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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98화 (98/569)

98화

흠뻑 먹게 해줄게

그림자의 흔들림은 곧 멈췄다.

정광은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이런 존재는 처음 봐서였다.

-기운이 이상해서 찔러봤는데 맞네. 그거 떼어낼 때 안 아팠어요?

-……!

-휴우우. 그래도 그쪽이 낫죠. 있는데도 못 쓰는 게 도사인데. 사제는 도사가 아닌데도 그 모양이고.

-…….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정광이 전음을 이었다.

-어쨌든 호칭은 정해야죠. 뭐라 부르면 돼요?

잠시 뒤, 정광의 귀에 가늘고 뒤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실수호암응(皇室守護暗鷹) 삼호.

-오오. 거창하네요.

황실을 지키는 어둠 속의 매란다.

그것도 셋째.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너무 길다. 급박한 순간에 그 긴 이름을 언제 불러요.

다 부르기도 전에 황태손이 칼침 맞고 죽을 수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정광은 그럴듯한 호칭을 생각해 냈다.

-이렇게 하죠. 응삼(鷹三) 어때요? 매 셋째.

-……!

-입에 착 달라붙네. 그쪽도 좋죠?

-…….

할 말을 다한 정광이 빙긋 웃었다.

-얘기 끝났으니까 그만 가시죠. 아. 그리고 하나 더.

-…….

정광의 시선이 차갑게 빛났다.

-내 그림자 속에 또 들어오시면 가만 안 둘 겁니다.

* * *

어두운 새벽.

팽강웅은 지친 얼굴로 자신의 방에 돌아왔다.

그대로 침상에 눕자 쌓여 있던 피곤함이 몰려왔다.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군.’

이제껏 없었던 큰 잔치였다.

그 준비를 진두지휘하다 보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래도 제대로 해내서 다행이야.’

준비는 완벽했다.

날이 밝아지고 잔치가 시작되면 팽가의 명성도 더 커지게 되리라.

‘게다가 황태손까지 찾아와 주다니.’

조부의 공을 알게 되어 뿌듯해진 건 둘째였다.

황태손이 잔치에 참여함으로써 팽가의 위상은 더 높아질 것이다.

‘찾아온 손님들은 무림인뿐만이 아니지.’

관부, 군부, 상계의 인물들은 물론 근처 지역의 토호들까지 있었기에 그 효과가 더 클 게 분명했다.

손님들의 면면을 떠올리던 팽강웅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많긴 하군.’

일일이 인사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우인 팽강휘의 처소에 머물고 있는 이들처럼.

‘거참. 강휘의 친우들이라는 데도 신경 쓸 시간이 없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팽강휘도 괜찮다 했으니 잔치가 파한 뒤에 챙겨주면 될 것이다.

자신이 팽가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세상에 알린 후에.

팽강웅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팽가 비전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을 운기하자 몸과 마음의 피로가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소주천에 이어 대주천에 접어든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역시 너무 느려.’

운기를 멈추고 내공을 일으켜 주변의 기척을 감지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원벽력신공이 아닌 다른 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과거 마음이 흔들렸을 때 우연히 얻었던 무명심법(無名心法)이었다.

얼마 안 가 그의 미간에 미약한 사기(邪氣)가 맺혔다.

그것은 점차 크기를 키워가 그의 정신을 잠식했다.

그러자 집중력이 올라갔다.

그는 홀린 듯한 얼굴로 다시 혼원벽력신공을 운기했다.

진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얼마 안 가 그는 세 번의 대주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후우우…….”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사이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미간에 맺혀 있던 사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원래의 팽강웅으로 돌아와 있었다.

‘……피곤이 다 풀렸군.’

좋은 일이었으나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명심법은 정상적인 심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었다.

‘이미 늦었어.’

팽강웅은 치밀어 오르는 후회를 애써 억눌렀다.

정체되어 있던 경지를 이것 덕분에 끌어올릴 수 있었는데 후회는 무슨 후회인가.

‘무명심법이 없었다면 진작 밀렸을 거다.’

사오 년 전, 곤륜에서 돌아온 아우 팽강휘는 비약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무공은 물론 성품까지 그랬기에 아버지의 눈빛이 달라질 정도였다.

팽강웅은 매일 잠을 설쳤다.

