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여덕위린(與德爲隣)
철혈장은 철을 귀신처럼 다루는 장인들의 가문이었다.
철혈장주는 그 가문의 정점에 서 있는 이였고.
그런 이에게 제련에 관해 묻는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철진기의 눈썹이 치솟았다.
“자네 지금 아버님을 시험하는 것인가?”
“아뇨. 아시나 싶어서요.”
“그게 그거 아닌가!”
“네? 시험이 아니라 확인인데.”
철진기가 노호성을 터뜨리려는데 그의 아비가 팔을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말씀하시지요.”
정광은 눈이 흥미로움으로 물들었다.
‘드디어 철혈장주의 목소리를 듣는 건가?’
아니었다.
철혈장주는 조용히 손가락 두 개를 들 뿐이었다.
‘이런.’
깊은 실망감이 정광의 마음속에 차올랐다.
목소리를 못 들어서가 아니라 답이 틀렸기 때문이었다.
정광은 맥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인데.”
“……!”
철혈장주라면 이쯤은 알 거라 기대했거늘.
기대가 무너지자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천하에 역천마장만 한 야장은 없는 건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는 정광이 인정한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이번 생엔 병기 덕 좀 보나 했더니만.’
전생에 정광은 수없이 많은 병기를 썼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는 신분에 걸맞는 것들이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적들은 너무 많고 강했으니.
명검이라 해도 부러지기 일쑤요, 현철을 섞어 제련한 철봉이 휘는 건 다반사였다.
정광은 항상 갈증을 느꼈다.
‘그때 제대로 된 병기만 있었으면.’
많이 편해졌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없는 걸 어쩌나.
결국 정광이 택한 방법은 병기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빨리 강해지는 게 낫겠다였다.
물론 아무리 그라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 발짝씩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강해졌다.
손에 무엇을 쥐든 간에 아쉬운 소리를 안 할 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해낸 것이다.
그런 경지에 오르자 감히 덤비는 자가 없었다.
천마신교에 소속된 모든 가문이 그에게 복종하게 되었기에.
여유가 생긴 정광은 제대로 된 병기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선 최고의 야장이 필요할 터.
정광은 그에게 끝까지 저항하다가 무릎을 꿇은 천마신교 칠대가문 중, 철을 잘 다루기로 소문난 이녕(伊寧) 임가의 소가주에게 명했다.
‘듣자니 네가 제일 잘 만든다며? 천하제일검을 만들어라.’
정광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실제로 지켰다. 거기에 한 가지 혜택까지 줬다.
헌데 그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임가의 소가주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천하제일검을 만들라 하자 현철을 통째로 써보겠다고 떼를 쓴 것이다.
그 배포가 마음에 들어 허락했건만.
‘내가 잠깐 미쳤었지. 그냥 적당히 하라고 할걸.’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중년이었던 녀석이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와 검을 바쳤을 만큼.
그때쯤 정광은 병기 따위가 필요 없는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드디어 천하제일검을 손에 넣게 되었으나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마혼(魔魂)이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제대로 쓰지도 못했었지. 지금은 누가 쓰고 있으려나?’
누군진 몰라도 복 받은 거다.
그 검은 정광이 추가적으로 손을 본 검이었으니까.
‘아니지. 그럼 뭐 해. 그걸 알아챈다 해도 쓸 수 있는 놈이 없을 텐데.’
정광은 고개를 저어 과거의 일을 털어냈다.
‘이번 생에도 빨리 쥐어보긴 글렀군. 뭐 전생보다는 빠르겠지만.’
정광은 미련도 털어냈다.
마음을 비우니 말도 곱게 나왔다.
“장주님. 한 이십 년쯤 후에 오면 되겠죠?”
“……?”
“그때쯤이면 남은 하나가 뭔지 알아내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
영원히 닫혀 있을 줄 알았던 철혈장주의 입이 열리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는 다시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일 뿐이었다.
그걸 본 철진기가 무겁게 말했다.
“아버님께선 두 개면 된다고 하시네.”
“아닌데.”
“……자네가 철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자꾸 그러는가! 세 번째 것이라는 건 필요 없네! 그 두 개가 뭔지나 한번 말해보게나!”
“서로 글로 써서 보여주죠.”
“……보자보자 하니까!”
철진기가 폭발하려는데 철혈장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탁자 한 귀퉁이를 잡았다.
우지직!
탁자를 한 움큼 떼어낸 그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겼다.
“오오. 사내다우시네요.”
정광은 세련된 방식을 썼다.
손날로 가볍게 내려치자 탁자 모서리가 반듯이 잘린 것이다.
“음. 다 적었어요. 어디 한번 볼까요.”
정광과 철혈장주는 동시에 탁자 조각을 내밀었다.
적연철(赤軟鐵), 고석(鈷石).
똑같은 두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철진기는 양쪽을 번갈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철혈장주의 눈도 커진 상태였다.
