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95화 (95/569)

95화

너무 위험한 자

황태손은 황제의 손자이자 황태자의 아들이다.

훗날, 천하의 정점에 오를 존재!

그런 이가 팽가를 방문한 것이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거늘.’

팽강웅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현재 팽가를 대표하고 있는 그가 맞이해야 했다.

‘강호의 예법으로 맞아달라 했지.’

황태손 주진기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키게 하고 자신도 지키는 남자.

그러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해야 했다.

‘왜 직접 축하하러 왔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는 나중에 물어야 해.’

이유야 뭐가 됐든 그가 팽가를 찾아온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물론이요, 소문을 듣게 될 자들까지 팽가를 다시 보게 되리라.

팽강웅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정중히 포권했다.

“황태손 저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들어가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한편, 정광은 이미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팽만소가 절뚝거리며 따라가다가 불렀다.

“이보게, 혁련 공자.”

“네?”

“같이 좀 가세.”

“왜요?”

“……수빈이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러네.”

“흐음.”

정광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정말요?”

“……손녀를 보고 싶은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정광은 피식 웃었다.

‘매일 보면서 갑자기 무슨.’

항상 침착한 노인이 적절한 이유도 없이 이럴 리가 있나.

게다가 평소와 다르게 어조도 제법 다급하지 않은가.

표정이야 어떻게든 속이고 있었지만 그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대충 짐작이 가네.’

정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팽만소가 부탁했다.

“날 좀 부축해 주겠나?”

“그 정도야.”

정광이 부축하자 팽만소가 채근했다.

“빨리 가고 싶군. 어서 가세나.”

“하하. 왜 그리 도망치려 하세요.”

“……무슨 말인가?”

“언젠가는 잡히실 텐데 이럴 필요가 있으시냐는 거죠.”

“……자네,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상황을 보니 대충?”

“후우우. 이런 괴물 같은…….”

한숨을 쉬던 팽만소가 나직이 말했다.

“그냥 모르는 척해주게.”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닌데…….”

“……?”

“황태손은 모르는 척하지 않을 거란 게 문제죠. 어르신을 찾아온 거 아니에요?”

“……!”

한동안 묵묵히 걷던 팽만소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만날 수 없어.”

“그럼 그러시고요.”

“…….”

“정말 영원히 그러실 수 있으면.”

정광의 말에 팽만소는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흘러 팽강휘의 전각에 도착했는데,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기에 나이 어린 팽수빈조차 알아챌 수 있었다.

“할아버님. 무슨 일 있으신지요?”

“아니다. 너는 네 수련에 힘쓰거라.”

팽만소는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방으로 들어갔다.

팽수빈이 할아비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데 정광이 말했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그만 가서 쉬어.”

“……벌써 말입니까?”

“응. 어른들끼리 할 일이 있거든.”

팽수빈이 머뭇거리다 떠나자 정광은 백승무와 자오를 불렀다.

방에 들어간 그는 그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혹시라도 옆방의 팽만소가 들을까 봐.

-황태손이 금의위를 끌고 왔어요.

-……!

경악한 두 사람과 달리 정광은 담담하게 전음을 이었다.

-자오. 팽가에 찾아온 손님들과 어울려서 정보를 얻어오세요. 황태손이 어떤 사람인지, 황실에서 그의 위치는 어떤지. 황태손과 금의위 곁에는 가지 말고요.

-알겠습니다. 온 이유도 알아볼까요?

-아뇨. 그건 됐어요. 아. 말 너무 많이 하지 말고요.

-……명심하겠습니다.

자오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사라지자 백승무가 의욕 가득한 얼굴로 나섰다.

-사형!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수빈이 모친이 주신 것들 있지?

-네!

-그걸 어떻게 하면 더 불릴 수 있을지 고민해 봐.

-…….

정광은 백승무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고 축객령을 내렸다.

침상에 드러누워 눈을 감자 아까 봤던 일들이 떠올랐다.

먼저 팽강웅의 놀란 얼굴이었다.

‘황태손의 방문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어.’

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도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황태손씩이나 되는 이가 뭐 하러 일개 강호세가의 잔치에 오겠는가.

두 번째 떠오른 건 황태손의 눈이었다.

‘그렇게 또렷한 눈을 가진 이는 고집이 세지.’

누가 종용한다고 들을 이가 아니었다.

감언이설로 꼬드긴다 해도 본인이 판단하여 움직이는 이였다.

