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90화 (90/569)

90화

구배지례(九拜之禮)

선반 위에 놓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속.

정광은 그 앞에 다가가 가볍게 손짓했다.

표면에 쌓여 있던 먼지가 한순간 사라지며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이 드러났다.

매우 기괴한 문양이었는데, 그 한가운데에는 범어(梵語)가 새겨져 있었다.

‘역천경(逆天鏡)이라…… 조요경(照妖鏡)의 일종인가?’

그때, 마치 그렇다는 듯 역천경이 속삭였다.

오직 정광만이 느낄 수 있는 진동으로.

-우우우웅.

정광의 입가에 희미한 선이 그어졌다.

‘성격이 급한 놈이군. 어디 보자.’

손을 뻗어서 잡자마자 기묘한 기운이 밀려들어 왔다.

사이(邪異)하다 못해 몸서리쳐질 정도로 요사스러운 기운이었다.

‘오오. 힘 좀 쓰는 놈인가.’

정광은 그 기운을 그대로 받으며 손을 뒤집었다.

그러자 역천경이 뒤집히며 매끈한 앞면이 드러났는데…….

그곳에는 대단한 미청년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조요경이 맞네.’

천변만화역용축골마공으로 바꾼 지금의 얼굴이 아니었다.

진옥룡이란 별호를 얻게 해준 현생의 원래 얼굴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영 어색한데.’

그것은 전생의 얼굴.

진천마로 불렸던 사내의 것이었다.

‘뭐 그건 그거고.’

한동안 역천경을 들여다보던 정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역천경에서 밀려들어 오던 요사한 기운이 그의 내부를 휘돌다가 뇌까지 집어삼키려 해서였다.

‘이놈이 진짜!’

오냐오냐했더니 끝이 없지 않은가!

정광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놈은 혼(魂)이 있는 존재. 마령제혼술(魔靈制魂術)을 펼쳐서 제압하면 그만이었기에.

하지만 바로 생각을 바꿨다.

혼을 제압해서 부리기 전에 두들겨 패는 게 먼저였으니까.

‘감히 날 우습게 봐?’

정신을 집중하자 의념(意念)이 솟았다.

그것은 몽둥이의 형태로 모이더니 금강석(金剛石)보다 단단하게 뭉쳤다.

역천경의 요기(妖氣)가 뇌를 집어삼키기 직전!

‘이거나 먹어라!’

정광은 의념으로 만든 몽둥이로 그놈을 팼다.

한 대, 한 대 확실하게!

쾅! 쾅! 콰앙!

-끼이이이이이!

놈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지만 정광은 코웃음 쳤다.

‘어쭈. 비명 지를 여력이 있어? 아직 덜 아팠구나?’

그럼 더 아프게 해줄 수밖에.

정광은 계속 팼다.

패고, 패고, 또 팼다.

그러자 놈이 몸 밖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것 아닌가!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감탄스러울 정도!

그렇다고 정광이 그대로 보내줄 리가 있나.

마침 이럴 때 쓸 만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십존 중 하나인 걸존(乞尊)의 타구봉법(打狗棒法)!

정광은 개방 최고의 절기를 펼쳐서 역천경의 요기를 두들겨 팼다.

아주 개를 잡듯이 찰지게!

쩍! 쩌억! 쩌엉!

-끼야아아아아악!

놈이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녔지만, 개방의 타구봉법은 이런 녀석을 잡기 위한 무공이었다.

결국 죽어라 도망다니던 놈은 반죽음 상태로 무릎을 꿇었다.

정광에게 굴복한 것이다.

‘또 헛짓거리할 거냐?’

-…….

‘대답 안 해? 그럼 더 맞아라.’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역천경은 재빨리 아니라고 외쳤지만 정광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라. 한 번 더 해보자고? 오냐!’

-……!

견두봉갈(犬頭棒喝), 발구조천(發狗朝天), 천하무구(天下無狗) 등, 삼십육초 타구봉법의 절초들이 화려하게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앙!

삼식육초라 해서 서른여섯대로 끝난 게 아니었다.

연달아 세 번을 펼쳤으니 도합 백팔대!

‘좋아! 간만에 손맛…… 아니지. 정신맛 좀 보는구나!’

신이 난 정광은 물아일체(物我一體)가 아닌 봉아일체(棒我一體)가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간을 길지 못했으니.

역천경의 요기가 어느새 쓰러져 꿈틀대고 있는 것 아닌가.

정광은 아쉬움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또 그럴 거냐?’

