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88화 (88/569)

88화

이상과 현실

팽수빈은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됐을 때부터 도를 좋아했다.

아비인 팽수관이 기겁할 정도로.

늦둥이이자 외동딸인 그녀를 끔찍이 아끼는 그가 어떻게 그 꼴을 보겠는가.

‘수빈아, 안 된다! 행여나 손이라도 베이면 어쩌려고!’

하지만 말릴 수 없었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팽수빈이 도를 잡고 쓰다듬었기에.

신기한 건 다칠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

도를 들 힘도 없으면서도 그러는 그녀를 보자 팽수관의 마음도 변했다.

‘좀 일찍 가르쳐 볼까.’

실제로 그렇게 했다.

팽수빈은 도와 함께 크게 됐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도에 더 빠져들었다.

그만큼 실력도 쑥쑥 늘었다.

자질이 있었고 노력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도객(刀客)이 되어갔고, 언젠가는 도(刀)의 극의를 보리라 희망했건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한 청년이 그녀의 모든 걸 부정해 버렸다.

‘……내가 무공과 안 맞는다고?’

나이에 안 맞게 항상 침착한 그녀였지만 이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혁련후요.”

“……하아아. 당장 취소하십시오.”

“진짠데.”

“…….”

팽수빈은 분노가 커지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침착해진 게 아니라 차가워진 것이다.

“무슨 근거로 제가 무공과 안 맞는다고 하는 겁니까?”

“아. 말을 너무 짧게 했었나?”

“……?”

“팽 소저는 팽가 무공과 안 맞는다는 말이었는데.”

“……!”

팽수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팽가주의 딸인 그녀가 팽가 무공에 안 맞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망발이란 말인가!

차갑게 벼려졌던 분노가 단단히 응축됐다.

* * *

본래 정광이 팽수빈의 자질을 논한 것은, 자오와 그녀의 대화가 너무 길고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팽수빈의 주의를 돌리려고 무공 얘기를 꺼냈건만…….

‘어라? 또 덤비려고?’

이렇게 차가운 기세를 풀풀 풍기며 달려들려고 할 줄이야.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구나.’

정광은 쉽게 설명하기로 했다.

그녀처럼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게.

“팽가 무공은 패력(覇力)과 연환(連環)이죠. 강한 힘으로 계속 몰아치는 거. 맞죠?”

팽수빈이 내공을 일으키려던 순간, 절묘하게 나온 말이었다.

그녀는 정광을 노려보며 무언으로 긍정했다.

“그런데 팽 소저는 그런 무공과 안 어울려요. 그래서 도가 자꾸 다른 길로 가려는 거죠.”

“……!”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질걸요. 그냥 보여주는 게 빠르겠네.”

정광은 어느새 팽수빈의 도를 쥐고 있었다.

그것을 본 팽수빈은 화들짝 놀라 자신의 빈손을 봤다.

그녀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어떻게!”

“운룡금나수(雲龍擒拿手)로 했는데요.”

정광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팽수빈은 경악한 와중에도 어이가 없었다.

누가 금나수 이름을 물었는가?

손에 쥐고 있던 도를 이렇게 쉽게 뺏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그녀의 의문과 상관없이 정광은 자신이 할 말만 했다.

“잘 봐요.”

정광의 손에 들린 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팽수빈이 펼쳤던 것과 한 치의 다름도 없이.

펼쳐질 땐 강맹하게, 이어질 땐 부드럽게 변하는 도식(刀式)이었다.

정광은 끝까지 펼친 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팽수빈에게 물었다.

“팽 소저가 펼쳤던 도식이죠?”

“……네, 네!”

“보세요. 이번엔 팽가식으로 펼쳐볼게요.”

정광의 도가 다시 움직였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내려치거나 벨 땐 세상이 갈라지는 듯했고, 초식에서 초식으로 이어질 때도 그 기세가 이어졌다.

비록 아까의 것보단 투박했으나 강맹한 도격이 끊이질 않는 도법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팽수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럴 수가! 정말 본가의 도법 같잖아!’

팽가 도법의 요결만 담겨 있는 게 아니었다.

‘강맹하면서도 우아해! 거칠면서도 멋있고!’

그녀의 아비인 팽수관이라면 저런 도법을 펼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었다.

그녀는 오라비인 팽강휘가 왜 그리 이 사내를 높이 봤는지, 연을 이으라 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경지를 추측할 수 없는 강자구나!’

정광을 인정하자 가슴속에 있던 분노가 사라지며 다른 감정들이 일어났다.

아직 어린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복잡한 마음이었다.

‘내가 본가의 무공과 안 맞는다니…….’

그 순간, 정광의 시범도 끝났다.

“받으세요.”

정광이 도를 내밀었으나 팽수빈은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오해한 정광이 혀를 찼다.

