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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93화 (93/569)

93화

욕심은 사람을 망친다

정파무림에는 수많은 문파와 세가가 있다.

당연히 명문도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에 속한다는 것은 명문 중의 명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간혹 여기에 속하지 않았던 문파나 가문이 갑자기 부흥을 맞아 기존의 세력을 밀어내고 끼어드는 경우도 있긴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으니.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힘도 중요했지만, 그 힘을 계속 이을 수 있는 저력이 필요했다.

바로 하북팽가처럼.

그들의 장원은 그 명성에 맞게 무척 넓었다.

정광은 칠야마영(漆夜魔影)을 펼쳐서 돌아다니며 내심 감탄했다.

‘생각보다 돈이 더 많은가 본데.’

넓이도 넓이지만 전각 하나하나가 돈을 바른 느낌이었다.

그런 전각들이 상당히 많다 보니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팽강웅의 사기(邪氣)가 너무 미약해서 가까이 가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 귀찮아.’

정광은 무공을 수련할 때를 제외하면 인내심이 무척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쉽게 가기로 했다.

‘야. 역천경.’

-…….

‘자냐? 구부려서 깨워줄까?’

-우웅! 우웅!

역천경이 정광의 품속에서 미친 듯이 진동했다.

‘그만.’

-…….

‘아까 사기를 품고 있던 놈 있지? 그놈한테 안내해.’

-……웅.

역천경은 대답해 놓고 아차 했다.

말을 못 하는데 어떻게?

다행히 정광은 방법이 있었다.

‘한 바퀴 돌 테니까 맞는 방향일 때 진동해. 도착하면 또 진동하고.’

-웅!

제자리에서 반 바퀴쯤 돌았을 때 역천경이 진동했다.

정광은 즉시 칠야마영을 펼쳤다.

몇 개의 전각 지붕을 뛰어넘었을까?

역천경이 다시 진동했고 정광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다른 전각보다 더 크군.’

밟고 있는 지붕의 기와도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발밑에서 미약한 사기가 느껴지는 게 제대로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팽강휘의 기운도 있구나. 들어가 볼까.’

-웅.

‘네 일 끝났으니까 조용히 해.’

-……웅.

정광은 눈을 감으며 은신법을 펼쳤다.

무림맹에서 남궁세가가 뿌리는 뇌물들을 가로챌 때 썼던 마공, 잠마대법(潛魔大法)이었다.

칠야마영을 펼치고 있어서 흐릿했던 몸이 머리끝부터 녹아내렸다.

금세 완전히 녹은 정광은 기와의 틈을 타고 흘러들어 갔다.

‘이건 할 때마다 기분이 안 좋단 말이야.’

그래도 이만한 게 없으니 어쩌겠나. 계속 쓸 수밖에.

얼마 안 가 정광은 전각 지붕을 뚫고 들어가 방 천장에 맺혔다.

감았던 눈을 뜨자 방 내부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팽강웅과 팽강휘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이가 좋은 편인가.’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중, 팽강휘가 입을 열었다.

“형님. 무림맹은 요즘 어떻습니까?”

“무척 바쁘지. 아버님과 원로원을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겠군요.”

“많은 정도가 아니야. 어찌 그렇게 사사로운 욕심들만 차리려 드는지 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팽강웅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곤륜을 필두로 한 문파들이 거들고 있다. 얼마 안 가 제대로 잡힐 것이니 걱정 말거라.”

“맹에서 곤륜을 대표하는 이가 허청 도장이시지요? 전에 한번 뵈었는데 좋은 분이시더군요.”

“좋은 분이지. 아버님을 많이 도와주고 계셔. 앞으로도 곤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터. 강휘 너도 신경 쓰거라.”

“명심하겠습니다.”

팽강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넌지시 물었다.

“진옥룡 그 친구는 어땠습니까? 사귀어볼 만합니까?”

“…….”

팽강웅은 술을 한 잔 마신 뒤 중얼거렸다.

“위험해.”

“……위험하다니요?”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자다. 거기에 천고의 자질까지 지녔지. 그런 이가 위험하지 않으면 천하에 위험한 이가 어디 있겠느냐.”

팽강휘는 그의 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적장자인 데다 무공, 학식, 인품, 뭐 하나 빠지지 않는 형이었다.

하지만 단점이 있었으니.

누가 자신의 위에 서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무공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그 어떤 것이든 전부.

“……형님. 그는 명예나 권력을 탐하는 자가 아닙니다.”

“안다.”

“그런데 어찌 그리 경계하십니까?”

팽강웅은 술을 한 잔 더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세상이 그를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

“……하지만…….”

