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파격적인 제안
팽만소는 속으로 탄식했다.
‘인연의 끈은 질기고 길구나.’
정광의 말대로 영원히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언제 어떻게 시간이 흘렀을까?
눈앞의 황태손은 십 년 전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훤칠한 장부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사부!”
과거와 같은 호칭으로 그를 부르며.
“사부! 강녕하셨습니까?”
황태손이 계속 사부라 부르자 팽만소는 무릎을 꿇었다.
“저하. 죄인에게 사부라니요. 거두어주십시오.”
황태손이 다급히 달려가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부지휘사에 의해 제지되었다.
“저하. 안 되옵니다.”
“저자 때문에 그렇소?”
황태손이 정광을 노려보자 부지휘사가 전음을 보냈다.
-자극하지 마십시오. 알 수 없는 자이옵니다.
황태손이 어찌할까 망설이는데 팽만소가 나섰다.
“이보게, 혁련 공자. 방에 들어가 주겠나? 오해는 내가 풀겠네.”
“깨끗이요.”
“알겠네. 아주 깨끗이 풀지.”
정광이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팽만소는 방문을 계속 노려보고 있는 부지휘사를 나무랐다.
“정 천호(千戶). 그만하게. 그는 적이 아닐세.”
십 년 전의 직함으로 불린 부지휘사가 팽만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두 손이 모아지며 허리가 숙여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야.”
“그래, 오랜만이군.”
감회 어린 눈빛으로 부지휘사를 보던 팽만소가 황태손에게 청했다.
“저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알겠습니다, 사부.”
계속되는 사부란 말에 나직이 한숨을 내쉰 팽만소는 황태손을 방으로 안내했다.
황태손은 다리를 절룩거리는 팽만소를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부지휘사가 밖에서 문을 닫자 황태손이 바로 입을 열었다.
“왜 연락 한번 없으셨습니까.”
“죄인이 어찌 감히…….”
“죄인이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잠시 침묵하던 팽만소가 무겁게 말했다.
“소인은 저하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키지 못하다니! 내가 살아 있는 건 모두 사부의 덕입니다!”
“…….”
“내 가슴에 난 상처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겨우 그깟 것 때문에?”
“……소인은 저하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허어!”
황태손은 가슴이 아팠다.
십 년 전에 입었던 검상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사부 때문이었다.
‘그리도 마음에 담고 계셨던가.’
과거 초원에서 반평생이 넘도록 몽고군과 싸웠던 팽만소였다.
그는 공을 인정받아 황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어림군의 부지휘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어렸던 황태손을 보위하게 되었다.
어린 눈에 그의 기세며, 무공들이 어찌나 멋져 보였던지.
황태손은 그에게 반해 사부라 부르며 따랐다.
그는 황태손을 아끼며 간단한 권각술을 가르쳤다.
그는 무적의 거인이었다.
그가 아끼던 수하가 황태손을 암살하려고 했을 때까지는 말이다.
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장성한 황태자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말을 꺼냈다.
“……사부. 황실의 법도는 우스운 면이 있습니다.”
“저하! 어찌 그런 말씀을!”
“나를 지켜낸 사부를 내 가슴의 작은 상처 때문에 내치다니, 이 어찌 우습지 않습니까?”
“허나…….”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사부의 수하가 배신을 한 건 사부의 잘못이 아닙니다.”
“…….”
“사부가 날 처음 만났을 때 지켜주겠다고 하셨었지요? 사부는 그 약조를 훌륭히 지키셨습니다. 나를 배신한 게 아니에요.”
“…….”
“황궁의 일은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된다는 법도. 그 때문에 사부의 공을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지요. 평생 품고 있을 것입니다.”
“…….”
팽만소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황태손 역시 그랬으나 억지로 참았다.
그는 훗날 천하의 지존이 될 존재.
남에게 눈물 따위를 보여서는 안 되는 이였기에.
잠시 뒤, 팽만소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저하. 이곳에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황태손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잘못한 게 없다고 그렇게 말했거늘,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였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하시겠지.’
황태손은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바꿨다.
“사부의 가문인 팽가에 경사가 났다 하지 않습니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몰라 달려왔습니다.”