한참 아래로 내려다봤던 아우가 언제 그를 제칠지 두려웠다.

그때 우연히 얻게 된 것이 무명심법이었다.

어딘가 찜찜하긴 했지만 그 효능은 대단했고, 덕분에 그는 아버지의 신뢰를 다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우에 대한 시기심을 지우고 형제답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떳떳하다.’

가슴 한편에 남아 있던 죄책감을 으스러뜨렸다.

‘나는 지지 않아.’

죄책감이 머물었던 자리를 호승심이 가득 채웠다.

‘나는 최고다. 최고가 될 것이다.’

그의 눈이 뜨겁게 빛났다.

* * *

잠마대법(潛魔大法)으로 방 천장에 맺혀 있던 정광이 혀를 찼다.

며칠이나 허탕을 치다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멍청한 놈. 백해무익한 사공을 익혔네.’

딱 봐도 정신을 홀리는 사공이다.

집중력이야 높일 수 있겠지만 부작용은 더 클 게 뻔했다.

‘자기 자신을 홀릴 수 있다면 남이 홀릴 수도 있다는 걸 왜 몰라?’

보나 마나 사마련의 돼지가 흘린 심법일 것이다.

저 멍청한 녀석이 그걸 덥석 물었을 것이고.

돼지가 어떤 일을 꾸미는지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그냥 죽여 버릴까?’

지금 팽강웅을 해치우면 돼지의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다.

‘잠깐. 그러면 손맛을 못 보잖아.’

눈치 빠른 돼지는 바로 도망갈 터.

이곳까지 온 보람이 없어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팽강웅은 제자인 팽수빈의 오라비였다.

‘역시 좀 그렇네.’

제자의 조부는 물론이요, 모친에게까지 두둑이 받아낸 상황이었다.

전생의 정광이었다면 그딴 거 무슨 상관이냐 했겠지만, 현생의 그는 달랐다.

‘무량수불. 순리대로 가야지.’

받은 만큼의 값은 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조금만 더 참자.’

정광은 잠마대법을 운공해서 천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로 칠야마영(漆夜魔影)을 펼쳤다.

어둠 속에 녹아든 그는 얼마 안 가 그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금만 마시고 잘까.’

꿍쳐뒀던 술병을 꺼냈다.

몇 잔 마시다 보니 안주가 땡겼다.

‘돼지고기가 먹고 싶네.’

안 그래도 얼마 후면 돼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놈을 어떻게 요리할지 상상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빨리 찾아내는 게 중요해.’

정광은 품속에서 역천경을 꺼냈다.

그것을 빤히 쳐다보던 그는 부드럽게 불렀다.

-야.

-…….

-자냐? 깨워줄까?

-우웅! 우웅!

-너 아까 팽강웅 봤지? 어설픈 사기를 품고 있던 놈.

-웅.

-이따가 잔치에서 비슷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놈 보면 바로 말해.

-…….

-어? 싫어?

다급히 웅웅거리려던 역천경은 가까스로 참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끌려갈 수는 없지 않은가.

서로 주고받는 게 세상의 이치.

매가 무서워 계속 퍼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정광은 똑똑한 인간이었다.

-오호라. 너도 뭔가 받아야겠다?

-……웅.

-뭘 원하는데?

-……!

역천경은 속으로 환호했다.

이 악귀보다 더 음험한 놈이 드디어 세상 이치를 깨닫지 않았는가!

재빨리 원하는 것을 말하려 하는데…….

안타깝게도 역천경은 말을 할 줄 몰랐다.

-말해봐, 어서.

-…….

-뭐든 들어줄게. 응?

-…….

역천경은 울고 싶었다.

하지만 동경(銅鏡) 주제에 눈물은 무슨.

녹이나 안 슬면 다행인 처지 아닌가.

한동안 역천경을 놀리던 정광이 빙그레 웃었다.

-너도 조요경(照妖鏡)이니 뻔하지. 동남동녀(童男童女)의 피를 원하냐?

-웅! 웅! 웅! 웅!

역천경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

이 인간, 정말 유식하지 않은가!

좋아하던 것도 잠시, 곧 무식하게 두들겨 맞았다.

-인마! 내가! 그걸! 주겠냐?

