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손해 볼 게 없는 장사
팽강휘가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왜 여기 계신 게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허어.”
더 물어보려 하는데 팽수빈이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은공께서 제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은공이라? 혁련 공자를 말하는 게냐?”
“그렇습니다.”
“헌데 너는 왜 그 검을 들고 있는 것이냐?”
“사실은…….”
팽수빈은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갑자기 도법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아 오라비를 찾아왔던 것과 정광이 그 이유를 알려주고 검법을 전수해줬다는 것까지.
팽강휘는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마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옥룡이 전수한 검법이라면 대단한 절기일 것이 분명하지만…… 도를 버리고 검을 익힌다? 이건 큰 문제군.’
팽가는 칠대세가의 일원인 만큼 자부심이 높은 가문이었다.
헌데 적성 문제 때문이라 해도 가전무공을 버리고 다른 이의 무공을 배운다?
팽수빈을 끔찍이 아끼고 정광의 진면목을 아는 팽강휘로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지만…….
‘다들 반대가 심하겠지. 아버님이 안 계시니 할아버님께서 나서셔야 해.’
마침 그의 조부는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대한 체격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연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왜 방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게냐?”
노인을 본 팽강휘 남매가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오셨습니까. 할아버님.”
노인은 하북팽가의 큰 어른이자 팽 씨 남매의 조부인 팽만소였다.
그는 손주들의 인사를 받은 뒤 정광을 바라봤다.
“자네가 혁련 공자군. 반갑네, 팽만소일세.”
“안녕하세요.”
심유한 눈빛으로 정광을 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그리고 백승무, 자오와도 인사를 나눴는데 제대로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마치 무인이 아니라 문사 같았다.
“헌데…….”
그는 팽수빈이 들고 있는 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왜 검을 들고 있는 것이냐?”
팽강휘가 눈짓하자 팽수빈이 답했다.
“실은…….”
꽤 긴 얘기였다.
그녀는 똘망똘망한 두 눈을 별빛처럼 반짝이며 계속 입을 놀렸다.
묵묵히 듣던 팽만소는 손녀의 얘기가 끝나자 명했다.
“한번 펼쳐보거라.”
“네?”
“혁련 공자가 네게 전해줬다는 수빈패검(秀彬覇劍)…… 흐음.”
그의 시선이 정광에게 돌아갔다.
“실수할 뻔했군. 이보게, 내가 견식해 봐도 되겠는가?”
“그러세요.”
얘기가 이렇게 되자 팽수빈은 검초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조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검법 이름이 나오자 부끄러웠지만, 반대로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했다.
그리고 수빈패검을 펼쳤다.
잠시 뒤.
살짝 커진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팽만소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짝다리를 짚은 채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광이 있었다.
팽만소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자네, 괜찮다면 나와 얘기 좀 하겠나?”
* * *
팽만소는 정광과 함께 팽가 내부를 걸었다.
얘기 좀 하자더니 아무 말 없이 그냥.
장원은 무척 넓은데 그의 걸음은 느렸다. 이러다간 언제까지 걸어야 할지 모를 일.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 노인네 몸져눕겠네.’
그러면 자신이 들쳐 업고 가야 할 터.
이럴 땐 선수를 쳐야 했다.
“연로하신데 그만 들어가셔서 쉬시죠.”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 늦었네. 내 몇 마디 물어봐도 되겠는가?”
“되도록 짧게요.”
“그러지.”
정광의 버릇없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 전에 하나 양해를 구하겠네. 강휘에게 자네가 누군지 들었어. 녀석이 날 설득하려고 그런 것이니 탓하지 말아주게나.”
“네. 생각해 볼게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가 괜히 이랬을 거라고는 믿지 않네. 정체를 숨기고 온 이유가 뭔가? 본가에 무슨 위험이라도 있는 건가?”
정광은 잠시 고민했다.
이 영리한 노인에게 사실을 말할지 말지.
고민은 짧았다.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뭐라 말씀드리기 그러네요.”
“그랬군. 확실해지면 꼭 말해주게나.”
“그 정도야 뭐. 그러죠.”
“고맙네.”
정광은 팽만소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런 사람은 흔치 않았기에.
‘무공을 잃기 전에는 한가락 했겠는데. 십존과 비견할 정도?’
그건 부차적인 것이고 시원시원한 게 마음에 들었다.
“한 번만 말하고 끝내셔서 좋네요.”
“두 번 말한다고 통할 상대가 아닌데 뭐 하러 힘을 빼겠는가.”
“와. 진짜 잘 아시네요. 뒷조사라도 하셨어요?”
무척 무례한 말이었지만 팽만소는 이번에도 무덤덤하게 받아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자네가 감숙성에서 성주에게 한 일을 들었거든. 무척 감탄했네.”