“이렇게 발걸음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하옵니다. 누추한 곳에 오래 계시지 말고 이만 돌아가시지요.”
“허어. 오랜만에 뵈었는데 어찌 벌써 가겠습니까? 잔치가 끝날 때까진 남을 것입니다.”
“허나, 저하.”
“사부. 내 고집을 아시지요? 더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
팽만소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평소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진옥룡이 본가에 온 것은 뭔가 큰 일이 터질 것 같아서다. 이럴 때 저하께서 이곳에 계시면 안 돼.’
하지만 황태손은 고집이 쇠심줄보다 질겼다.
정광과 비견된 정도로.
그 고집을 꺾으려면 당금의 황제나 황태자쯤은 나서야 하리라.
‘그렇다면…….’
팽만소의 시선이 부지휘사에게 향했다.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경지에 올랐을 테지만 그 정도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비밀수신호위(秘密守身護衛)도 따라왔겠지만 그래도 불안하군.’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잔치 전날인 오늘과 당일인 내일.
이틀 동안 믿을 만한 고수를 황태손에게 붙여야 했다.
“저하. 이곳에 머무시겠다면 제 청도 하나 들어주십시오.”
“하하. 사부께서 내게 청할 일이 있을 줄이야. 무엇이든 말해보십시오.”
황태손이 기쁜 얼굴로 호기롭게 대답했는데…….
팽만소는 엉뚱한 사람을 불렀다.
아까 봤던 굉장히 착해 보이는 미청년, 정광이었다.
“사부. 이자는 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하.”
팽만소는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간곡한 어조로 부탁했다.
“이보게, 혁련 공자. 이틀간만 저하를 보필해 줄 수 있겠나?”
정광의 대답은 빨랐다.
“대가만 맞으면요.”
* * *
나름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대가 없이 돕는 건 영 어색하지 않은가.
물론 돼지가 일을 벌일 것을 대비해서 황태손을 지켜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있었지만, 겸사겸사 받아낼 건 받아내는 게 세상의 이치였다.
그것이 바로 도(道).
정광은 도사였기에 도에 따랐을 뿐이거늘…….
‘반응이 왜 이래?’
부지휘사라는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은 당장에라도 도를 휘두를 기세였다.
황태손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정광을 바라보고 있었고.
정광을 겪어본 팽만소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되물었다.
“뭘 원하는가?”
“팽가에서는 얻을 게 더 없을 것 같은데요.”
“……그 말은?”
“황태손께서 훨씬 부자이시지 않나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부지휘사가 노호성을 터뜨렸다.
“네 이놈! 감히 무슨 망발이냐!”
“그쪽한테 한 말 아닌데.”
대로한 부지휘사가 살기를 발하려는 그때.
황태손이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대의 말이 맞소이다. 내가 꽤 부자이긴 하지.”
“그러니까요.”
정광이 재깍 추임새를 넣자 황태손의 미소가 짙어졌다.
동시에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사부께서 왜 이자를 내게 붙이시려는 걸까?’
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총명한 사람이었다.
팽만소가 이러는 건 팽가에 어떤 위험이 있고, 자신의 안전을 걱정해서 이러는 것이라는 걸 대강 눈치챘다.
‘그렇다면…….’
바로 팽가를 떠나는 게 현명했다.
팽만소는 경거망동할 이가 아니었다. 그가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면 보통 위험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안 되지.’
황태손은 이미 잔치가 끝날 때까지 머물 거라 말했다.
그에게 번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의 무게와 실현으로 사람을 모았고, 끝내는 황태손으로 책봉된 그였기에.
훗날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황위(皇位)에 오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번복할 만한 융통성이 있었으나, 벌써 그랬다간 기껏 다져놓은 지지기반이 흔들리게 되리라.
‘이자는 누구일까? 사부의 신뢰를 받는 걸 보면 대단한 능력이 있다는 말인데.’
황태손은 돌려 말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정광이 혁련후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팽만소가 재빨리 말했다.
“그는 곤륜파의 도사 정광이라 합니다.”
“어? 어르신. 그걸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저하를 속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세. 자네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 이해해 주게나.”
