한 일이었기에 이것만큼은 부지휘사도 막을 수 없었다.
순간, 정광의 품속에 있던 역천경이 진동했다.
-우우우우우웅!
-미리 찍어서 보여 달랬더니 빨리도 말한다!
정광도 역천경과 동시에 사기를 느꼈다.
철혈장에서 느꼈던 상소운의 사기였다.
재빨리 고개를 꺾자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였다.
얼굴에 땟국물이 가득한 거지였다.
‘하. 머리를 잘 썼네.’
축골공이야 옷으로 가릴 수 있어도 역용술만큼은 정광의 눈을 속일 수 없다.
하지만 저렇게 얼굴에 땟국물이 가득하면 정광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방립을 쓴 중들이나 면사를 쓴 귀부인들 중 하나일까 했는데 거지일 줄이야.’
잡생각은 여기까지였다.
정광은 모든 기감을 끌어 올려 상소운과 팽강웅을 잇는 선에 모았다.
이질적인 기운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정광도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제대로 안 보이네. 검으로 확 베어버려?’
기각.
내공을 담은 검을 휘둘렀다간 일이 커진다.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리라.
무엇보다 왜 난데없이 검무를 추느냐고, 미쳤느냐고 물으면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팽가 챙겨주기도 힘들군.’
그만큼 또 받아내면 될 터.
정광은 순간적으로 최적의 방법을 택했다.
-인마! 일할 시간이다! 비춰!
역천경은 기겁했다.
이 악귀 같은 놈은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반사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웅!
정광이 역천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상소운 쪽으로 내밀자 반사되는 앞면에서 눈부신 빛이 쏘아졌다.
오직 정광에게만 보이는 그 빛은 상소운이 펼쳐낸 사술의 형상을 비췄다.
‘모양하고는.’
끈적끈적한 사기로 이뤄진 실타래였다.
그것이 팽강웅의 머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한번 해보자, 돼지.’
순수한 마(魔) 앞에서 사(邪) 따위는 사그라지기 마련.
정광은 전생의 습관대로 마기를 일으켜서 잡아먹으려다 멈칫했다.
‘잠깐. 아무리 은밀하게 한다 해도 안 될 것 같은데.’
부지휘사와 황실수호암응 삼호는 고수였다.
그들이 마기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 복잡해.’
상소운의 사기가 팽강웅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광은 쉽게 가기로 했다.
-막아.
-웅!
역천경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그저 정광이 시키는 대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즉시 요기를 뻗어 팽강웅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팽강웅이 황태손이 따라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직후였다.
역천경의 요기는 정광이 그랬듯이 직접 당하고 있는 자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주변의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으나 상소운의 사기는 바로 알아챘다.
자신을 잡아먹으려 하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팽강웅의 머릿속에서 격전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