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94화 (94/569)

94화

모여드는 사람들

정광은 굳이 반론을 하지는 않았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른 것 아닌가.

그렇다고 양희인의 말에 따를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욕심 버리게 적당히 가르쳐 달라. 이거죠?”

“그렇습니다.”

“싫은데요.”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정광은 먼저 선물 받은 상자를 등 뒤에 숨겼다.

아주 자연스럽게.

“수빈이가 어떻게 살지는 수빈이가 정하는 거잖아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만.”

“그러니 나이를 먹어 자신의 판단을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는 하고 싶은 걸 하게 하면 됩니다.”

양희인은 정광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소문과 좀 다르군요. 수빈이를 가르치기 귀찮지 않나요?”

“귀찮죠.”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정광의 눈빛이 변했다.

거기에는 굳은 의지가 실려 있었다.

“약조했으니까요.”

“…….”

“수빈이가 재능이 부족해서 힘들 수도 있지만, 천하제이인으로 만들어주기로 했거든요.”

정광은 말을 해놓고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사제한테도 천하제이인이 될 수 있을 거라 했었네.’

뭐 어쩔 수 있나.

둘 중 하나는 되겠지.

정광이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양희인은 다시 한번 고민했다.

그래도 결과는 같았다.

이미 욕심에 사로잡혀 괴로운 길을 걷고 있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지 않은가.

어린 딸마저 그 길을 따라가게 할 순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방 밖을 향해 말했다.

“가져오시게.”

문이 열리며 시비가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양희인은 그것을 정광 앞에 놓았다.

“이래도 안 되겠습니까?”

“네.”

그녀는 시비에게 또 명했고 보따리 하나가 더 놓였다.

“이래도요?”

“……네.”

그러자 두 개가 더 쌓였다.

양희인은 힘을 주어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잘 생각하고 대답해 주십시오.”

정광은 흔들리려는 눈동자를 억지로 다잡았다.

감탄을 숨기며.

‘통도 크셔라!’

딱 봐도 아까와 같은 상자다.

이걸 받지 않으면 바보 아닌가?

하지만.

정광의 몸속에는 승부사의 피가 흘렀다.

‘좋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의 입이 열리며 굳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됩니다.”

“……대체 왜? 약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정광은 대충 주워섬겼다.

“자꾸 욕심, 욕심 하시는데.”

“……?”

“욕심이 무슨 죄가 있어요. 그걸 조절하지 못한 사람 잘못이지.”

“……!”

양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정광을 바라보던 그녀는 시비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나 더…….”

“……!”

“……하아아. 아닐세. 문을 닫게나.”

시비가 문을 닫자 작은 소리가 났다.

탁.

동시에 정광의 가슴에선 큰 소리가 났다.

쿵!

‘왜?’

의문은 곧 풀렸다.

양희인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사과한 것이다.

“진인의 귀를 어지럽혀 죄송합니다.”

“……진인 아닌데요.”

정광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어느새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곤륜의 선인들은 항상 진인이 아니라 하신다더니 사실이군요.”

“사실이니까요.”

“아하하하.”

나직이 웃던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진인의 뜻이 완강하니 이를 어쩔꼬…….”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어쩌긴. 한 번 더 권하면 될 것을 왜 고민해!’

다행히 마음이 통할 걸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제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오.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일단 진인의 말씀대로 수빈이가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만 기다려 보지요.”

“……네?”

“그때까지 진인을 믿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냥 믿지 마시죠.”

“하하. 믿으라고 하시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이 생기네요. 감사합니다.”

양희인은 들어올 때보다 후련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럼 이만…….”

“잠시만요.”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정광은 다시 한번 승부수를 띄웠다.

“보따리들은 놓고 가시죠. 무거우실 텐데.”

* * *

양희인은 크게 웃고 떠났다.

마음이 아직도 복잡했는데, 재밌는 농을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그리고 그녀가 남기고 간 건 말뿐만이 아니었다.

정광의 승부수가 통했다.

보따리들을 놓고 간 것이다!

아쉽게도 시비가 들고 있던 것들은 그대로 가져갔지만.

‘이게 다 얼마야.’

중원에 온 지 꽤 됐으나 이런 걸 계산하는 건 정광의 몫이 아니었다.

“사제! 들어와 봐!”

“네! 사형!”

백승무는 문을 열자마자 눈을 치떴다.

