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오래전 약조
명문 중의 명문 하북팽가.
그곳에서 가주의 늦둥이 외동딸로 태어난 팽수빈은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워졌다.
오냐오냐하며 키워졌으니 버릇없는 성품으로 자랄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올해로 여덟 살이 된 그녀는 이미 훌륭한 도객(刀客)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 때문에 무공 수위는 낮았으나, 도를 대하는 자세와 무공을 향한 열망만큼은 확실히 그랬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리도 소란스러워서야…….’
세가의 사람들은 무척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공 수련이 아니라 잔치 준비 때문에.
역사상 처음으로 무림맹주를 배출한 팽가였다. 그 위업에 걸맞는 잔치를 열려는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나는 내 일에 집중하면 돼.’
그녀는 잡념을 지우고 나이에 맞는 작은 도를 휘둘렀다.
강한 기세를 담은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가 아기자기하게 펼쳐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눈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이상하네? 왜 이러지?’
초식대로 펼치는데 도가 조금씩 멋대로 움직이려 하는 것 아닌가.
그녀를 유난히 챙겨주는 둘째 오라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느낌이 들면 멈추라고 하셨지.’
팽수빈은 즉시 도를 거뒀다.
둘째 오라비인 팽강휘를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가서 여쭤봐야 해.’
그녀는 팽강휘의 방으로 달음박질쳤다.
얼마 안 가 도착한 그녀는 활짝 열린 방문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빈 그릇과 술병이 가득한 탁자만 있을 뿐 아무도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팽강휘가 어디에 있을지는 뻔했다.
그녀는 뒤에 있는 개인 연무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감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팽강휘가 보였다.
그 옆에는 세 명의 사내가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전부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누구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성깔 있어 보이는 미청년이 대답했다.
“손님요.”
“……오라버니는 왜…… 아!”
팽수빈의 눈이 커졌다.
팽강휘의 왼쪽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있는 것 아닌가!
“오라버니!”
그녀는 다급히 외치며 팽강휘를 흔들었다.
그러나 팽강휘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숨소리가 고르다는 것.
기절한 것이리라.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미청년을 노려봤다.
“당신이 이랬나요?”
“네.”
“감히 암습을!”
“정당한 비무였는데.”
팽수빈은 믿지 않았다.
그녀의 오라비는 그 유명한 구룡사봉 중 패룡!
이렇게 젊은 청년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팽강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때문에 그가 비무에서 패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 하는 팽수빈이었다.
‘세 명이 합공을 했겠지.’
합공이었다 해도 팽강휘를 쓰러뜨린 자들이었다.
미청년, 멍청해 보이는 청년, 평범한 중년인이 갑자기 크게 보였다.
‘그렇다면?’
아직 어린 그녀가 이길 수 없는 상대들인 건 당연한 일.
그렇다고 도망갈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대신 재빨리 자세를 낮추며 작은 도를 뽑았다.
촤앙-
그녀는 도신을 세워서 전면을 방어하며 크게 외쳤다.
“적이 침입했습니다!”
“…….”
“빨리 와주세요!”
“…….”
몇 번이나 연이어 소리치던 그녀는 황당함을 느꼈다.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지?’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미청년의 말에 의해.
“계속 소리 차단하기 귀찮으니까 그만 좀 해요.”
“……!”
팽수빈의 작은 입이 크게 벌어졌다.
‘소리를 차단했다고? 내공으로?’
미청년의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봐야 약관 정도.
그 나이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거늘 대체 무슨 소리를!
‘사술(邪術)이구나!’
그녀는 보법을 펼쳐 팽강휘의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 내공을 끌어 올려 앙칼진 기운을 뿜어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라비만큼은 지켜내겠다는 기세!
미청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을 막는 겁니다.”
“오오. 겁 안 나요?”
“…….”
팽수빈이 아무리 담대하다 해도 아직은 어린아이.
똘똘한 눈에 두려운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려운 빛은 의지로 뭉쳐져 날카로운 기세를 쏘아냈다.
“나를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그런 적 없는데.”
미청년이 씩 웃었다.
“오히려 꽤 높게 보고 있어요.”
* * *
고슴도치처럼 작은 가시를 세워 투지를 불태우는 어린아이라…….
정광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래, 무인이면 이 정도는 돼야지.’
어린 나이라 잘못된 상황 판단으로 오해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무인이라면 나이를 막론하고 이 정도 투지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하북팽가는 이게 마음에 든단 말이야.”
