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패룡(覇龍)
하북성 영청현(永清縣)에 위치한 하북팽가.
가주 팽수관의 둘째 아들인 팽강휘는 운공을 마친 뒤 빙그레 웃었다.
‘지난 몇 년간 부단히 노력한 게 헛되지 않았구나.’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이 제법 경지에 이르렀다.
이립(而立)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건만 대단한 성취였다.
‘아차. 자만해선 안 되지.’
팽강휘는 고개를 저어 웃음을 털어냈다.
아직 멀었기에, 이 정도에 만족하면 안 돼서였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본가에 올까?’
아비에게서 서신이 온 지 오래였다.
그가 무림맹에서 도망갔다고.
본가로 갈지도 모르니 보게 되면 반드시 잡으라고.
팽강휘는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웃었다.
‘내가? 무슨 수로?’
그는 구름 속의 신룡 같은 존재이거늘.
팽강휘가 아무리 강해졌다곤 하나 그를 구속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님과 형님의 서신을 보면 그간 더 강해진 것 같은데…….’
과거에도 그 경지를 짐작할 수 없는 이였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더더욱 그러하리라.
‘와줬으면 좋겠구나.’
그러면 그간의 성취를 그에게 선보일 수 있을 터.
늘어난 무공은 물론 넓어진 마음 까지.
그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었다.
‘일단 기다려 볼 수밖에.’
잡념을 털어내고 일어서려는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저 강현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냐?”
“형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어서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설마?
팽강휘는 다급히 물었다.
“천하제일미남이더냐?”
“네? 미, 미남은 맞긴 하나 그 정도까지는…….”
팽강휘는 내심 탄식했다.
‘그가 아니군.’
하긴.
이렇게 맞아떨어질 리가 있나.
피식 웃은 팽강휘는 아쉬움을 억누르고 다시 물었다.
“누구라 하더냐?”
“그게…… 이름을 밝히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내쫓기엔 행색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형님께 이렇게 전해달라더군요.”
“……?”
팽강휘가 의아해하자 팽강현은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십성까지 천천히 끌어 올렸던 기억나죠? 딱. 딱. 딱.”
“……!”
팽강휘의 눈이 커졌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딱!
‘억! 뭐, 뭐 하는 건가?’
‘잘 들어요. 지금부터 십성까지 천천히 올리셔야 해요.’
‘머리는 왜…….’
‘필요하니까 그러죠. 숨 열 번 쉴 때마다 일성씩. 알았죠?’
‘으윽.’
‘아프다고 쫄지 말고 뚫어버려!’
그리고.
오랫동안 손상되어 막히고 끊기던 기혈을 허물어뜨리듯이 뚫어버렸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나 버린 곤륜산에서의 기억…….
팽강휘는 벌떡 일어섰다.
“그는 어디 있느냐?”
“정문 앞에…….”
“어서 모셔…… 아니지, 내 직접 가마!”
과도할 정도로 흥분한 팽강휘를 의아한 표정으로 보던 팽강현이 눈을 부릅떴다.
팽강휘의 신형이 방 안에서 사라진 것이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팽강현이 황당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팽강휘는 신법을 펼쳐 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왔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간의 성과를 보여줄 수 있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다!’
몇 년 전 곤륜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러리라.
그리고 정문에 도착한 팽강휘는 거대한 문을 벌컥 열며 외쳤다.
“오셨소이까!”
“네.”
“대체 이게 얼마 만…… 응?”
눈앞의 청년을 얼싸안으려던 팽강휘가 멈칫했다.
그가 알던 ‘그’의 모습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강현이가 천하제일미남이 아니라 했지.’
눈앞에 있는 청년은 확실히 미남이었지만, 그가 기억하는 이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잘생겼기는 한데…… 딱 봐도 성격이 더러울 것 같군.’
게다가 혼자가 아니었다.
멍청해 보이는 청년 하나와 너무나 평범한 중년인이 같이 있었다.
맥이 탁 풀린 팽강휘는 한숨을 내쉬다가 눈을 빛냈다.
‘잠깐. 이자가 전해달라고 했던 말은 분명히 그때의 일 아닌가.’
그때, 성격 더러워 보이는 미청년이 말했다.
기억 속의 그 청아한 목소리로.
“오라 해서 왔는데 왜 말이 없어요? 얼굴 이래서 못 알아보시나?”
“……정녕 그대가 맞소?”
“네.”
“……헌데 얼굴은 왜…….”
무척 반가워하면서도 의혹에 찬 표정을 짓는 팽강휘였다.
그런 그를 보며 미청년 정광이 빙긋 웃었다.
“그럴 이유가 있어서요. 들어가서 얘기하죠.”
* * *
팽강휘는 정광 일행을 이끌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물었다.
