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역시 안 되겠네
팽강휘는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 자신만만하게 내민 검이었건만, 이게 대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신비할 정도로 검붉은빛을 내는 운룡!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철혈장주가 직접 만든 검이라고? 그것도 스물한 근 열…… 어쨌든 그렇게 많은 현철을 써서?’
정광은 쓸데없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 이였다. 실제로 검을 봐도 엄청난 명검임이 틀림없었고.
굳이 흠을 잡자면…….
“……보시오. 내가 드리려던 이 검의 우아한 빛깔을. 그대의 검은 검붉은빛이 나는 게 좀 불길하지 않소?”
정광은 말없이 내공을 일으켰다.
화아아악-
운룡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솟구쳤고 팽강휘는 입을 떡 벌렸다.
‘어, 어떻게 검에서 황금빛이!’
우아함이 어쩌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않은가!
팽강휘는 백기를 들었다.
“졌소이다. 다른 걸 드리겠소.”
“어떤 거요?”
“으음. 우리 사이에 재물은 좀 아니고…….”
“괜찮은데.”
“……잘 못 들었소이다?”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멍하니 정광을 보던 팽강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농이 많이 늘었구려. 으음. 뭐가 좋을까…….”
정광은 그냥 돈으로 달라고 하려다 지켜보기로 했다.
혹시 아는가.
뭔가 좋은 게 나올지.
‘뭐 없으면 그냥 재물로 받고.’
한편, 팽강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정광에게 줄 만한 것이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아서였다.
‘진옥룡이다. 그가 만족할 만한 게 본가에 있기는 한가?’
칠대세가의 일원이요, 하북성의 대토호(大土豪)인 팽가로서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가문의 비전 무공을 줄 수도 없고…….’
아니, 정광은 구파일방 중 하나인 곤륜의 제자다. 게다가 측량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무인. 줄 수 있다고 해도 좋아할 리는 없을 터.
병기 또한 마찬가지.
운룡 같은 신검(神劍)을 가진 이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허어. 본가가 이렇게 작게 느껴지다니…….’
설령 정광에게 걸맞는 것이 있다 해도 문제였다.
팽강휘의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가주인 아비가 자리를 비운 지금, 가문의 결정권을 갖고 있는 이에게 말해야 했다.
다행히 명분은 있었다.
‘진옥룡이 본가에 오면 반드시 잡아두라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었지.’
팽강휘는 결정을 내렸다.
“진옥룡,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잠시 나갔다 오겠소.”
“아. 당분간 그 별호 말고 혁련후라고 불러주실래요.”
“아! 그게 속명(俗名)이었소?”
정광은 고아인데 속명 따위가 있을 리가 있나.
그렇다고 전생의 이름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정광은 대충 때웠다.
“비슷하죠.”
“허어. 처음 알았소이다.”
팽강휘는 혁련후라는 이름을 되뇌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다녀오리다.”
“팽 공자 누이는요?”
“아.”
팽강휘는 팽수빈의 몸에 손을 댔다.
그리고 내공을 밀어 넣자 그녀가 눈을 떴다.
“……오라버니?”
“그래. 수빈아, 괜찮느냐.”
보통 소녀라면 울음부터 터뜨렸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바로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운기행공을 했다.
그렇게 몸 상태를 점검한 그녀가 눈을 떴다.
“네. 괜찮습니다.”
“하하. 다행이구나.”
팽강휘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데 그녀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바로 정광 일행이었다.
‘……적은 아니었구나.’
그녀와 오라비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걸 보면 틀림없으리라.
그러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저분들은 누구십니까?”
“음? 내 친우 혁련 공자와 그 친우분들이시다.”
여기까지는 팽수빈도 아는 얘기였다.
그녀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혁련 공자 홀로 오라버니와 비무를 해서 이겼다던데 사실입니까?”
“하하. 그렇다.”
“……!”
팽수빈의 큰 눈이 더 커졌다.
팽강휘는 허리를 숙여 어린 누이와 눈을 맞췄다.
“왜 그러느냐? 이 오라비가 무적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냐?”
“……그건 아니지만…….”
