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진동
팽수빈은 자오의 더럽고 비열한 수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기절해 버렸다.
자오는 죄책감 섞인 얼굴로 정광에게 물었다.
“혁련 공자. 아직 어린 소저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했습니까?”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자오야말로 잘도 하던데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음험하고 악랄해요?”
“……그거야 공자께서 지시하셔서…….”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요.”
“……그래도 상처는 입히지 않았…….”
“마음에 상처가 남았을 것 아닙니까.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자오가 입을 떡 벌렸지만 정광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소중한 제자에게 추궁과혈을 했다.
이번에는 백승무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사형. 추궁과혈을 하면 그때만 좋을 뿐, 멀리 보면 회복력을 저하시키기에 독이 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릴 땐 괜찮아.”
“……혹시 귀찮아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겁니까?”
“사제도 해줄까? 분근착골 수법으로?”
“아닙니다!”
그때, 팽수빈이 눈을 떴다.
정광은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얼마 안 가 팽수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프냐?”
“…….”
“나는 안 아픈데.”
“……!”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경악했다.
심지어 팽강휘는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민 상황!
정광에게 큰 은혜를 받은 그였지만 팽수빈은 소중한 누이 아닌가!
그때, 팽만소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아버님?”
팽만소는 말없이 눈짓으로 정광 사제를 가리켰다.
팽강휘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들을 바라봤다.
마침 정광이 입을 열었다.
“분해서 아픈 거지? 아무리 연배 차이가 난다고 해도 아무것도 못 해보고 당해서.”
“……네, 사부님.”
“그러면 안 돼.”
“……네?”
정광은 팽수빈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가볍게 손짓하자 그녀의 옷에 묻어 있던 흙먼지들이 날아갔다.
정광은 그녀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으며 충고했다.
“졌다고 분노해 봤자 남는 건 없어. 분노를 토양으로 삼아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한다? 그따위 기분으로 해봐야 얼마나 늘겠어?”
“……그러면……?”
정광이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해. 죽일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생긴 거잖아. 어떡하면 더 통쾌하게 죽일 수 있을까 상상하면 의욕이 활활…….”
“사형! 사혀엉! 사혀어엉…….”
퍽!
“어억!”
재빨리 뛰어들어 정신없이 소리치던 백승무가 뒤통수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정광은 주먹을 풀면서 그를 나무랐다.
“사제. 갑자기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면 어떡해? 내 제자가 놀랐잖아.”
실제로 팽수빈은 어찌나 놀랐는지 눈물이 멈춰 있었다.
“크윽…… 사, 사형. 지금 저 때문에 놀랐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정광은 발끈하는 백승무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나.”
기껏 얻은 소중한 제자였다.
괜히 놀라게 했다가 경기(驚氣)라도 일으키면 어쩌려고 이런 짓을!
정광은 최선을 다해서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성깔 있어 보이는 미청년에서 음산한 기생오라비로 변했다.
“제자야, 괜찮니?”
팽수빈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뒷걸음질 쳤다.
“어? 어디 가?”
그녀는 어느새 백승무의 뒤에 숨어 있었다.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꼭 감싸며.
백승무가 당황했다.
“어? 패, 팽 소저. 왜…….”
“죄, 죄송합니다. 사숙.”
“……!”
짧은 두 글자가 백승무의 뇌리를 흔들었다.
‘뭐, 뭐라고? 사, 사숙?’
이런 소리를 들을 날이 올 줄이야!
원래 백승무는 관직에 오른 형 대신 백가상단을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명문정파에 입문해 대협이 되기를 꿈꿨으나 말 그대로 꿈. 결국 포기하고 있던 참에 만난 정광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구파일방 중 하나인 곤륜파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팽수빈이 그의 운명을 한 번 더 바꾸었으니.
‘내게 사질(師姪)이 생기다니…….’
그것도 이렇게 귀여운 사질이!
백승무의 마음속에서 뭔가 울컥 솟았다.
‘최소한 인성 교육만큼은 사형에게 맡겨선 안 돼!’
뜻이 서자 몸도 섰다.
백승무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가슴을 활짝 폈다.
“사형. 사질은 아직 어립니다. 그런 식의 교육은 너무 심해요.”
정광은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런 식의 교육? 너무 심해?’
정광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준에 오르려면 그 정도 독심은 있어야 했다.