보화로 가득 채워진 작은 상자가 다섯 개나 있는 것 아닌가!

“헉!”

“제법 괜찮지?”

“사형! 이것들은 또 어디서 훔치셨…… 구하셨습니까?”

“수빈이 모친께서 주시더라. 대충 얼마쯤 해?”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보석이며 패물이며 워낙 자잘한 것들이 많다 보니 종류별로 나누는 것도 일이었다.

정광은 아예 자오와 팽수빈도 들어오라 했고, 정광을 제외한 세 사람은 열심히 그것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모든 계산을 끝낸 백승무가 가치를 말하자…….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좋군.”

무림맹에서 빼앗았던 남궁세가의 뇌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예정에도 없던 것들이 쏠쏠하게 들어왔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한편, 영문도 모른 채 거들었던 팽수빈은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왔었으나 보따리에 들어 있는 것들이 이런 보화들일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저…… 사부님.”

“응?”

“왜 어머니께서 이것들을 사부님께 드린 것입니까?”

“네가 얘기했었잖아. 선물을 준비하셨다고.”

“……이렇게 많이요?”

“이 정도는 돼야지.”

“……사부님이시니까 그렇다는 말씀이신지요?”

정광은 똑똑한 제자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었다.

“잘 아네.”

“…….”

“어? 표정이 왜 그래?”

“……저 때문에 어머니가 이렇게 무리를 하셔서…….”

미소 짓고 있던 정광이 얼굴을 굳혔다.

“제자야.”

“……네. 사부님.”

“네 어머니께서 무리하셨다 치자. 그럼 넌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정광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중에 네가 갚으면 돼.”

“……네?”

“투자받은 만큼 뛰어난 고수가 되라고. 그 뒤에 네가 직접 돌려 드리면 되잖아.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해?”

가만히 듣고 있던 백승무와 자오는 입을 떡 벌렸다.

재물은 사부가 챙기고 갚는 건 제자가 하면 된다니! 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형의 제자가 되는 값이라. 과한 비용은 아니지.’

‘정말 천하제이인이 될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재물이 대수겠는가.’

어리지만 영특한 팽수빈의 생각도 그랬다.

오히려 그랬기에 마음을 더 단단히 먹는 계기가 되었다.

‘반드시 사부님의 가르침을 깨우쳐서 천하제이인이 될 테다.’

이렇게 각자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정광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자. 그만 정리합시다. 사제, 잘 챙겨.”

“아, 알겠습니다.”

정리가 끝나자 그들은 연무장으로 나갔다.

정광의 지도로 수련이 시작됐는데, 얼마 안 가 팽만소와 팽강휘가 나타났다.

팽만소는 침착했지만, 팽강휘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혁련 공자?”

“네.”

“백 소협과 자오 대협까지…… 왜 또 얼굴을 바꾸셨소?”

사마련의 돼지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서였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정광은 누구나 납득할 만한 대답을 했다.

“그냥요.”

“……아.”

팽강휘는 바로 납득했다.

정광이라면 그럴 만했으니까.

물론 옆에 있던 팽만소는 안 믿었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정광의 물음에 팽만소가 대답했다.

“당분간 바쁠 것 같아 양해를 구하러 왔네.”

“잔치 준비 때문에요?”

“그렇네. 사흘밖에 안 남다 보니 정신이 없어. 강웅이가 진두지휘하고 있지만 옆에서 도와야 하네.”

“수고하세요.”

“……또 할 말은 없나?”

“아. 힘내시고요.”

“……고맙네. 자네도 수고하게나.”

팽 씨 조손이 떠나자 정광은 남은 세 사람을 다그쳤다.

더 효율적으로! 더 강하게! 더 오래!

그리고 밤이 되자 쓰러진 세 사람을 버려둔 채 칠야마영을 펼쳤다.

목표로 한 전각에 내려선 그는 잠마대법을 전개해서 안으로 스며들었는데…….

팽강웅이 잔치에 관련된 서류를 정신없이 정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오늘도 공쳤군. 역시 세 번째 이유인가.’

혹시 몰라 더 있어 봤지만 전날과 똑같았다.

정광은 팽강웅이 잠자리에 들자 전각을 벗어났다.

‘이거 혹시 잔치 당일에 일을 벌이는 거 아니야?’

기다리자니 좀이 쑤셨다.

‘차라리 나가서 직접 찾는 게 낫겠네.’

역천경을 이용해서 놈들의 사기를 쫓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문제가 있었다.