팽강휘의 입에서 따뜻하지만 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전에 정광이라는 도사에 대해 얘기했었지?”
“……네.”
“그에게 패하고 내가 무엇을 깨달았다고 했느냐?”
“……위에는 위가 있다…….”
“그래. 그리고?”
팽수빈의 눈이 빛났다.
아까처럼 놀라고 실망한 빛이 아닌, 굳은 의지로 가득 찬 눈이었다.
“패하면 또 위로 올라가면 된다 입니다.”
“그렇지.”
팽강휘의 눈동자도 뜨겁게 일렁였다.
그가 허리를 펴자 태산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목소리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올라갔다. 그리고 오늘도 패했지만, 반드시 또 올라갈 것이다.”
“……오라버니…….”
남매는 의지로 가득 찬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정광은 그들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정파 애들이란. 무슨 말이 이렇게 번드르르해.’
그래서 잘랐다.
“팽 소협. 뭔진 모르지만 빨리 주시겠어요?”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던 팽강휘가 멈칫했다.
그는 팽수빈을 흘깃 보며 전음을 보냈다.
-혁련 공자는 대단한 사람이다. 네게도 연이 닿았으면 좋겠구나.
팽수빈은 아직 무공이 낮아 전음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의미냐고 되물어볼 순 없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직접 연을 만들어보라는 말씀이신가.’
직설적인 팽강휘가 이렇게 돌려서 말했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 성공하기 힘든 일이라는 의미인데.’
그녀의 눈이 빛났다.
어려운 일일수록 더 해내고 싶어 하는 게 그녀였기에.
팽강휘는 누이의 승부욕을 자극할 줄 아는 오라비였다.
팽강휘가 나가자 그녀는 정광을 바라봤다.
그는 탁자 앞에 앉아 술병을 흔들어보고 있었다.
“꽤 남았네. 사제, 자오. 앉아요. 마저 마시죠.”
“네, 사형.”
“알겠습니다, 진…… 혁련 공자.”
세 사내가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계속 정광을 살펴보던 팽수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저 성격 나빠 보이는…… 아니, 실제로도 괴팍한 청년에게 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아서였다.
‘제대로 대화라도 해봐야 연을 만들 수 있을 텐데…….’
다행히 정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술을 가득 따른 술잔을 내밀며.
“그쪽도 한잔할래요?”
“사형! 아직 어린 소저한테 어떻게 술을…….”
“난 더 일찍 마셨는데?”
“그거야 사형이시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정광의 천인공노할 말에 백승무가 말리려 했으나.
팽수빈은 쾌도(快刀)를 익힌 만큼 손도 빨랐다.
“감사합니다!”
어느새 술잔을 낚아챈 그녀는 그대로 들이켰다.
나이가 어려 술을 마셔본 적은 없지만, 어떻게든 연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취한 행동이었다.
정광이 그녀를 칭찬했다.
“호쾌하시네.”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억지로 참던 그녀는 빨리 대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식도와 위장에서 느껴지는 열기 때문에 다른 소리를 내버렸다.
“히끅!”
* * *
정광은 좀 전의 일을 후회했다.
딱 한 잔에 취해 버린 팽수빈이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꽤 어른스럽긴 한데…….’
말이 많아졌다.
“어느 문파 소속이신가요?”
“말투를 들어보니 중원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실례지만 연세가……?”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게 많은지.
대충 대답해 줬다.
그런데 또 웃기는 게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외우는 것 아닌가.
‘한번 물었던 건 더 캐묻지 않는군. 제법 똑똑한데.’
취한 와중에도 호감을 살 줄 아는 아이다.
일부러 그러려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런 부분은 아비에게 물려받은 것일 터.
정광은 무림맹주를 떠올렸다.
‘자식 농사는 잘 지었네. 첫째 놈만 빼고.’
둘째인 팽강휘는 오만하고 급한 성정이었으나 가슴의 기혈이 막혀서 그렇게 됐던 것.
그걸 뚫어주자 자신감 넘치고 화통한 성격으로 변했다.
자질도 괜찮고 노력도 할 줄 아니 제법 괜찮은 무인으로 자라리라.
‘그런데 이 꼬마는 더 낫단 말이야.’