“그만.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팽강웅은 자신의 잔과 아우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들어라.”

“네, 형님.”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치고 입에 털어 넣었다.

“강휘야.”

“……네.”

“네가 그를 만나고 욕심을 버렸다는 걸 안다. 아니, 다른 것을 탐하게 되었지.”

소가주가 되어 다음 대의 가주가 되는 게 아니라 도(刀)의 끝을 보기로 결심한 것을 말함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리가 함께 지내온 시간이 있는데 어찌 모를까.”

팽강웅은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네가 곤륜에서 돌아와 진일보한 실력을 선보였을 때. 아버님은 너를 무척이나 칭찬하셨었지.”

“…….”

“당연히 잔뜩 으스댈 줄 알았다. 헌데 변했더구나. 자만하지 않고 수련에 매달렸어. 무공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커진 것이야.”

“…….”

“훌쩍 큰 네가 부러웠다.”

“…….”

“소가주 자리를 포기해 줘서 고마웠고.”

“형님…….”

“그래서 결심했다. 나는 그를 만나도 변하지 않겠다고.”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팽강웅의 두 눈이 빛났다.

“변하기 싫으니까. 지기 싫으니까.”

“…….”

“그가 천하제일의 기재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지지 않았어. 반드시 그의 위에 설 것이다.”

“…….”

팽강휘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형님이라 해도 그를 적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이건 형님을 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를 받는 팽강웅의 목소리에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내가 설마 널 오해할까. 우리를 낳아주신 어머님은 다르나 키워주신 분은 한 분 아니더냐. 내 너를 경계하기는 했다만 한시도 내 아우란 걸 잊은 적이 없어.”

“……형님. 그러면 한 번만 더 생각을…….”

“여기까지. 술이나 들자.”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술을 마셨다.

그리고 반 시진 뒤, 팽강휘가 떠나자 팽강웅은 잠자리에 들었다.

천장에서 지켜보던 정광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쓸데없는 얘기밖에 없네. 이놈아, 일을 벌이러 왔으면 움직여야지.’

혹시나 싶어 더 지켜보는데.

팽강웅은 아예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

‘텄네, 텄어.’

정광은 천천히 지붕 밖으로 빠져나갔다.

팽강휘의 전각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방으로 들어가 생각에 잠겼다.

‘바로 안 움직이는 걸 보면 둘 중 하나군.’

첫째, 돼지가 아직 안 왔거나.

둘째, 일을 벌이는 날까지 여유가 있거나.

‘당연히 첫 번째는 아닐 테고.’

철혈장과 팽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상소운이 철혈장에서 떠난 지 오래, 한참 전에 근방에 도착해 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두 번째도 영…… 잔치는 나흘밖에 안 남았잖아.’

팽가는 잔치 준비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일을 벌이려면 이때를 노려야지, 또 언제 하겠는가?

‘아니면 최소한 잔치 당일을 노리던지.’

그런데도 오늘 하루를 버렸다?

‘……세 번째 이유일지도.’

다른 이유를 생각해 낸 정광이 씩 웃었다.

손을 쓰기 더 편해질 것이기에.

마음껏 몸을 풀 수 있을 것이기에.

“아. 기대돼.”

정광이 무심코 중얼거리는데 옆에 있던 팽수빈이 되물었다.

“사부님. 무엇이 기대되십니까?”

“아. 너 있었지. 운기조식 해보니까 어때?”

“놀라운 신공입니다. 이름이 무엇인지요?”

“이름? 원래 운공하던 것의 이름이 뭐지?”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입니다.”

“그럼 수빈일기공(秀彬一氣功)으로 하자. 마음에 들지?”

팽수빈은 입을 떡 벌렸다가 간신히 물었다.

“……서, 설마 이 신공도 사부님께서 만드신 겁니까?”

“응.”

“……어, 어떻게…….”

“잘. 근데 안 가냐? 늦었잖아.”

“……사부님을 기다리느라…….”

“왜. 할 말 있어?”

팽수빈이 자세를 바로 하며 청했다.

“사부님을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만나주실 수 있으신지요?”

정광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다.

아니, 아주 많이 없다.

당연히 팽수빈의 청을 거절했다.

“아니.”

“……약소하지만 선물도 준비해서 오신다고 하는데…….”

“제자가 원하는데 만나야지.”

“…….”

“힘들게 여기까지 오실 거 있나. 내가 갈까?”

“……아닙니다. 돌아가서 말씀 전해 드리겠습니다.”

정광은 팽수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부했다.