“이해 못 했어요?”

“…….”

“아. 괜히 시작했네. 그냥 자오와 얘기하게 둘걸.”

고개를 가로젓던 그는 내친김에 다 설명해 주기로 했다.

“팽 소저는 성정 자체가 강맹(强猛) 일변도(一邊倒)인 팽가 무공과 안 맞아요. 아니, 도법 자체가 안 맞지. 도의 장점이 강맹함과 몰아침인데 그게 안 맞으면 어떡해.”

“…….”

“그래서 자꾸 도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거죠. 팽 소저의 본능이 그렇게 시키니까.”

듣고 있던 팽수빈이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계속 본문의 도법을 익히면 어떻게 됩니까?”

“발전에 한계가 있겠죠.”

정광의 냉정한 말에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도의 극의를 보리라 다짐했는데, 아무리 익혀봐야 한계가 있다고?’

그녀의 복잡하게 얽혀 있던 마음이 힘없이 풀려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어? 지금 우는 거예요?”

팽수빈은 소매로 눈가를 닦은 뒤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눈물 맞는데?”

정광이 한 번 더 캐묻자 팽수빈의 눈에서 멈췄던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리 조숙하다 해도 아직은 어린아이다. 어떻게 또 참겠는가.

정광이 또 뭐라 말하려 하자 참다못한 백승무가 분연히 나섰다.

“사형! 그만 좀 하십시오! 아직 어린 소저에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뭐?”

“후우우. 됐습니다. 제가 사형께 뭘 바라겠습니까.”

“아, 진짜 황당하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자오, 안 그래요?”

정광이 억울해하며 항변했건만.

믿었던 자오조차 그를 비난했다.

“이번만큼은 혁련 공자께서 심하셨습니다. 실수하셨다고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뭘 실수했는데요?”

이 물음이야말로 정광의 진정한 실수였다.

자오는 빠르고 장황하게 그 이유를 떠들었다.

조용히 울고 있던 팽수빈조차 어이가 없어 눈물을 멈출 정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정광이 한순간 사라졌다.

딱!

“어억!”

“크윽!”

소리는 하나였지만 백승무와 자오는 동시에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사, 사형. 대체 왜?”

“혁련 공자.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눈물을 찔끔거리며 묻던 그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형?”

“혀, 혁련 공자?”

정광뿐만이 아니었다.

방 안을 둘러보던 백승무와 자오는 팽수빈도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함께 사라진 게 하나 더 있었으니.

팽강휘가 정광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했던 검이었다.

* * *

정광은 빠르게 끝내기로 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뭐 해요? 받아요.”

팽강휘의 검을 내밀며 말했지만 팽수빈은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연무장에 서 있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어, 어떻게 여기에…….”

“운해비영(雲海飛影)을 펼쳤죠.”

“시, 신법 이름을 물은 게 아니라 어떻게 이런…….”

“그보다 팽 소저에게 맞는 걸 배우고 싶으면 빨리 받으세요.”

팽수빈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검을 받았다.

‘맞는 걸 배우고 싶으면’이라는 말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보기보다 무겁구나.’

그래도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걸까.

꽤 무거운 검이었으나 능히 들 수 있었다.

헌데 정광이 검을 쥔 그녀의 손을 보며 손가락을 흔드는 것 아닌가.

“한 손이 아니라 두 손으로 잡으셔야죠.”

“……검은 보통 한 손으로 잡지 않습니까?”

중원의 검술은 쾌(快)와 변(變)을 중시했다. 그래서 한 손으로 펼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그녀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광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팽 소저한테는 두 손으로 쓰는 검법이 맞거든요.”

“……?”

“시간 별로 없는데.”

팽수빈은 이해가 안 갔지만 정광의 말에 따랐다.

도가 됐든 검이 됐든 쥐는 방식은 대동소이한 법.

그녀는 기초가 튼튼한 명가의 여식답게 제대로 된 파지법(把指法)으로 검을 쥐었다.

정광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리셔서 딱 맞네.”

본디 한 손으로 쓰는 걸 상정한 검이라 검파(劍把)가 길진 않았지만, 그녀의 작은 두 손을 감당하기엔 충분했다.

“그럼 나도.”

정광은 그녀의 정면에 서서 운룡을 뽑았다.

운룡의 검파는 정광의 두 손을 너끈히 감당할 만큼 길었다.

가끔 이렇게 쓸 상황을 대비해서 주문했고, 그에 맞춰 만들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검법만 만들면 되는데…….

‘팽가의 패력에 곤륜의 유려함을 섞으면 꽤 괜찮게 나오겠지.’

정광의 머릿속에서 그간 견식했던 팽가의 도법과 곤륜 무공이 합쳐졌다.

이끌리는 것들은 모으고 밀어내는 것들은 버리니, 얼마 안 가 제법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 다듬으면 되는데.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었다.