정광의 주먹이 꽂힐 때마다 맑은 소리가 울렸다.

깡! 까앙! 까앙! 꽈앙!

역천경은 미친 듯이 울었고.

-끄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앙!

-시끄러, 인마!

정광은 흐느끼는 역천경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제대로 좀 하자. 응?

-……웅.

-아예 사기를 품고 있는 놈이 누군지 찍어서 보여줘. 무슨 뜻인지 알지?

-……웅.

정광은 역천경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선심을 썼다.

-좋아. 일 끝나면 피를 주마.

-……!

-어라? 그렇게 좋냐?

-웅! 웅!

-돼지 피인데?

-…….

정광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신 흠뻑 먹게 해줄게. 아주 흠뻑.

* * *

날이 밝자 잔치가 시작됐다.

보통 잔치가 아닌 엄청나게 큰 잔치였다.

“허어. 대단하군.”

“그러게 말이오. 허허.”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수많은 탁자 위에 산해진미들이 깔려 있었다.

악공(樂工)들의 연주를 바탕으로 아리따운 무녀(舞女)들이 춤을 추었다.

놀이패들이 재주를 넘고 흥미진진한 경극(京劇)까지 펼쳐지고 있었다.

무림, 관부, 군부, 상계 등에서 힘깨나 쓰는 손님들이 감탄할 정도로 멋진 잔치였다.

“자. 자. 어서 앉읍시다.”

“하하. 좋소이다.”

요리는 물론이요, 술 또한 일품이었다.

사람들은 흥겨운 마음으로 잔치를 즐겼다.

정광과 황태손 일행은 조금 달랐지만.

“아. 정신 사나워.”

정광의 감상이었다.

“무척 소박하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군.”

황태손의 감상이었다.

“우걱. 우걱.”

아침 수련 때문에 잔뜩 허기가 진 백승무와 자오는 먹고 마시느라 바빴다.

“냠냠.”

팽수빈도 마찬가지였다.

“…….”

팽만소는 황태손과 대화를 나누며 깊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

부지휘사는 황태손의 한 걸음 뒤에 시립한 채 매서운 눈빛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한편, 사람들을 둘러보던 팽강웅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슬슬 시작해야겠군.’

팽강웅은 단상에 올랐다.

사람들은 먹고 즐기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곧 알게 되었다.

팽강웅이 웅혼한 내력을 담아서 외쳤기 때문이었다.

“여러 영웅들께 팽강웅이 인사드립니다! 본가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팽강웅은 공손하지만 당당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팽가가 왜 잔치를 열었는지, 앞으로 어떤 행보를 이어갈지에 대한 얘기들이었다.

쓸데없는 수식어를 뺀 담백한 말들이었기에 잔치에 참여한 이들은 정신을 집중하여 듣게 되었다.

그리고 팽강웅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환호하며 외쳤다.

“감축하오!”

“하북팽가! 하북팽가!”

팽강웅은 만족한 얼굴로 사방을 향해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림맹에 가 있는 아버지 대신 그를!

‘그래. 팽가는 내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훗날엔 반드시!’

아직까지 소가주 자리에 오르지 못한 팽강웅이었다.

하지만 오늘부턴 사람들의 머릿속에 확실히 자리 잡게 되리라.

팽가의 후계자로서!

‘다음으로 넘어가야겠군.’

사람들의 환호성이 잦아들자 팽강웅은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계십니다. 본가로선 영광일 뿐이지요.”

“와아아아!”

누구를 말하는지 눈치챈 사람들이 열광했다.

팽강웅은 그들의 열광에 보답했다.

“바로 황태손 저하십니다!”

“와아아아아!”

황태손은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단상으로 향했는데,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부지휘사가 따랐다.

황태손은 단상에 올라 팽강웅에게 포권했다.

팽강웅이 답례하자 황태손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반갑소이다. 주진기라 하오.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서 팽가를 축하하러 온 것이니 강호의 예법으로 대해주시오”

사람들은 더 열광했다.

지고한 신분의 그가 이렇게 겸손하게 나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들 흥미진진한 얼굴로 황태손을 바라봤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서였다.

정광도 그들처럼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궁금해하는 건 전혀 다른 것이었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됐는데.’

정광은 내공을 끌어 올려 기감을 확장했다.

‘어디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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