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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92화 (92/569)

92화

그건 그때 가서 상의하죠

하남성에서 팽강웅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듯이 그의 기운은 팽가 무인들과 달랐다.

오직 정광만이 알 수 있을 만큼 미약한 차이였기에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건만…….

품속에 있는 역천경이 진동하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기(邪氣)인가?’

-웅! 웅!

역천경이 신이 나서 대답했다.

녀석은 조요경(照妖鏡).

마기(魔氣)와 사기(邪氣)를 감지하고 비추어 그 본체를 드러나게 하는 동경이다.

한마디로 귀물 중의 귀물이었다.

이런 녀석이 저 미약한 사기에 반응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감지하기 힘들 만큼 미약하지만, 꽤 쓸 만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군.’

-웅! 웅!

마도(魔道)의 종주(宗主)였던 정광이 마기를 놓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사기라는 얘기인데, 확실히 느낄 수 없어 판단을 미뤄뒀었다.

그걸 오늘에서야 확신하게 된 것이다.

역천경 덕분에.

‘녀석. 꽤 쓸모 있네.’

-웅! 웅!

‘그런데 말이야.’

-……?

‘내가 부를 때까지 죽은 것처럼 조용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었나?’

-……!

‘왜 네 마음대로 진동해?’

역천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을 품은 이 무지막지한 애송이는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빨리 어떻게든 변명을 해야 했다.

그래도 내 덕분에 알았잖아!

이랬다간 바로 소멸될 것이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그나마 반 죽을 정도로만 두들겨 맞을 것이다.

결국 답은 하나!

역천경은 후자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천경은 요기가 부족해서 말을 못 하는 신세.

‘어쭈, 대답 안 해?’

-…….

‘오오. 패기 좋은데? 좀 이따 보자.’

-……우우우우우우웅…….

역천경은 서러움이 복받쳐 울었지만 정광이 알 수는 없는 일.

그저 시끄러울 뿐이었다.

‘지금 소멸시켜 줄까?’

-…….

정광은 간단하게 일을 해결한 뒤 팽강웅을 살펴봤다.

하남성의 무림맹에서 하북성의 팽가까지는 짧은 거리가 아니다.

바삐 달려왔는지 팽강웅 일행의 옷은 먼지투성이였는데 기세만큼은 당당했다.

그중에서도 팽강웅은 군계일학이었고.

‘하북팽가주의 적자(嫡子)가 사기를 품고 있다?’

그것도 누구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지만 위험한 사기다.

그 정도 사공(邪功)이라면 사마련과 관계가 있을 터.

이제야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악상(惡象) 상소운. 그 돼지겠지.’

정광은 기분이 좋아졌다.

팽가까지 온 보람이 있지 않은가.

상소운은 사마련주의 둘째 제자다.

그쯤 되는 신분이면 꽤 많은 고수를 끌고 올 게 분명했다.

‘되도록 빨리 와주면 좋은데.’

아마도 이미 근처에 와서 일을 꾸미고 있으리라.

‘놈들이 몰려오면…….’

마음껏 손을 쓸 것이다.

팽가를 도와준다는 명분도 있고, 사마련은 무림맹과 적대하는 중이기에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도 없다.

환생 후 처음으로 실컷 날뛸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놈 보게?

‘인마. 왜 침을 꼴깍꼴깍 삼켜?’

-……우웅.

‘이젠 거짓말까지? 그냥 혼을 제압해서 부려줄까?’

-우웅! 우웅!

정광은 바로 운룡을 뽑아 녀석을 몇 번 그어주려다가 참았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팽 공자. 잠깐만요.

팽강웅을 맞이하기 위해 뛰어가려던 팽강휘가 멈칫했다.

-음? 갑자기 왜 전음을 하시오?

-원래 대공자도 오시는 거였어요?

-그렇소이다.

-왜요?

-아버님 대신 이번 잔치에서 손님들을 맞이해야 하지 않소.

조부인 팽만소는 가문 일에서 완전히 물러났다는 의미였다.

‘팽강웅이 팽가를 대표해서 잔치를 주관한다는 얘기군. 이거 재밌는데.’

잔치에서 뭔가 일어날 것 같았다.