‘돼지가 수를 써서 보낸 것도 아니란 얘기군.’

아니, 사마련이 황태손을 움직일 힘이 있다면 무림은 이미 사마련의 것이어야 했다.

‘뜻밖의 변수가 생겼는데 돼지가 어떻게 나올까?’

그간 어떤 일을 도모했든 황태손이 나타났으니 수정해야 할 터.

정광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봤다.

그러곤 곧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무리 미쳤어도 그건 아니겠지. 나라면 그러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돼지는 충분히 미친놈이었다.

‘정말 그러려나.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광은 침상에서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몸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려 둬야 했다.

정광은 자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삼청합일신공을 운기했다.

* * *

자오가 가져온 정보는 별것 없었지만, 황태손에 대해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자라고? 극찬이군.’

무릇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일수록 약조를 지키기 힘든 법이다.

필부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치가 다르고 무게도 다르므로.

손익에 따라 뱉은 말을 뒤집어야 할 경우가 허다한데 그걸 지킨다는 건 두 가지 능력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반드시 지킬 수 있는 약조만 하는 판단력.

그 판단력이 빗나가더라도 어떻게든 지켜내는 뚝심.

‘만약 그렇다면…….’

황태손은 알아두어도 나쁠 것 없는 사람이리라.

더 좋은 건 아예 모르는 채로 지내는 것이고.

‘나도 산전수전 다 겪어봤지만, 황궁은 복마전(伏魔殿) 중의 복마전이란 말이지.’

역사서에 기록된 것들만 떠올려 봐도 그랬다.

얼마나 많은 암투와 모략이 판을 치는지 원.

전생에 천마신교에서 겪었던 일들보다 더하지 않던가.

‘되도록 엮이기 싫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까 떠올렸던 가정이 맞을 것 같았다.

황태손이 팽가에 오면서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뭐라도 받아내야지. 뭐가 좋을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미리 고민하는 정광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다른 이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사제. 황태손한테 받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사형. 혹시 황태손을…… 그러다 구족(九族)의 목이 날아갑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나 고아잖아.”

“……곤륜은요?”

“설마 청해성까지 찾아오겠어?”

“……무량수불. 천장지구천지소이능장차구자이기불자생고능장생(天長地久天地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故能長生)…….”

백승무가 도경을 외우며 현실에서 도피하자 정광이 칭찬했다.

“오오. 사제, 도가 많이 늘었는걸? 자오는 어떻게 생각해요? 떠오르는 거 없어요?”

자오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

“……어, 없습니다.”

“흐음. 어쩐다?”

“……이, 이번만큼은 그냥 지나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정광이 피식 웃었다.

“오해하는 것 같은데, 황태손한테 강제로 뜯어내려는 게 아니에요. 돕게 되면 적절한 보상을 받으려는 거지.”

“뭐, 뭘 도와주신다는 겁니까?”

“잠깐. 그냥 직접 묻는 게 낫겠네.”

“……네?”

난데없는 말에 백승무가 현실로 돌아왔다.

자오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찾아가서 직접 묻겠다고?’

‘완전히 미친 거 아니야?’

다행히 정광은 그들의 생각보다 덜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의 눈은 방문을 넘어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마침 이쪽으로 오고 있거든요.”

“……!”

“음? 표정들이 왜 이러지? 안심하세요. 당장 묻지는 않을 테니까.”

안심은 개뿔.

백승무와 자오는 위가 쓰리기 시작했다.

* * *

팽강웅은 황태손이 꺼낸 이름을 듣고 놀랐다.

‘할아버님을? 왜?’

어쨌든 황태손의 부탁 아닌가.

즉시 사람을 풀어 찾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그 사람이 팽강휘의 처소로 향하는 걸 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즉시 황태손 일행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이곳입니다.”

팽강웅이 담벼락에 둘러싸인 전각을 가리키자 황태손의 눈이 빛났다.

‘……드디어!’

그의 머릿속에서 오랜 기억이, 가슴속에선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하지만 겉으론 드러내진 않았다.

그는 황태손이었기에 어떤 일에도 속내를 내비쳐선 안 됐다.

대신 담담하게 두 손을 모아 팽강웅에게 예를 표했다.

“안내해 줘서 고맙소, 대공자.”

“천만의 말씀입니다. 들어가시지요.”

팽강웅이 겸양의 말을 하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을 잡았다.