“어? 그것까지 아세요? 팽가가 관(官)과 가깝다더니 진짜였네요.”
팽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무림의 소문과 강휘를 비롯한 식솔들에게 들은 얘기, 관부의 사람들에게 들은 걸 합하면…… 자네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지. 하지만…….”
그의 시선이 잠깐 정광에게 향했다.
“그래도 모르겠어. 자네는 대체 누군가?”
“진옥룡요.”
“별호 말고 진짜 자네 말일세.”
“정광?”
“……괜한 걸 물었군. 자네는 자네인데 말일세.”
“도를 아시네요.”
팽만소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뒷방 늙은이가 무슨 도를 알겠는가.”
“그럼요?”
“내 평생 큰 자랑거리는 없으나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네. 단지 그것일 뿐이야.”
정광은 팽만소를 힐끔 봤다.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어야 할 정도로 다리를 심하게 저는 노인이건만.
아까부터 은은한 냄새가 풍겼다.
그것은 피 냄새.
아주 오래전의 것이지만 너무 많이 묻혔기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것이리라.
“전장에서 갈고 닦으신 거세요?”
“너무 쉽게 알아채는군. 자신을 좀 숨기는 게 좋을걸세.”
“그러고 있는데요.”
“허허. 또 괜한 소리를 했군. 여기 잠시 앉지.”
팽만소는 정광과 함께 작은 정자에 앉았다.
그는 사방에서 부산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들 녀석이 무림맹주가 됐다고 잔치를 크게 벌이려고 하네. 가문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아주 신이 났더군.”
“그럴 만도 하죠.”
“내 생각은 달라.”
그는 정광을 똑바로 바라봤다.
“본가에 있어 더 큰 복은 자네와 연을 맺은 걸세.”
“어?”
“왜 놀라는가?”
“안목이 있으시다더니 진짜 그러셔서요.”
정광의 뻔뻔한 말에도 팽만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이네만, 자네와 더 깊은 연을 맺고 싶네.”
“어떻게요?”
“수빈이를 제자로 받아주게나.”
“그건 안 되죠.”
너무나 빠른 거절이었지만 팽만소는 태연했다.
“그럴 것 같았네. 이유를 들을 수 있겠나?”
이유랄 게 있나.
전생에서도 제자 따위는 받지 않았는데 현생에서 받을 리가 없지 않은가.
굳이 말하자면…….
“……귀찮아서?”
“무공을 가르치는 게 귀찮다는 말이군.”
“그렇죠.”
팽만소는 정광의 눈을 보며 힘주어 말했다.
“수빈이는 가르칠 맛이 나는 아이일세.”
이건 정광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수빈패검의 초식과 구결을 암기하지 않았던가.
제대로 익히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대단한 오성(悟性)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든 되리라.
‘확실히 전생과 현생 통틀어서 몇 번 못 본 자질이지.’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팽만소가 은근히 물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잘됐군. 수빈이도 기뻐할 게야.”
팽만소가 빙그레 웃는데 정광이 초를 쳤다.
“그래도 안 되는데.”
“……또 왜?”
“저 도사예요. 곤륜파 도사. 본문은 속가제자는 물론 여도사도 안 받거든요.”
미리 생각해 놓은 듯 팽만소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그거야 내가 알아서 풀 수 있네. 장문진인을 직접 만나서라도 성사시킬 테니 걱정 말게나.”
순간, 정광의 눈이 빛났다.
곤륜에 상당한 성의 표시를 하겠다는 말 아닌가.
‘하긴. 방법이야 있긴 하지.’
하북팽가의 큰 어른이라고 곤륜의 일에 간섭할 수는 없다.
속가제자도 본산제자도 아니다.
팽수빈을 정광의 무기명제자(無記名弟子)로 들여앉히려는 것이다.
‘애는 괜찮긴 한데…….’
아니, 괜찮은 걸 넘어 훌륭했다.
정광의 기준으로도.
마침 나이도 어리겠다, 마음만 먹으면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인재였다.
‘가르치는 재미도 있을 테고.’
전생과 달리 현생의 정광은 그 재미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곤륜의 도사들은 물론이요, 그간 수많은 이를 가르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팽만소의 말처럼 팽수빈 정도의 인재는 그 재미가 더할 터.
정광의 마음이 살짝 움직였다.
‘한번 키워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그 기색을 눈치챈 걸까.
팽만소가 시기적절하게 입을 열었다.
“사제 관계란 무척 소중한 것이지. 강호의 명문정파들은 부자 관계보다 사제 관계를 더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가.”
다소 과장된 말이었으나 맞는 말이었다.