정광은 그 잔치를 즐겨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팽 공자. 나는 정광이 아니라 혁련후예요.

엉뚱한 말이었지만 팽강휘는 기재였기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혹시 형님께도 그대의 정체를 숨기란 말이오?

-네.

팽강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정광이 이런 부탁을 하는지.

‘정체를 숨기고 본가에 온 게 형님 때문인가?’

자세히 물어봐야 했다.

-이유를 알 수 있겠소이까?

-별로 사이가 안 좋아서요.

-…….

-괜히 얼굴 붉힐 필요 없잖아요.

-…….

팽강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정광의 평소 언행이나 태도를 알고 있었기에.

‘살가운 편은 아니지. 아니, 싸움이나 안 나면 다행이려나.’

과거, 그가 정광을 만났을 때도 그러지 않았던가.

아비가 보냈던 전서 중 정광과 관련된 내용들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극찬이었지. 하지만 형님은…….’

별 내용이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뭔가 마찰이 있긴 했나 보군.’

팽강웅은 인품이 뛰어났으나 경쟁심이 있는 사내였다.

동생인 팽강휘에게도 승부욕을 표출할 정도로.

‘진옥룡에게도 그러신 건가.’

정광의 성격이야말로 보통이 아니거늘.

이렇게 자신을 숨겨서 피하려는 것은 팽가에 대한 배려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옥룡. 그렇다고 형님을 계속 속일 순 없소.

물론 정광도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언젠가 직접 밝히고 사과할 테니까.

아마도 팽강웅을 두들겨 패면서 밝히게 되리라.

겸사겸사 사과도 하고.

이런 생각을 팽강휘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소. 그렇게 합시다.

그는 전음이 끝나기 무섭게 신법을 펼쳐 제 형에게 달려갔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정광이 씩 웃었다.

‘마침 딱 맞춰 오네.’

팽강웅의 마중을 나왔는지, 팽만소가 정광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르신. 부탁 하나만 할게요.

정광은 팽강휘에게 말했던 내용 그대로 팽만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팽만소는 심유한 눈빛으로 정광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 못 믿으세요?

“…….”

-진짜 사이 안 좋은데.

“…….”

팽만소는 꿈쩍도 안 했다.

정광은 내심 탄식했다.

이 똑똑한 노인이 전음을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말을 안 믿는다는 걸 알았기에.

어쩔 수 있나.

어느 정도는 풀어야지.

-왜 정체를 숨기고 왔냐고 물으셨었죠?

팽만소의 고개가 미약하게 움직였다.

-그때 대답과 똑같아요. 확실해지면 말씀드릴게요.

“…….”

-팽가를 위해서 이러는 건데 협조 좀 하시죠.

그제야 팽만소의 입이 열렸다.

“자네 짐작이 틀렸길 비네.”

-맞을 것 같은데.

“……맞으면 어떡할 생각인가?”

정광은 팽만소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속에선 강렬한 투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꽤 성깔 있네. 하긴. 큰손자와 관계된 일이니 그럴 만도 하지.’

정광은 그답지 않게 많이 양보하기로 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상의하죠.

팽만소도 상당한 양보를 했다.

큰손자와 관계된 일이었지만 정광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팽강웅의 조부로서, 팽가의 큰 어른으로서 해야 할 말은 잊지 않았다.

“반드시 그래야 할 걸세.”

* * *

정광은 바빴다.

연무장으로 돌아가 팽수빈을 협박…… 아니, 설득하고 백승무에게도 주의를 줬다.

“그 양반 아는 척하지 마.”

“알겠습니다, 사형.”

“아. 얼굴도 바꿔야지.”

상소운이 직접 팽가에 나타날지도 몰랐다.

천변만화역용축골마공의 마기를 눈치챘었으니 다른 역용법을 써야 하리라.

백승무에게 썼던 것처럼.

‘하루에 한 번씩 해주기 귀찮지만 어쩔 수 없지.’

정광은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몇 번 그러자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너무 착해 보이는 미청년이 되었다.

지켜보던 백승무와 자오가 입을 떡 벌렸다.

‘너무 착해 보이잖아!’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있나!’