-끼잉.

‘미치겠네, 진짜. 아주 죽여주마!’

역천경이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라고 하는데 못 알아듣고 계속 딴소리를 하지 않는가!

이렇게 계속 처맞을 바엔 그냥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

역천경이 생에 대한 미련을 접고 그냥 죽으려 하는데…….

‘아. 너 요기가 부족해서 말 못 하는구나?’

역천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正)과 마(魔)의 기운을 가진 이 미친놈이 드디어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되다니!

-끼잉! 끼잉!

‘귀 따가워, 인마.’

-…….

‘흐음. 이렇게 하자. 예는 낑, 아니오는 낑낑. 알았어?’

-……낑.

‘듣고 보니 영 아니네. 웅, 우웅으로 가자.’

-……웅.

‘진작 이러지. 괜히 힘 뺐네.’

-…….

‘내가 부를 때까지 죽은 것처럼 조용히 있어라.’

-……웅.

정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던 팽만소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한참 하는가?”

“그냥 인사 좀 했죠.”

“……자네, 혹시 그 동경(銅鏡)이 무엇인지 아나?”

“역천경이라고 새겨져 있네요.”

“……범어까지 알다니. 학문도 대단하군.”

팽만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중얼거렸다.

“그건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던 것일세. 몇 대조의 어떤 분이 어느 곳에서 구하셨는지도 모르는 것이지.”

언뜻 보면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동경에 불과했다.

하지만 팽가에도 고수가 있었기에 역천경에서 풍기는 묘한 기운을 느낀 지 오래였다.

“강호 사람들이 다 알듯이 본가는 문(文)에 약한 편이네. 더구나 범어를 아는 이는 천하에 거의 없지 않은가?”

그래서 팽가는 돈과 인맥으로 저명한 학사(學士)를 초청해서 역천경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헌데 그게 끝이었지. 이름만 보면 전설로 전해지는 조요경(照妖鏡)이 아닐까 싶은데…….”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팽가 고수들이 역천경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만지고 들여다봐도 역천경은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어.”

정광은 팽만소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팽가는 지금껏 헛수고한 것이었기에.

‘조요경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군. 쓸데없는 전설이나 믿고 말이야.’

이것은 정종무공(正宗武功)을 익힌 자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는데 알려줄 필요는 없는 일.

어차피 이것은 전생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정광만이 쓸 수 있었으니까.

“이거, 가져도 되죠?”

“……어차피 본가에는 쓸모없는 것이니 그러게나.”

정광은 역천경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팽만소에게 더 큰 호감을 느끼며.

분명 자신이 이것에 대해 뭔가 아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시원스럽게 내주는 모습이라니.

‘마음에 든 건 든 거고.’

정광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쓸 만한 게 좀 있네.”

“…….”

“몇 개 더 챙기면 더 열심히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팽만소는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마음 같아선 한 대 후려치고 싶었으나 소중한 손녀의 사부가 될 자 아니던가.

게다가 수많은 배신을 겪으면서 얻은 안목이 말하고 있었다.

정광은 결코…… 아니, 웬만하면 배반할 이가 아니라고.

그는 천하제일인이 될 것이고, 그의 지도를 받으면 팽수빈도 천하제일검이 될지도 모른다고.

“……뜻대로 하게나. 대신, 잘 부탁하네.”

“물론이죠. 맡겨주세요.”

* * *

정광과 팽만소는 아까 있던 연무장에 돌아왔다.

그런데 팽수빈이 아직도 검술을 수련하고 있는 것 아닌가.

팽강휘, 백승무, 자오의 감탄한 표정을 보면 아까부터 계속 저러고 있는 것이리라.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꽤 열심이네.’

팽수빈은 너무 어린 나이라 근력도 내공도 부족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정광이 알려준 수빈패검을 펼치고 있었다.

정말 키울 만한 아이인 것이다.

정광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만.”

“……!”

그 목소리는 작고 낮았으나 수련에 빠져 있던 팽수빈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그녀는 바로 검을 갈무리하며 허리를 숙였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정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 제자가 되고 싶어요?”

“……!”

“싫으면 싫다고 말…….”

“되고 싶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높았는지, 모두 화들짝 놀랐다.

정광과 팽만소만 빼고.

팽만소는 빙그레 웃으며 정광에게 말했다.

“이보게, 내가 뭐라 그랬나?”

“그렇네요. 잠시만 실례할게요.”

정광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팽수빈과 함께 방에 들어갔다.

“앉으세요.”