“아, 진짜. 그래도 이건 아니죠.”
정광은 팽만소에게 따지다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황태손이 놀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그대가 그 유명한 진옥룡이요?”
“어? 황궁에도 벌써 제 명성이 퍼졌어요?”
“과연! 소문대로군.”
황태손이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자 정광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대체 어떤 소문을 들으셨길래…….”
“하하하. 아주 제대로 된 소문이니 안심하시오.”
황태손은 유쾌하게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진옥룡일 줄이야.’
평소 무림에 관심이 많은 그였다.
근래에 유난히 많이 들은 소문이 있었는데, 바로 정광에 대한 것이었다.
천하제일기재!
훗날의 천하제일인!
성품이 종잡을 수 없고, 손속은 거칠기 짝이 없으며, 오만하기 그지없는 데다, 재물을 심하게 밝히는 도사!
그 외에도 흉흉한 소문이 수도 없이 많았으나 꼭 첨언되는 말이 있었다.
‘그가 어떤 짓을 해도,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면 협의에 어긋나지 않은 일이라 했지.’
하늘이 내린 자질을 가지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한다. 그것이 곧 협(俠)이 된다.
물론 과장된 소문일 것이다.
허나 그중 일부만 사실이라 해도 대단한 자 아닌가.
‘음? 그러고 보니 소문과 다른 게 있군.’
그는 정광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소문처럼 잘생기진 않았구려. 혹시 역용을 한 것이오?”
“네. 보여 드려요?”
황태손이 손사래를 치며 엄살을 부렸다.
“됐소이다. 그대의 본모습을 보게 되면 자괴감에 빠진다 들었소.”
“흐음. 저하쯤 되시면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으실 텐데요.”
“무어라? 하하하하.”
정광의 말대로 황태손은 대단한 미남자였다.
물론 정광보다는 못했지만.
“칭찬 고맙소이다. 진옥룡에게 외모를 칭찬받다니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오.”
황태손은 정광과 격의 없이 떠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지휘사는 정광에게 있던 적개심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정광이 명문정파인 곤륜파의 제자라는 걸 알게 된 것도 한몫했고 말이다.
‘저하께서 이리도 밝게 웃으시다니. 이게 대체 얼마 만인가?’
도산검림(刀山劍林)보다 더 위험한 황궁에서 자라온 황태손이었다.
아니.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상황.
황궁에선 한순간만 방심해도 낭떠러지로 내몰리게 된다.
언제나 긴장한 채 생활해 왔는데, 오늘에서야 이렇게 마음 편히 웃으며 떠들 수 있는 또래를 만난 것이다.
‘진옥룡이라…… 소문이 마냥 좋지는 않지만 해가 될 인물은 아니지.’
팽만소가 정광을 붙이려는 건 뭔가 위험을 느껴서 그런 것일 터.
부지휘사는 과거의 상관인 팽만소의 안목을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안목도 믿었다.
그렇기에 도무지 경지가 가늠되지 않는 정광의 무공에 전율을 느꼈다.
‘정녕 고금제일천재라 불릴 만하구나. 반드시 저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즉시 전음을 보냈다.
-저하. 이 기회에 그를 거두셔야 하옵니다.
무공이 약해 전음을 못하는 황태손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욕심을 내고 있던 차였다.
이런 인재를 또 어디 가서 구하겠는가?
황태손은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이였기에 먼저 해야 할 말을 했다.
“부지휘사. 나는 그대를 믿소. 헌데 그대와 비견될 만한 이가 나타났구려.”
“참람한 말씀 거두어주시옵소서, 저하. 그는 소인보다 뛰어난 인재이옵니다.”
“하하. 겸손이 지나치시오.”
황태손은 시선을 정광에게 돌렸다.
그의 눈빛에서 태산과도 같은 위엄이 일어났다.
“진옥룡. 내 그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주겠소이다. 나와 계속 함께해 주시겠소?”
무려 황태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제안!
정광의 대답도 파격적이었다.
“네.”
“고맙소이다! 으하하하!”
“단, 이틀만이에요.”
“하하하…… 아?”
세상을 다 얻은 듯 대소를 터뜨리던 황태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