그래도 따라오기 힘들 텐데 왜 엄한 놈이 끼어든단 말인가.
정광이 주먹을 쥐자 더없이 당당했던 백승무가 잽싸게 간청했다.
“사형. 사질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사형 같진 않습니다. 제발 헤아려 주십시오.”
“……음. 그건 그렇지.”
정광이 턱을 만지며 중얼거리자 백승무는 열변을 토했다.
“나이에 맞게 가는 겁니다. 졌어? 그럼 기분 좋게 두들겨 패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수련해! 그럼 쑥쑥 늘 거다!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습니까?”
“……흐음. 일리가 있어.”
백승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간 겪어온 바에 의하면 정광은 거의 넘어온 상태였다.
뒤돌아보니 팽수빈의 안색도 한결 나아져 있었다.
“사질. 이해했지?”
“…….”
팽수빈은 말없이 백승무의 허리를 더 강하게 안았다.
‘이런. 어쩐다?’
겁먹은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고민하는데…….
다행스럽게도 팽만소가 나섰다.
“수빈아. 네 사부의 말은 틀린 게 없다.”
“……네?”
팽수빈이 놀란 만큼 백승무도 놀랐다.
팽만소가 정광을 두둔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설마 이 노인도 사형처럼 머리가 좀 이상…… 독특한가?’
다행히 팽만소는 정상이었다.
“칼날을 딛고 사는 무인은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 한다. 네 사부는 네게 그 마음가짐을 설명했을 뿐이야. 헌데 아직 어린 네게 왜 그리 과격하게 말한 줄 아느냐?”
“……모르겠어요.”
“훗날 그런 각오를 가질 자신이 없으면 지금 포기하라는 뜻이다.”
“……아!”
팽만소는 시선을 정광에게 돌렸다.
“어떤가? 내 말이?”
꿈보다 해몽이 좋다더니.
정광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는데 팽만소가 두 손을 정중히 모았다.
“자네가 제자를 가르치는 데 끼어들어서 미안하네.”
“어라? 그러게요.”
친인이라도 사문의 일에 끼어들 순 없다. 크나큰 무례인 것이다.
“수빈이가 아직 어려 자네 뜻을 곡해한 것 같아 나섰을 뿐일세.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 약조하지.”
팽만소가 오해한 것이었지만 대충 비슷하지 않은가.
정광은 일단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네. 꼭 그러셔야 해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팽만소가 손녀를 바라봤다.
“수빈아. 네 뜻을 사부에게 알리거라.”
“네!”
백승무의 뒤에 숨어 있던 팽수빈이 정광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똘망똘망한 두 눈을 반짝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반드시 사부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어쨌거나 잘 풀린 상황.
정광은 씩 웃으며 말했다.
“기대할게.”
* * *
팽수빈은 정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난 사흘간 완전히 따라오진 못했지만 그럭저럭 말귀는 알아들은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네. 사부님.”
“좋아. 제법 똑똑한 게 사제랑 완전히 다르구나.”
머리뿐만이 아니라 몸도 달랐다.
“호오. 초식의 변환을 제대로 하는구나.”
“모두 사부님 덕분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근데 사제는 왜 못하는지.”
팽수빈이 검을 내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사부님. 사숙께서 옆에 계십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계속해 봐.”
“네!”
정광은 팽수빈이 검초를 펼치는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무릎에 묻은 백승무가 있었다.
“왜 그래?”
“……아닙니다.”
“수빈이와 비교해서?”
“…….”
정광은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은 왜 이리 마음이 심약한지. 자극을 줬으면 힘을 내야 하거늘.’
전생이었다면 진작 팼을 터.
하지만 다시 태어난 정광이었다.
그것도 명문정파 곤륜의 도사로.
“사제.”
“……네.”
“간만에 비무할까?”
백승무는 이형환위를 펼치는 것보다 빠르게 일어섰다.
“아닙니다!”
“사제를 위하는 내 마음을 몰라?”
“모릅…… 아, 알고 있습니다!”
“사제가 수빈이보다 모자란 건 사실이야.”
“…….”
“근데 그걸 들었다고 풀 죽으면 어떡해. 자극받으라고 일부러 그런 건데 모르겠어? 투지를 일으켜서 덤벼봐.”
백승무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가 사그라들었다.
투지로 상대할 자가 따로 있지.
정광에게 덤벼봐야 좋을 게 뭐 있는가.