“그 이유가 뭐겠는가? 절대 배신하지 않는 관계라 그런 걸세. 영원히 자네의 편이 될 제자가 생기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죠.”
“…….”
잠시 침묵하던 팽만소가 말을 이었다.
“내 얘기를 좀 하지. 군(軍)에 몸담았던 시절, 전장에서 정말 많은 걸 겪었네. 크고 작은 배신이야 다반사였지.”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물론 눈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을 숫자로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까. 나 역시 나를 믿고 따르는 병졸들을 배신했어. 그들은 날 믿고 무리한 돌격을 했다가 죽어 나가기 일쑤였지. 나는 그리될 걸 알면서도 명령했던 게야.”
“…….”
“전장에서 황궁으로 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네.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무덤덤해지더군. 헌데…….”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담담하던 어조가 일그러졌다.
“단 한 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지. 정말 믿었던 이에게 배반당하고 나 역시 배반했거든.”
“…….”
“그 결과 이 꼴이 되었네. 다리도 제대로 못 쓰는 노인이 된 거야. 그런 나를 누가 구해줬는지 아나? 바로 내 아들 녀석일세. 문파로 치면 내 제자인 녀석이 나를 구한 뒤에 노후까지 챙겨주는 것이야.”
강호의 세가는 가문과 문파가 합쳐진 조직이었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떤가? 왜 제자가 필요한지 알겠지?”
“저는 그렇게 다칠 일 없는데요.”
“……자네가 늙었을 때 시중들 녀석 하나쯤 있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음. 그건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던 정광이 지나가듯 말했다.
“제자로 받아도 데리고 다니진 못하는데.”
“이해하네. 너무 어리지 않나. 되도록 자주 들러서 가르쳐 주게나.”
“되도록과 자주에 이상하게 힘을 실어서 말씀하시네요.”
“할애비 마음이란 게 다 그렇지.”
“흐음.”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던 정광이 물었다.
“팽 소저가 제 제자가 되고 싶어 할까요?”
“할애비가 손녀 마음을 모르겠는가?”
“장문 사숙조님을 만나실 거라 하셨죠?”
“그렇네.”
“그분이 돈을 좀 밝히세요. 많이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팽만소의 눈이 살짝 커졌다.
“……곤륜의 장문인이 그새 바뀌셨나?”
“아니요.”
“……운적 진인 맞으시지? 초탈하기로 명성 높으신 분 아닌가?”
“옛날얘기죠. 진인이라고 때가 안 탑니까? 저를 믿고 많이 준비하세요.”
항상 침착한 팽만소가 입을 떡 벌렸다.
사문의 장문인을 매도하면서까지 이렇게 뜯어내려고 하다니!
“……명불허전이군. 과연 진옥룡이야.”
“칭찬인가요?”
“……그렇네.”
“아, 그리고요.”
“……또?”
정광이 두 손을 모으며 미소 지었다.
“무량수불. 수업료는 어떻게 책정하실 거예요?”
“……!”
* * *
정광은 팽만소를 따라가며 물었다.
“어디 가는 거죠?”
“강휘 녀석이 하도 졸라서 자네에게 주려던 게 있네.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을 주려고 하네.”
얼마 안 가 그들은 고풍스러운 전각 앞에 도착했다.
상당한 숫자의 무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팽만소가 손짓하자 조용히 물러났다.
“들어가세나.”
“…….”
“뭐하는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정광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전생에서도 몇 번 느꼈던 것.
별 기대 없이 왔건만,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아뇨. 가시죠.”
정광은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을 둘러봤다.
갖가지 병장기는 물론 수많은 서책과 기물들이 있었는데 그 규모가 대단했다.
하지만 그를 이끌었던 것은 여기에 없었다.
“비밀 통로가 있나요?”
“정말 할 말이 없군. 이리로 오게.”
팽만소가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 중 하나를 잡아당기자 서가가 움직였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는데 벽에 박혀 있는 야명주들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 다리가 불편하니 자네가 수고를 좀…….”
정광은 이미 그를 들쳐업고 있었다.
“……고맙네.”
“뭘요.”
신법을 펼쳐 계단을 내려가자 녹슨 철문이 보였다.
정광의 등에서 내려온 팽만소가 철문 이곳저곳을 두드리자…….
쿠쿠쿠쿠-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철문이 열렸다.
새로운 방이 드러난 것이다.
그곳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오! 좋은데요.”
“천천히 골라보게나. 그 뒤에 내가 원래 주려던 것도 보여주겠네.”
“아뇨.”
“……무슨 의미인가?”
정광의 시선은 처음부터 한 곳에 꽂혀 있었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그를 부르던 그것에.
‘네놈은 무엇이기에 나를 그토록 애타게 불렀느냐.’
곧 알게 될 일.
정광의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바로 골라도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