“대공자. 안내는 여기까지면 충분하오.”

“……!”

천천히 뒤돌아보자 말을 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황태손에게서 두 걸음 이상 떨어지지 않고 있던 중년 사내였다.

‘이자가 감히!’

팽강웅은 내심 분노했다.

이곳은 팽가이며 그는 팽가주의 적장자 아니던가.

자신의 집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분노는 짧았다.

아무리 그라 해도 황태손의 앞에서 얼굴을 붉힐 순 없었기에.

마음을 가라앉히자 억누르고 있던 의문이 고개를 내밀었다.

‘황태손이 할아버님을 찾는 것도 이상한데,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뭔가 있는데 도무지 모르겠구나.’

이 의문은 함께 온 팽강휘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전각인데도 들어가지 못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잠깐. 안에 진옥룡 일행이 있는데…….’

팽강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광은 먼저 시비를 거는 이가 아니었다.

상대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오히려 귀찮아서 피하는 성격 아닌가.

팽 씨 형제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가 떨어졌다.

둘의 생각은 같았다.

‘지금은 물러날 수밖에.’

팽강웅은 황태손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다녀오시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맙소.”

황태손과 중년 사내가 전각으로 향했다.

그들을 따라왔던 금의위 무장들은 순식간에 전각의 담을 둘러싸고 철통같은 경계를 섰다.

팽 씨 형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금의위, 금의위 하더니 대단하군.’

‘저들의 힘은 집단을 이뤘을 때 제대로 드러난다더니 과연!’

팽가는 무관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다. 당연히 금의위를 거쳐 간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이 진영을 이룬 건 처음 봤기에 팽 씨 형제의 놀라움은 컸다.

한편, 중년인과 함께 담의 문을 열고 들어간 황태손은 얼마 안 가 걸음을 멈춰야 했다.

중년인이 도를 뽑으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위험한 자가 있는 건가?’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가 아는 중년인은 신뢰할 만한 자였다.

황태손은 긴장한 마음을 감추며 담담히 물었다.

“정 부지휘사(副指揮使). 무슨 일이오?”

중년인은 금의위 무관이 아니었다.

황실의 주요 인사를 호위하는 정예조직 어림군(御林軍). 그중에서도 이인자 자리에 있는 두 명의 부지휘사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입에서 차가운 전음이 흘러나왔다.

-저하. 천천히 물러나십시오.

“……!”

황태손은 깜짝 놀랐다.

‘물러나라고? 상대할 수 없는 고수가 있다는 말인가?’

황궁십대고수 중 한 명인 부지휘사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놀람도 잠시.

황태손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상대가 누군지, 얼마나 강한 고수인지, 왜 여기 있는지는 나중 문제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장의 목숨!

그가 황궁에서 살아오며, 살아남으며 깨달은 것이었다.

‘천천히. 상대를 자극하지 않게.’

황태손이 물러나는 만큼 부지휘사도 뒷걸음질을 치는데…….

전각에 있는 수많은 방들 중 한 방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그래요? 사람을 뭐로 보고.”

부지휘사와 황태손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그리고 잠시 뒤, 부지휘사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한 건 맞소만 너무 위험해서 그렇소.”

“뭐가요?”

“그대의 경지를 가늠하지 못하겠어서 말이오.”

“어라? 보기보다 안목이 높네요?”

“……모습을 드러내시오.”

굉장히 착해 보이는 미청년이 방 밖으로 나왔다.

미청년을 본 부지휘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젊다 했거늘, 외모도 젊다? 반로환동(返老還童)을 한 고수란 말인가?’

안력을 돋워 보자 미청년의 얼굴에서 미세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설마 역용술? 저렇게 정교한 수법이 있다니.’

둘 중 뭐가 됐든 위험한 존재였다.

도를 잡은 손에 저절로 땀이 맺혔다.

부지휘사는 금의위의 수장에게 전음을 보내 안으로 난입할 준비를 하게 했다.

이제 잠시만 시간을 끌면 될 터.

“그대는 누구요?”

“혁련후인데요.”

“……정체가 뭐냐고 물은 것이외다.”

“음…… 손님?”

그때, 금의위 수장의 전음이 들려왔다.

-부지휘사! 준비가 끝났소이다! 명을 내리시오!

부지휘사가 입을 벌려 크게 외치려는 순간!

다른 방의 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노인의 모습을 본 황태손이 격동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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