“……무슨 뜻입니까?”
수틀리면 칼부터 뽑는 점이라고 말하려던 정광은 조금 순화해서 말해줬다.
“말로만 패기를 숭상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실천하는 게 좋다고요.”
어린 소녀는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이려다가 흠칫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하하하.”
정광은 크게 웃었다.
도신 뒤에 몸을 숨긴 채 입으로만 감사를 표하는 모습이라니.
그러면서도 투기를 더 키우고 있다.
방심하다가 쓰러진 제 오라비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좋아, 아주 좋아.’
자질도 있고 예의도 있다.
사실 예의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지만 있어도 나쁠 건 없을 터.
정광은 눈앞의 소녀에게 작은 호기심이 생겼다.
“이름이 뭐예요?”
“……팽수빈이라 합니다. 당신은?”
“나는…….”
도호를 말하려던 정광은 멈칫했다.
사마련이 팽가에서 일을 꾸밀 것 같아 정체를 숨기고 있었기에.
그 모습이 더 수상해 보인 걸까?
팽수빈이 날카롭게 힐난했다.
“이름도 안 밝히다니. 당신 가문에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나 고아인데.”
“……사과드리지요. 모욕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도를 겨누면서 미안해하는 모습이라니.
“하하하.”
유쾌하게 웃은 정광은 쓸 만한 가명을 생각해 봤다.
‘뭐가 좋을까?’
갓난아이 때부터 정광이란 도호로 불린 그였다.
이름을 생각하자 막상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생각해낸 건…….
전생의 이름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본명보다 진천마라는 별호로 불렸기에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이름.
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더더욱 아는 이가 없으리라.
정광의 입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혁련후. 그게 내 이름이에요.”
“……혁련후…….”
세 글자를 되뇌던 팽수빈은 도를 고쳐잡았다.
“견문이 짧아 알지 못해 미안해요.”
“뭘요.”
“물러날 생각은 없는 건가요?”
“전혀.”
정광의 담담한 대답에 팽수빈의 눈빛이 더욱 단단해졌다.
지금까지 예의를 지킨 건 정광이 먼저 존칭을 써서였을 뿐이라는 듯, 그녀에게서 나오던 투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럼 오십시오!”
“네.”
정광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편히 보내줘야겠군.’
주먹에서 뿌드득 하고 소리가 나자 백승무가 기겁하여 외쳤다.
“사형!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응?
그게 뭐?
전생에 진천마였던 시절, 그에게 덤볐던 자들 중엔 어린아이도 많았다.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다가 비수로 찌르던가, 울며 불쌍한 척하다가 독을 뿌리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정광은 그런 아이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 편하게 보내주려는 것만 해도 크게 마음을 쓴 것인데…….
‘……잠깐. 그건 전생 때잖아.’
곤륜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도사 때가 탄 정광이었다.
게다가 이 아이는 암습을 해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현생에선 아이가 덤빈 적이 없어서 착각했네.’
정광이 주먹에 쥔 힘을 풀자 백승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제. 잘했어.”
“후우우.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광은 백승무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팽수빈을 타일렀다.
“칼 넣으세요. 그러다 다쳐요.”
“……당신이 본가에서 떠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와. 진짜 괜찮네.”
팽수빈을 가만히 뜯어보던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골도 괜찮고 내공도 나이에 비하면 나쁘지 않고…….”
“……본 것만으로 그런 걸 어떻게 압니까?”
“나니까요.”
팽수빈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광오하시군요.”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던 정광은 백승무에게 물었다.
“사제도 그렇게 생각해?”
“뭐 항상 그러셔서…….”
“자오는요?”
“광오하다니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본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그만요. 나중에 듣죠.”
자오를 제지한 정광은 팽수빈을 보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한번 보죠. 오세요.”
“……이런 무례한!”
“기수식인데.”
“……지금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흐음. 그냥 내가 가는 게 낫겠네.”
정광이 주먹을 뻗었다.
그 주먹에는 소름 끼치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팽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겁먹으면 안 돼!’
바로 다시 눈을 뜨며 도를 내려찍었다.
정광의 주먹을 양단해 버릴 기세로.
팅!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신의 공력을 담은 일격이었건만.
손가락질 한 번에 튕겨 나가다니!
‘말도 안 돼!’
더 놀라운 건…….
“호오. 도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 하네. 늦기 전에 고쳐야 할 텐데.”
“……!”
그녀가 고민하던 것을 정확히 짚는 말이었다.