“그래. 뭘 준비하셨는진 모르지만, 무거우면 네가 좀 도와드려.”

* * *

손님은 아침이 되자마자 찾아왔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중년 부인이었는데, 얼굴까지 웃는 상인 게 무척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팽가에도 이런 사람이 있나?’

자고로 팽가 하면 남녀 할 것 없이 우락부락한 몸에 선이 굵은 얼굴이거늘.

‘수빈이와 좀 닮았네. 설마?’

그의 생각대로였다.

“처음 뵙습니다. 수빈이의 어미, 양희인이에요.”

“어쩐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냥 혼잣말이에요. 혁련후입니다. 들어오시죠.”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다.

정광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선물 가져오셨어요?”

양희인이 작게 웃으며 보따리를 내밀었다.

“그럼요. 보시지요.”

“감사합니다.”

정광의 손이 눈부신 속도로 보자기를 풀었다.

그러자 고급스러운 작은 상자가 나왔는데 그 자체로도 귀물이라 불릴 만했다.

“어라. 감각이 있으시네.”

“그렇죠? 열어보시면 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정광은 이 상자도 그랬지만 양희인도 마음에 들었다.

“솔직하셔서 좋네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그렇다면 상자 안의 내용물도 귀물일 터.

정광은 천천히 덮개를 열었다.

그러자.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는 보석들이 방 안을 밝혔다.

“오오.”

“마음에 드시는지요?”

“조금요.”

“딸아이를 거두어주신 데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고요.”

“으음. 앞으로까지 하면 많이 모자란 감이…….”

“설마 이번 한 번으로 끝나겠습니까?”

“하하. 역시 팽가의 안주인이시네요. 잘 쓸게요.”

받을 것도 받고, 할 말도 다 한 정광이었다.

그가 가만히 멀뚱거리고 있자 양희인이 웃었다.

“하하. 본론만 말씀하시고 끝인가요?”

“네.”

“그럼 제가 말하지요. 혹시 곤륜의 진옥룡이신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 진짜였군요. 그냥 말해봤는데.”

정광은 양희인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의 천진하게 웃는 얼굴에 거짓된 기운은 전혀 없었다.

‘팽 씨 조손이 말한 건 아니군.’

아니나 다를까.

양희인은 어떻게 정광의 정체를 짐작했는지 얘기했다.

“강휘가 그렇게 어려워할 정도로 공경할 청년은 천하에 없지요. 오직 진옥룡뿐이랄까?”

“그렇긴 하죠.”

“게다가 아버님께서 먼저 부탁드렸다더군요. 그럴 만한 자격을 가진 청년은 역시 진옥룡밖에 없어요.”

“그러게요.”

“마지막으로 수빈이가 기뻐서 자랑하더군요. 성품은 좀 그렇지만 천하제일의 사부님이 생겼다고.”

“앞은 이상한데 뒤는 맞네요.”

정광의 말에 양희인이 나직이 웃었다.

“과연 듣던 대로네요. 특이하세요.”

“부인도 특이하신데요.”

“그런가요? 아. 진옥룡께서 수빈이의 사부가 되신 건 아버님, 저, 강휘, 수빈이밖에 모르니 안심하세요.”

안심할 것까지 있나.

비밀을 발설한 이들을 족치면 되는 것을.

정광이 이런 생각을 하는데 양희인은 다른 말을 꺼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들어보고요.”

“팽가 사람들은 욕심이 많습니다. 그이는 자신의 이상을 권력을 이용해 이루겠다는 야망이 있어요.”

정광은 팽가주 팽수관을 떠올렸다.

“그렇더군요.”

“첫째는 무엇이든지 최고가 되고 싶어 하고 둘째는 도(刀)의 끝을 보려 합니다.”

“흐음. 이 공자는 몰라도 대공자는 힘든데.”

양희인은 정광을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수빈이도 욕심이 있었는데 진옥룡 때문에 그 욕심이 더 커졌습니다. 천하제이인이 되겠다더군요.”

“아. 그건 가능해요.”

“그리고 진옥룡께서 등선하시면 천하제일인이 되겠답니다.”

“이런. 내가 더 오래 살 건데 어쩌지.”

“네? 하하하하.”

한참을 웃던 양희인이 정색하며 말했다.

“진옥룡. 첫째와 둘째는 다 컸으니 어쩔 수 없지만, 수빈이만큼은 편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왜요?”

“……욕심은 사람을 망치니까요.”

정광은 볼을 긁었다.

결국 딸 걱정 때문에 발걸음을 했다는 말 아닌가.

게다가 이유란 것이 고작…….

‘……욕심이 사람을 망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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