“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았다.

정광은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나에 대해서 말할게요. 나는 곤륜파의 제자로 정광이라는 도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호에선 진옥룡이란 별호로 불리고요.”

“아!”

경악한 팽수빈이 참지 못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곤륜의 진옥룡이라니!

천재 중의 천재로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무림 최고의 신룡 아니던가!

비록 그 성품이나 손속에 대해선 말이 많았으나 지금의 그녀는 그것까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내가 진옥룡의 제자가 된다고? 둘째 오라버님이 벽을 깨게 해주고, 아버님의 극찬을 받은 분의 제자가?’

가슴이 벅차오른 그녀와 달리 정광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팽 소저가 내 제자가 된다 해도 곤륜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할 거예요. 나 개인의 무기명제자가 되는 겁니다. 거대 문파가 팽 소저의 뒷배가 되어주는 게 아니라 나 혼자만 그럴 수 있다는 말이에요.”

“상관없습니다! 아니, 꼭 원합니다!”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똑똑하시네. 계산이 빨라.”

“…….”

팽수빈은 어이가 없어 입을 살짝 벌렸다.

‘광오하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하지만 놀라긴 일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내 제자가 되면 세 가지를 잃고, 세 가지를 얻을 건데 잘 듣고 판단하세요.”

“당연히 괜찮…….”

“들어보고 결정해야죠. 사기 당하기 딱 좋네.”

“……죄송합니다.”

“그럼 잃는 것부터 말할게요.”

정광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첫째는 시간이에요. 하루 대부분을 무공 수련에만 전념해야 할 겁니다.”

“오히려 원하는 바입니다!”

“패기 좋네. 둘째는 즐거움이죠. 허구한 날 무공만 익혀서 삶이 퍽퍽해질걸요.”

“괜찮습니다! 수련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일이니까요!”

“쯧. 도대체 팽가에서는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뭐 어쨌든 내겐 좋은 일이지.”

혀를 차던 정광이 마지막 손가락을 꼽았다.

“셋째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지만 항상 가난할 거라는 것. 괜찮죠?”

“……그건 좀 이해가 안 갑니다만…….”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어때요? 감수할 수 있나요?”

팽수빈의 눈이 굳은 의지로 빛났다.

세 번째가 살짝 걸리지만 진옥룡의 제자가 될 기회였다. 무엇이 두렵겠는가!

“네!”

“시원시원하네. 그럼 얻게 될 것 세 가지를 말하죠.”

이것들은 짧았다.

“최고의 사부. 최고의 무공. 열심히만 하면 천하에서 가장 강한…… 이건 불가능하구나. 두 번째로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가장 강한 이는 공자님이시고요?”

“당연하죠.”

“…….”

“어때요? 할래요?”

팽수빈은 소문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십존의 가르침마저 귀찮아서 피했다더니 과연 명불허전 아닌가!

아니, 정광은 소문이 소박해 보일 만큼 말도 안 되게 광오한 이였다.

그래도 그녀에겐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으니.

수빈패검을 펼치자 느껴지던 신비한 감각!

마치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거대한 세상을 보고 놀란 기분이었다.

정광의 제자가 되면 계속해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제자 팽수빈, 사부님의 가르침을 따라 무공을 닦고 강호에선 협을 행할 것이며…….”

“굳이 협을 행할 건 없는데. 뭐 하고 싶으면 하고.”

“……!”

정광의 황당한 말에 팽수빈이 애써 생각했던 말들이 다 날아가 버렸다.

정광은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제자야. 반갑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부님.”

“내 노후를…… 아니, 네가 잘못 들은 거야, 알았지? 앞으로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

“……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정광은 방문을 열며 외쳤다.

“자오!”

“네! 공자님!”

“내 제자와 비무 좀 해주실래요?”

“아! 팽 소저를 제자로 받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이는 원시천존께서 보우하사…….”

“그만하고 암기부터 손에 쥐세요.”

정광의 엉뚱한 말에 밖에 있던 모든 이가 눈을 치떴다.

정광은 태연한 얼굴로 팽수빈을 데리고 나왔다.

“제자야. 검 뽑아.”

“네? 네!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녀가 검을 쥐자 정광의 시선이 자오에게 향했다.

“내 제자가 너무 올곧게 컸거든요.”

“……네?”

자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갑자기 웬 제자 자랑이란 말인가.

하지만 정광의 뜻은 그게 아니었으니.

그의 한쪽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비열한지 제대로 가르쳐 주세요.”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