‘됐다.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愚)를 범할 순 없지.’

놈들이 흩어져 있으면 아랫놈만 잡고 돼지를 놓칠지도 모를 일.

정광은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그의 하얀 이가 달빛을 받아 시리도록 빛났다.

‘좀 이따 보자고.’

* * *

하북성은 천자(天子)가 머무는 연경(燕京)이 있는 곳이다.

자연히 관(官)의 영향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곳에 하북팽가 같은 무림세가가 있다는 건 무척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첫째는 오래전부터 하북성에 뿌리를 내린 대토호(大土豪)라는 것.

둘째는 무림세가일 뿐만 아니라 군부(軍部)의 명문이라는 것이다.

자고로 관(官)과 무림(武林)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사이이나 하북팽가는 절묘한 균형을 유지했다.

그렇기에 팽가는 관과 무림에 친구가 많았고, 토호와 대상단과의 관계도 돈독했다.

잔치 이틀 전.

이런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허어. 대단하군요.”

백승무가 연무장 담 밖을 보며 경탄하자 정광이 물었다.

“뭐가?”

“하북팽가가 명문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팽가도 무리한 거야. 돈이며 인맥이며 다 끌어모았을걸.”

“그걸 어찌 아십니까?

“사제 형이 전시(殿試)에 합격했었을 때 유모와 아저씨가 어땠게 했어?”

“……많이 무리해서 잔치를 여셨지요.”

“거봐. 축하보다는 자랑이 더 크잖아. 영향력을 떨치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기회인데 무리 좀 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으음. 맞는 말씀입니다.”

“그만 내려와. 앞으로도 계속 올 테니까.”

“아. 오늘은 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온 거군요.”

“그래. 내일도, 모레 잔치 당일에도 미어터지도록 오겠지.”

“거참. 정말 대단합니다.”

“뭐가 자꾸 대단해. 사제도 백가상단을 그만큼 키우면 되지.”

“……저는 이제 곤륜의 제자잖습니까.”

“사제의 명성이 높아지면 가문도 따라 올라가게 되어 있어.”

“……그게 가능할까요?”

백승무의 진지한 물음에 정광이 피식 웃었다.

“사제 자신에게 물어야지.”

“……이해했습니다.”

결국 백승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럴 의지도, 자신도 가지지 못한 채 남에게 물어서 뭐하겠는가.

백승무는 정신을 다잡고 수련을 시작했다.

자오와 팽수빈도 뭔가 깨달은 듯 수련에 집중했고.

정광은 낮잠을 잤는데, 저녁에는 또 허탕을 쳤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관군입니다! 관군이 몰려옵니다!”

정문에서 들려온 외침에 팽가가 소란스러워졌다.

팽가 사람들은 물론 손님들까지 뛰어나왔는데, 그중에는 군부의 사람들도 있었다.

상당한 직위를 가진 무관들이었다.

“대체 누가 감히 이런 소란을!”

“우리에게 맡기시오! 금방 처리하겠소이다!”

관의 일은 관이 해결해야 하는 법.

그들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섰다.

그리고 몰려오는 인마를 보고 굳어버렸다.

“저, 저건!”

“저들이 왜 여기에!”

준마에 탄 이들은 하나같이 황금색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바로 금의위(錦衣衛)!

황제의 친위대이자 특무 기관인 그들이 온 것이다!

무관들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금의위들은 팽가의 지척에서 멈췄다.

인마가 좌우로 갈라지며 중앙에 있던 경장 차림의 청년이 말을 몰아 나왔다.

청년의 얼굴을 본 무관 몇 명이 경악하며 부복했다.

“황태손(皇太孫) 저하(邸下)를 뵙습니다!”

황태손!

모두 경악해서 엉거주춤 무릎을 꿇으려 하는데,

말에서 내린 청년이 강호의 예법대로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주진기라 하오. 오늘은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서 팽가를 축하하러 왔으니 강호의 예법으로 맞아주시오.”

다들 어이가 없었다.

‘강호인으로서?’

‘팽가를 축하?’

‘강호의 예법?’

황태손의 입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줄줄이 나오다니!

한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정광은 다른 이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제법이군. 걸존에 비견할 만한데.’

황태손 주진기와 두 걸음 거리를 지키며 움직이는 중년인이었다.

‘진짜는 숨어 있고.’

정광의 시선은 어느새 주진기의 그림자로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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