그때, 팽강휘가 나타났다.
“좋은 아침이오.”
“안녕하세요.”
팽강휘는 누이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다가 나직이 감탄했다.
“허어. 어제와는 또 다르군.”
“당연하죠.”
“……혁련 공자의 제자니까?”
“잘 아시네요.”
팽강휘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헌데 수빈이가 수련하는 모습을 내가 봐도 괜찮소?”
“네.”
“전부터 상관없다 하여 보지만 좀 그렇소이다.”
팽강휘가 찜찜해할 만했다.
천하 어느 문파든 간에 타인이 무공 수련을 보는 것은 금기시하기에.
하지만 정광은 정말로 상관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초식 동작이야 겉껍데기에 불과한 것. 그 진의와 진기 운용법을 모르면 그저 보기 좋은 춤사위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정광의 마음이 변했다.
“으음.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갑자기 정론으로 바뀌셨소?”
“정론이니까요.”
“……그렇긴 하오만.”
“수빈이의 수련을 보는 대신 팽 공자도 힘 좀 쓰시죠.”
“……어떻게?”
“사제와 대련 좀 해주세요. 사제, 괜찮지?”
백승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제, 제가 팽 소협과 대련을요?”
“왜? 쫄려?”
“…….”
백승무는 곁눈질로 팽강휘를 봤다.
원래 장대한 체구가 더 커 보였다.
‘내가 패룡을 상대할 수 있을까?’
정파무림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한 명인 팽강휘였다.
명문 중의 명문 하북팽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무공을 배운 청년 고수!
게다가 나이도 네다섯 살 더 많으니 내공의 깊이도 다를 게 분명하지 않는가.
대련을 했다간 망신만 당할 터.
하지만.
이상하게 투지가 솟아올랐다.
‘패룡은 과거의 내가 가지고 싶었던 조건을 모두 가진 자. 저자를 꺾으면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
백승무는 투지만 솟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
스르르릉-
흑우를 뽑은 뒤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췄다.
“팽 공자. 곤륜의 백승무가 대련을 청합니다.”
그의 몸에서 투기가 넘실거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팽강휘가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좋소! 해봅시다!”
두 사람이 격돌했다.
정광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이럴걸 그랬네.’
항상 정광에게 얻어터지다 보니 자신감이 떨어진 백승무였다.
그런데 팽강휘 같은 하수와 붙여놓자 신이 나서 날뛰지 않는가.
뭐, 결국엔 졌지만.
콰앙!
“끄악!”
백승무는 팽강휘의 패도에 용맹하게 맞서다가 발길질에 채여 훨훨 날아갔다.
정광은 기절한 그를 받아낸 뒤 팽수빈에게 건넸다.
“방에 대충 던져놓을래?”
“……네. 사부님.”
팽수빈이 백승무를 질질 끌며 사라졌다.
팽강휘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 모습을 보았다.
“허어. 거참.”
“사제와 대련해 보니까 어때요?”
“흐음. 솔직히 예상외였소. 강하더군.”
“틈날 때마다 상대해 주세요. 팽 공자한테도 도움이 될 테니까. 하루하루 쑥쑥 크고 있거든요.”
팽강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도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불굴의 투사라…… 재밌는 친구군.’
투지만 대단한 게 아니었다.
나이에 안 어울릴 정도로 대단한 실전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금권검협이라 불리며 많은 협행을 했다더니 과연…….’
덕분에 큰 자극이 되었다.
성품도 순후하고 모나지 않았으니 사귀어볼 만한 자라 할까?
“그렇게 합시다.”
흔쾌히 승낙한 그는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헌데 언제까지 머무르실 셈이오? 되도록 오래 계셨으면 좋겠소만.”
마침 정광도 생각 중인 얘기였다.
‘사마련의 돼지가 뭔가 꾸미는 것 같아 있어보려 했는데…….’
아무 낌새도 없었다.
이렇게 계속 있을 수는 없는 일.
며칠 더 기다려 보다가 그냥 갈까 하는데…….
‘음?’
저 멀리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팽강휘도 알아챘다.
“아! 오셨나?”
“누가요?”
“같이 갑시다. 그대도 아는 분이오.”
정광은 팽강휘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누구를 말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 이질적인 기운은 그놈이잖아.’
아니나 다를까.
하북팽가의 대공자 팽강웅이 정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우웅.
품속에 있는 역천경이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