“목표가 뭐였어요?”

“……네?”

“어느 수준까지 올라서 뭘 하고 싶었냐고요.”

팽수빈의 눈이 찰랑거리다가 가라앉았다.

“……도의 극의를 보고 싶었습니다.”

“와. 높네.”

“…….”

“검의 극의를 보는 거로 바꾸죠.”

“……!”

“힘든 일이니까 기초만 잡아줄게요.”

정광은 머릿속에 떠올라 있던 형태를 다듬었다.

어디 하나 모난 것 없이 세심하게.

극의를 보려면 한쪽에 치우쳐선 안 되는 법, 패력을 중심으로 균형 잡힌 검법이 태어났다.

그리고 정광의 손에서 펼쳐졌다.

강한 일격을 부드러움 속에 섞어서 펼치는 검법이었다.

“아!”

팽수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무공이 있을 줄이야!

검붉은 운룡이 황금빛을 흘리며 허공을 노닐고 있었다.

* * *

정광은 초식은 물론 그에 따른 내공 구결까지 알려줬다.

팽수빈은 홀린 것처럼 그것들을 익혔는데 그 자질이 대단했다.

최소한 암기는 한 것이다.

정광이 칭찬했다.

“보기보다 똑똑하네요.”

“……감사합니다.”

팽수빈은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에 침울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왜요?”

“……도에 자질이 없는데, 검이라고 있을까 해서…….”

“검에는 자질이 있어요.”

“…….”

팽수빈의 얼굴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정광은 그제야 그녀의 마음을 알아챘다.

“아. 하고 싶은 것과 자질이 있는 것이 달라서 그러시는구나.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죠. 이해해요.”

팽수빈의 눈이 조금 커졌다.

“혁련 공자도 그러셨습니까?”

“다른 병기가 좋은데 검에 자질이 있어서 검법을 배웠냐고요?”

“네.”

“아뇨.”

“……그러면……?”

“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는데 다 잘해요.”

“…….”

팽수빈이 어이없어하자 정광이 싱긋 웃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팽 소저는 아직 어리잖아요.”

“……혁련 공자께서는 제 연배에 무엇을 익히고 계셨습니까?”

“몇 살인데요?”

“여덟입니다.”

“흐음. 그때는 상청무상신공(上淸無上神功)을 익히고 있었죠.”

“……상청무상신공?”

“본문의 장로님들이 익히시는 내공심법이요.”

“……!”

팽수빈은 정말 경악했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이가 어려 견문이 좁다 보니 곤륜의 무공이란 건 알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래도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신공 같은데 장로들이나 익히는 무공을 여덟 살에?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광을 직접 경험했기에.

‘정말 사람이 아니구나…….’

이런 불가사의한 존재가 검법을 알려주다니.

팽수빈은 손에 쥔 검을 보며 정광이 전해준 것을 떠올렸다.

도에 미쳐 있던 그녀를 한순간에 사로잡은 검법이었다.

‘도를 버리고 이걸 익혀야 할까?’

평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을 버리는 게 쉬울 리가 있나.

그녀가 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담담하지만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극의는 서로 통해요.”

“……?”

“검으로 극의에 오르면 도의 극의도 깨칠 수 있다는 말이죠.”

“……!”

격동하는 팽수빈과 달리 정광은 다른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근데 검법 이름을 뭐로 하지?”

“……설마 지금 만드신 겁니까?”

“네. 원하는 이름 있어요?”

팽수빈은 더 놀랄 힘도 없었다.

“은공의 뜻대로 부탁드립니다.”

“은공은 무슨.”

정색한 팽수빈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 평생 갚아도 모자라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갚겠습니다.”

“아. 그건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힘내세요.”

정광은 팽수빈을 응원한 뒤 중얼거렸다.

“뭐가 좋으려나. 팽가니까 패검(覇劍) 정도는 넣어야 할 테고.”

“…….”

“수빈패검 어때요?”

팽수빈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서렸다.

“제 이름을 넣어주시다니…….”

“마음에 드시는구나. 이제 뜻이 문제인데. 이름 뜻이 어떻게 되죠?”

“빼어날 수(秀)에 빛날 빈(彬)입니다.”

“빼어나게 빛난다?

“그렇습니다.”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 맞네. 빼어나게 빛나는 패검. 사제는 어떻게 생각해?”

연무장 문 뒤에 숨어 있던 백승무가 머쓱하게 웃었다.

“사형답지 않게…… 사형답게 아주 제대로 된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자오는요?”

공간이 갈라지며 자오가 내려섰다.

“훌륭한 이름입니다. 팽 소저의 성정과 자질, 혁련 공자의 경천동지할 무공이 하나로 이루어져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정광이 자오의 뒤통수를 한 번 더 때릴까 고민하는데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혁련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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