“이보시오, 진옥룡. 왜 도복이 아닌 평복을 입고, 역용까지 하신 게요?”
“뭐라도 좀 먹고 마시면서 얘기하죠. 급히 오느라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네요.”
“그럽시다. 소채 종류 요리와 차를 가져오라 하겠소.”
“네?”
정광이 황당해하자 팽강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잘못됐소?”
그렇다마다.
무인에게 채소쪼가리와 차라니, 이 무슨 천인공노할 만행이란 말인가.
“고기와 술로 주세요.”
역시 황당해하던 팽강휘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것 때문에 평복을 입고 역용을……?”
“겸사겸사요.”
“……그럼 진짜 목적은 무엇이오?”
정광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마련의 돼지가 하북에 온 이유가 팽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라곤 말할 때가 아니었기에.
그런 정광을 빤히 보던 팽강휘가 피식 웃었다.
“뭐 알겠소이다. 어쨌든 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오.”
“뭘요.”
“하하. 밖에 누구 있는가?”
팽강휘는 사람을 불러 정광이 요구한 것들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잠시 뒤, 고기와 술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놓였다.
“무량수불. 잘 먹겠습니다.”
정광은 도사답게 두 손을 모은 뒤, 도사답지 않게 술과 고기를 먹었다.
백승무와 자오도 마찬가지였는데 무척이나 배가 고팠던 듯 손놀림이 굉장히 빨랐다.
그 꼴을 지켜보던 팽강휘가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굶었길래…….”
“이틀이요.”
“이틀? 어째서 그리 오래?”
“빨리 오려고요. 일단 다 먹고 얘기하죠.”
팽강휘는 머쓱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상 위에 깔려 있던 수많은 요리가 사라졌다.
정광이 만족한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아아. 살 것 같네.”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팽강휘가 물었다.
“진옥룡, 이분들은 누구시오?”
“아. 이런 실례를.”
정광이 백승무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강호에서 금권검협(金權劍俠)이라 불리는 백승무. 제 사제예요.”
“……금권검협?”
“네. 아세요?”
“최근에 들어봤소. 헌데…….”
팽강휘는 시선을 돌려 백승무를 바라봤다.
백승무는 얼굴이 벌게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팽강휘도 고개를 숙이자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감상은…….
“……귀공자처럼 생기셨다 들었소만.”
백승무 대신 정광이 대답했다.
“멍청하게 생겼죠?”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라고 했겠지만, 이곳은 하북팽가였다.
호쾌하고 직설적인 사내들로 가득한!
당연히 팽강휘도 그랬다.
“흐음. 초면에 실례지만 그렇소.”
“역용한 거예요. 원래는 이 정도까지 못생긴 얼굴은 아니죠.”
“아하. 반갑소이다, 금권검협. 나는 팽강휘라 하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
구룡사봉 중 패룡(覇龍)의 자리에 앉은 팽강휘였다.
그런 그가 금권검협이라는 분에 넘치는 별호로 부르자 백승무의 고개는 아래로 꺾이다 못해 부러질 지경이었다.
“……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팽강휘의 시선이 자오에게 넘어갔다.
“이분은?”
역시 정광이 소개했다.
“지금은 자오(慈烏)요. 훗날은 각응(角鷹)이 되실 거고.”
“……그러니까 지금은 까마귀라 불리시는데 나중에는 매라 불리실 거다?”
백승무와 달리 자오는 담담히 답했다.
“진옥룡께서 그리 만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 부럽소이다!”
팽강휘는 무릎을 치며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정광이라면, 까마귀를 매로 만드는 게 아니라 참새를 매로 만드는 것도 가능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자오가 계속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듣고 싶으십니까?”
팽강휘가 그래달라고 하려는데 정광이 막았다.
“그럼 너무 길어져서 안 돼요. 여기까지 하죠.”
“길어봐야 얼마나 길겠소. 나는 듣고 싶소이다.”
“그럼 나중에 둘이 계실 때 하시죠.”
“음. 그럼 그렇게 합시다.”
백승무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으나 팽강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렇게 대충 인사가 끝나자 팽강휘는 미뤄뒀던 말을 꺼냈다.
“진옥룡, 무척 보고 싶었소이다.”
“어? 저도 그런데.”
“오! 그대도 그렇소? 이렇게 기쁜 일이 있나! 으하하하!”
대소를 터뜨리던 팽강휘가 말을 이었다.
“내 그간의 성취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데 그대도 확인하고 싶어 했었구려.”
“어라? 그건 아닌데요.”
“……그럼?”
팽강휘의 실망한 얼굴을 보자 정광은 소원부터 들어주기로 했다.
‘기분이 좋아야 통이 커지는 법. 그 정도야 해줘야지.’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한번 보죠. 어디서 할까요?”