자질, 성품, 의지까지 크게 뛰어난 건 없지만 뭐 하나 모자란 게 없다.
굳이 따지자면 술이 약하다는 것?
‘몸에 안 맞는 옷을 걸치고 있는 건 큰 문제지만.’
어차피 팽가가 알아서 해야 할 일, 정광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팽수빈의 말이 또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자오와 말을 섞은 것이다.
“자오 대협은 어떤 문파에 계신가요?”
“대협이라니요. 그냥 자오라고 불러주십시오. 제 소속을 말씀드리긴 곤란하고, 대신 다른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자오는 물 만난 고기마냥 현란하게 입을 놀렸다.
그의 입담은 제법이었는데 그 내용도 팽수빈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었다.
바로 강호의 얘기!
첩보, 암습 같은 자신의 경험담을 적절히 윤색한 것들이었는데, 강호를 동경하는 어린 소녀에게는 놀라운 내용뿐이었다.
“저, 정말 그런 일들이 있나요?”
“물론이지요. 이것도 무척 경감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제대로 얘기하자면 사실은…….”
정광은 자오를 날려 버릴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말이 많다고 애써 키우려던 인재를 두들겨 팰 수는 없지 않은가.
전생의 정광이었다면 패는 정도가 아니라 더한 짓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광은 차라리 쉬운 길을 택했다.
“저기요, 팽 소저.”
그녀는 자오가 푸는 이야기보따리에 넋이 빠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네, 혁련 공자님.”
“술 깼죠?”
“……아!”
정말 그랬다.
자오가 얼마나 말이 많고 빨랐는지, 집중해서 듣다 보니 어느새 술이 깬 것이다.
정광은 눈짓으로 그녀가 허리에 차고 있는 도를 가리켰다.
“뽑아보세요.”
“……네? 왜 그러십니까?”
“도법을 펼칠 때 도가 멋대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나요?”
“그, 그걸 어떻게!”
경악하던 그녀는 기절하기 전에 정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호오. 도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 하네. 늦기 전에 고쳐야 할 텐데.’
그녀는 깨달았다.
그게 빈말이 아니었음을.
동시에 오라비의 당부도 떠올랐다.
‘연을 만들라 하셨지.’
팽수빈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도를 뽑았다.
그리고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의 기수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위에서 아래로 베어보세요. 힘껏.”
“……네? 그러려면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이 방도 충분히 넓으니까.”
팽수빈은 눈동자만 굴려서 방 안을 둘러봤다.
가주의 둘째 아들인 팽강휘의 방답게 넓었으나 도법을 펼치기엔 너무 좁아 보였다.
‘그래도 해야 해.’
팽수빈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 올렸다.
얼마 안 되지만 정순한 내공이 그녀의 몸을 휘돌아 도에 담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여 허공을 베었다.
쉬익-
방 안을 울리는 날카로운 파공음!
천장을 향해 있던 도가 바닥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정광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이번엔 좌에서 우로요. 역시 힘껏.”
“……네.”
팽수빈은 정광의 말에 충실히 따랐다.
좌에서 우는 물론, 우에서 좌, 좌상단에서 우하단, 우하단에서 우상단 등 수많은 칼질이 계속됐다.
하나하나 위력 있게.
그걸 모두 보고 있던 정광이 복잡한 주문을 했다.
“좋네요. 지금까지 한 거 다 순서대로 해보실래요. 쭉 이어서.”
“……네!”
팽수빈은 정광이 자신을 시험해 보는 거라 짐작했다.
‘할 수 있어.’
꽤 많은 동작이었지만 모조리 기억할 수 있었다.
각각 독립된 동작들을 부드럽게 잇는 게 문제였으나 그녀의 오성(悟性)은 보통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도가 움직였다.
하나하나 위력 있게 펼쳤던 초식들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이어서 펼치다 보니 위력은 약해졌으나 더 정교한 맛이 더해진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반쯤 지켜보던 정광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겠네.”
“……!”
그 순간 팽수빈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는 의문에 찬 눈빛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뭐가 안 된다는 거죠?”
정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는 말에 팽수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팽 소저는 무공과 안 맞는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