‘겨우 일초를 펼쳤을 뿐인데 어떻게?’
경악할 겨를도 없었다.
정광의 손가락이 그녀의 이마를 찔러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 안 졌어!’
과감하게 도를 놨다.
자유로워진 손을 수도로 만들어서 손가락을 벤다.
하지만 기묘하게 움직인 손가락이 재차 이마를 향해 다가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는 고개를 숙여서 피한 뒤, 머리로 정광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동시에 그녀의 귀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하하. 귀여워라.”
……뭐?
그 의문이 마지막 생각이었으니.
딱!
그녀는 오라비처럼 정신을 잃었다.
* * *
한 명이 정신을 잃으면 다른 이가 정신을 차리는 걸까.
팽강휘가 눈을 떴다.
“크윽. 또 이렇게 돼버리다니.”
고개를 세차게 몇 번 흔든 그는 옆에 누워 있는 팽수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빈아!”
“그냥 두세요.”
“아!”
시선을 돌리자 정광이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덤비길래 상대해 줬죠.”
“헉! 설마!”
팽강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정광이 어이없어했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냥 이마에 손가락 한 번 튕겼을 뿐인데.”
다급히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팽수빈의 이마에는 작은 혹이 볼록 솟아 있었다.
“후우우. 다행이군. 고맙소이다.”
다른 이였다면 ‘내 귀여운 동생을 이리 만들다니!’ 하면서 날뛸 판이었지만 팽강휘는 달랐다.
왜?
정광이었으니까.
그의 손속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가볍게 어루만진 수준 아닌가.
팽강휘가 동생을 깨우려는데 정광이 물었다.
“그런데 언제 줄 거예요?”
“음? 무엇을 말이오?”
정광은 정말 황당했다.
무엇?
무어엇?
‘아니, 내가 여기까지 왜 왔는데.’
이렇게 머리가 나쁠 수 있나.
정광은 팽강휘의 기억을 일깨웠다.
“팽가에 꼭 와달라고 했었잖아요. 선물 주겠다고 약조해 놓고는.”
“아!”
“아?”
“당연히 기억하고 있소.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을 뿐이외다.”
머쓱하게 웃은 팽강휘는 팽수빈을 안고 일어섰다.
“방으로 갑시다. 그곳에 있소.”
정광은 그를 따라 방으로 갔다.
은근한 기대감을 품고.
그리고 팽강휘가 큰 상자를 열어서 그것을 꺼내자.
어이가 없어 눈만 끔뻑거렸다.
“왜 그러시오?”
“……설마 그거예요?”
“그렇소이다.”
팽강휘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손에 든 검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과거의 추억을 담아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래전, 곤륜에서 그대와 헤어진 후 무엇이 좋을지 고민했소. 결론은 검이더군. 곤륜하면 역시 검이니까.”
“…….”
“하하. 사실 돈이 꽤 들었소이다. 읏차.”
스르릉-
그가 검집에서 검을 뽑자 냉랭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어떻소? 그 유명한 철혈장의 명장이 만든 검이외다. 그대의 검도 명검으로 보이나 이것에 비하지는 못할 것이오.”
“내 건 장주가 만들었는데.”
“하하. 놀라셨소? 한 번 보시…… 잠깐, 지금 뭐라 하셨소?”
“그거 기성품이죠? 이건 주문 제작한 거예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정광은 한숨을 내쉬며 운룡을 뽑았다.
소리도 없이 세상에 나온 운룡은 서릿발 같은 기세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헉! 그, 그것은!”
“장주가 직접 만들었다니까요.”
경악하던 팽강휘가 애처롭게 항변했다.
“그, 그래도 내 것은 현철이 한 냥이나 섞였소이다!”
“사제 것은 두 냥인데. 사제, 그거 꺼내봐.”
“네, 사형.”
스르르르릉-
은은한 검은빛의 예기를 발하는 흑우를 보자 팽강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승무는 애써 담담한 얼굴로 설명했다.
“저의 벗, 흑우라 합니다. 이 녀석도 주문 제작한 것이지요.”
“…….”
“철혈장의 소. 장. 주. 께서 직. 접. 만드셨습니다.”
“……!”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으니.
정광이 덧붙였다.
“내 것은 전부 현철이고요.”
“……전부?”
“네. 스물한 근 열네 냥 전부.”
“크허헉!”
팽강휘는 피를 토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정광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괜히 왔네, 진짜. 그냥 갈까.”
“……!”
팽강휘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오기로 뭉친 빛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