하지만 둘이 다른 점이 있었으니.

백승무는 자오에 비해 속마음을 감추는 게 미숙했다.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그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온 것이다.

“사형…… 그건 좀…….”

“왜?”

정광의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백승무가 찔끔했다.

“아닙니다!”

“사제도 해야지. 이리 와.”

“……이번엔 좀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지.”

정광은 백승무의 얼굴을 대충 찌른 뒤 자오의 얼굴도 손봤다.

“음. 잘 나왔네.”

정광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왜 이리 불안해지는지.

백승무와 자오는 서로를 보자마자 경악했다.

“헉!”

“억!”

서로 바라보길 한참.

백승무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제 얼굴이 어떻습니까?”

“……너무 불쌍해 보여서 제 전낭이라도 드리고 싶군요. 저는 어떻습니까?”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악독한 부자의 관상입니다. 제가 털고 싶을 정도로요.”

두 사람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홀로 만족하고 있던 정광이 위로했다.

“사제. 제법 잘 나왔는데 왜 그래. 자오도 잘 어울리는데요.”

참다못한 백승무가 폭발했다.

“왜 사형만 미남입니까!”

“내 말이. 본판이 잘생겨서 아무리 뒤틀어도 그렇게 되네.”

“…….”

“그보다 소리칠 힘이 있어? 수련이 널널했구나.”

“헉! 그, 그건…….”

“좋아. 좀 조여보자.”

정광은 백승무를 굴렸다.

가만히 있던 자오까지 덤으로.

얼마 안 가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이제 뭐 하지?’

정광은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려면 시간이 꽤 남은 상황.

밥이나 먹으러 갈까 하는데…….

팽수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부님.”

“응?”

“아까 그 역용술요…….”

“……?”

잠시 머뭇거리던 팽수빈이 용기를 내어 부탁했다.

“저도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정광은 그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팽수빈이 아무리 어른스럽다 해도 아직은 어린아이.

그런 잡기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이리라.

정광은 따뜻하게 대답했다.

“넌 너무 약해서 안 돼.”

“…….”

“네가 배우려면 적어도 삼십 년은 흘러야…… 잠깐.”

정광은 말을 끊은 뒤 머릿속에서 주판알을 튕겼다.

그리 오래지 않아 시간을 줄일 방법이 나왔다.

‘빨리 키우려면 내공심법을 더 효율적인 것으로 주면 되지.’

하북팽가의 것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팽수빈의 성정과는 조금 안 맞았다.

검법과도 궁합이 좀 그랬고.

‘제대로 부려먹으려면 제대로 키워야 해.’

정광은 팽수빈을 방으로 데려가 운기조식을 시켰다.

얼마 안 가 그녀는 소주천(小周天)에 들어갔다.

어린아이치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역시 자질이 꽤 있다니까.’

그녀의 명문혈에 손을 대고 진기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세 번째 소주천에 접어들자 대충 감이 잡혔다.

‘많이는 안 고쳐도 되겠는데.’

정광은 머릿속에서 그림을 완성한 뒤 제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 진기의 움직임을 따라와.

‘……!’

-당황하지 말고.

‘…….’

영리한 팽수빈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사부가 내공심법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러자 걱정부터 들었다.

‘본가의 심법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때, 정광이 진기 한 줄기를 불어넣어 제자를 인도했다.

팽수빈은 곧 결단을 내렸다.

‘사부를 믿어야 해!’

사승관계에 있어서 불신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

게다가 그 사부가 진옥룡 아니던가.

그 길을 따랐다.

지금껏 걸어온 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원래의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과는 조금 다른 경로의 소주천이 계속됐고, 얼마 안 가 대주천에 이르게 되었다.

정광은 이미 손을 뗀 상태.

이미 길을 익힌 팽수빈은 운기행공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길 한참.

그녀는 정광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다.

분명 처음 가보는 길임에도, 이 길이 자신에게 더 맞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정광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더 빨리 클지도 모르겠네.’

확실히 팽가의 자제들은 무공에 소질이 있었다.

‘그런데 그놈은 왜 사공을 배운 거야?’

어차피 곧 알게 될 터.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문을 열어보니 완연한 밤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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