팽강휘의 안색이 급격히 밝아졌다.
“바로 뒤에 연무장이 있소이다. 갑시다.”
* * *
정광과 마주 선 팽강휘는 운룡을 유심히 보다가 물었다.
“그 검은 어디서 구하셨소?”
“아. 운룡요?”
“이름도 좋군. 과하게 화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대단한 장인이 만든 듯하오.”
“네. 맞아요.”
“호오. 그대가 그렇게 인정하니 정말 대단한 야장인가 보군. 검을 견식해 볼 수 있겠소?”
정광이 양 소매를 걷으며 답했다.
“검을 뽑을 만한 수준이시면 싫다 해도 보여 드릴 건데요.”
지켜보던 백승무와 자오가 눈을 크게 떴다.
정광의 말이 무인에게 있어 크나큰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팽강휘는 달랐다.
“으하하! 하나도 안 변하셨군.”
껄껄 웃던 그는 도를 빼 들었다.
딱 봐도 시퍼런 예기가 흐르는 게 보통 도가 아니었다.
“어? 도로 하시게요? 연환패왕권(連環覇王拳), 철혈백사십팔퇴(鐵血百四十八腿)는요?”
정광이 의아해하자 팽강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걸 다 기억하고 계셨구려. 오늘은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려 하오. 그대가 검을 뽑는 모습을 반드시 볼 생각이거든.”
“패기 좋네요. 시작하죠.”
“……잠깐. 그 요상한 기수식(起手式)은 좀 빼면 안 되겠소?”
짝다리로 삐딱하게 서서 검지를 까딱거리던 정광이 답했다.
“전에도 보셔놓고 새삼스럽게.”
“후우우. 오랜만에 봐도 적응이 안 돼서 그러오. 됐소, 그냥 합시다.”
“무공 이름 대면서요?”
“그럴 리가. 그대는 그런 걸 싫어하는 성품이잖소.”
“칭찬이죠?”
“그럼 가겠소!”
팽강휘가 정광에게 달려들며 도를 휘둘렀다.
쉬이잉-
그 도는 눈부신 속도로 허공은 물론 정광의 목까지 베어버렸다.
하지만 장내의 누구도 놀라지 않았으니.
정광이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들의 믿음대로 정광은 잔상을 남기며 뒤로 물러섰다.
“오. 빠르고 강해지셨네.”
“아직 아니오!”
팽강휘의 말대로 다음 도격(刀擊)은 더 빨랐다. 그리고 그다음 도격은 더욱 빨랐다.
실로 폭풍 같은 도격!
강맹한 연환격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하북팽가가 자랑하는 절기,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가 펼쳐진 것이다!
정광은 팽강휘의 성취를 인정했다.
‘많이 늘었구나.’
그것도 기특할 정도로 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뼈를 깎는 고련을 했다는 게 보일 정도로.
정광은 조금 더 성의 있게 상대해 주기로 했다.
‘팽가의 무공도 한 번 더 봐야지.’
이리저리 피하던 정광은 손을 들어 반격하기 시작했다.
도면을 손바닥으로 밀고, 손등으로 튕기며 손가락으로 찍는다.
그렇게 틈이 생길 때마다 권을 찔러 넣고 장으로 후려친다.
팽강휘는 그때마다 보법을 밟아 피하며 도신으로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다시 도를 휘두르는데.
그 기세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강해졌고 끝이 없을 정도로 이어졌다.
정광이 의아해할 만큼.
‘이런 공세를 계속 유지한다고? 내공만으로 될 일이 아닌데.’
팽강휘는 계속해 냈다.
웅혼한 내력과 날카로운 집중력이 그걸 가능케 했다.
그리고 투지!
그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정광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진짜 좋아지셨네.”
“……!”
별것 아닌 칭찬이었건만.
팽강휘의 험상궂은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것은 미소!
마치 갈라진 바위 틈에서 야생화가 피어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얼마나 이날을 기다렸던가!
결국 정광에게 인정을 받고야 만 것이다!
팽강휘는 터질 듯한 가슴을 억누르며 훌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정중히 포권을 했다.
“진옥룡! 인정해 줘서 고맙소이다! 모두 그대 덕분이오!”
“싸우는 중에 그래도 돼요?”
“……그게 무슨…… 어억!”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정광이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주먹은 팽강휘의 시야를 다 메울 정도로 크게 확대되었다.
콰앙!
“크헉!”
바닥에 나동그라진 팽강휘는 의식의 끈이 끊어져 가는 걸 느꼈다.
‘이, 이게 아닌데…….’
정광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무공이 늘어난 만큼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 건 좋은데…….”
팽강휘는 기절하기 전에 정광의 말을 다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방심해서야 어떻게 무인이라 할 수 있어?”
팽강휘는 정말 억울한 마음으로 기절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