“두 개는 제대로 아시네요.”
정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머지 하나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에 봬요.”
정중히 예를 취하고 문으로 가는데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름만 기다려라.”
“……!”
정광은 천천히 뒤돌았다.
뜨거운 기운을 흘리고 있는 철혈장주가 보였다.
“장주님이 말씀하신 거죠?”
“…….”
“보름 안에 현철을 모으고 그것이 뭔지 알아내실 수 있으세요?”
장주는 말없이 정광을 노려봤지만 그의 뜨거운 기세는 그렇다 말하고 있었다.
정광은 내심 혀를 찼다.
‘힘들 텐데.’
그래도 해보겠다는데 말릴 수야 있나.
투지 있는 사내니, 지켜봐 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정광은 다시 한번 예를 취했다.
아까보다 더 정중하게.
“알겠습니다. 기대할게요.”
* * *
정광은 숙소로 향하다가 백승무를 만났다.
“사제. 오늘은 벌써 끝난 거야?”
“네. 이제 마무리 단계라. 사형은 어떠셨습니까. 만들어주겠다 하십니까?”
“그렇긴 한데. 잘 모르겠네.”
백승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정광이 설명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백승무가 간신히 물었다.
“……사형은 그런 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나니까.”
“……그랬지요.”
말과는 다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백승무가 덧붙였다.
“그 세 번째 것 말입니다. 그냥 말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일이 편할 텐데요.”
“나도 몰라.”
“……네?”
“그건 나도 모른다고.”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정광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생에 현철검을 휘둘러보고 마음에 들어 했던 그는 이녕 임가의 소가주…… 아니, 그때는 이미 태상가주가 된 이에게 물었었다.
‘제법이네. 뭘 섞었길래 현철검이 이렇게 탄성이 강해?’
스스로 천하제일 야장이라고 자부하는 그가 비전기술을 알려줄 리가 있나.
하지만 정광이 분근착골(分筋錯骨)의 수법을 쓰려 하자 재빨리 대답했던 게 적연철(赤軟鐵))과 고석(鈷石)이었다.
그리고 정광이 뼈마디를 가볍게 비틀자 하나가 더 있다고 토설했다.
‘그게 뭔데?’
‘……차라리 그냥 죽여주십시오!’
빈말이 아닌, 정말로 죽기를 각오한 얼굴이었다.
정광의 마음에 들 만큼.
‘좋아. 앞으로 너는 역천마장(逆天魔匠)이다. 수고했어.’
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그렇게 훈훈하게 일이 마무리된 경우는 정말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정광은 그때를 후회하고 있었다.
‘그냥 쥐어 패서 알아낼걸 그랬어.’
그래도 어쩌랴. 이미 지난 일인데.
정광은 철혈장주의 능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가자, 사제.”
“……네, 사형.”
숙소로 돌아오자 자오가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대충 봐도 영약의 약효를 제대로 흡수한 게 느껴졌다.
“자오. 그 돼지한테 연락을 보낼 때 됐죠?”
“그렇습니다.”
“써놓은 거 보여줄래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자오는 방에 들어가 종이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정광에게 건네려다가 멈칫했다.
“아. 죄송합니다. 암어(暗語)로 적어놓은 걸 깜빡했군요.”
“괜찮아요. 주세요.”
“……네?”
정광은 종이를 집어 들고 훑어봤다.
그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꽤 복잡하네.”
“사마련에서 고위층에게 보낼 때 쓰는 암어라…… 소인이 풀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럴 것까진 없고.”
“……네?”
가만히 종이를 보던 정광이 입을 열었다.
“여기 세 번째 줄요. 진옥룡이 소장주에게 무기를 만들어줄 것을 청하고 있다. 이거 사실대로 장주에게로 수정하세요. 어차피 시간 지나면 퍼질 거. 그대로 쓰는 게 나아요.”
“……!”
“잠깐. 옥패 얘기는 뺄까? 옥기린이 고생하게 될 텐데. 아, 나랑 상관없지. 알아서 하라 하죠.”
“…….”
“그리고 일곱 번째 줄. 철혈장에 얼마나 오래 머물지는 모른다. 너무 부정확하게 느껴지니까 두 달로 고치시고요. 뭐 실제론 한참 전에 떠날 테지만.”
입을 떡 벌리고 듣던 자오가 가까스로 물었다.
“……호, 혹시 사마련 소속이셨습니…… 죄송합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헌데 이 암어를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정광은 간단히 답했다.
“지금 풀었는데요.”
“……네?”
자오의 입을 벌어지다 못해 턱이 빠질 정도였다.
세상에 뭐 이런 괴물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곧 다른 것 때문에 경악해야 했으니.
바닥에 쓰러져 뒹굴며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악! 끄으으으윽!”
정광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 해약을 안 드렸구나.”
자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아?
해약을 안 드렸구나?
‘잊을 게 따로 있지!’
정광은 사흘마다 해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만성독약을 먹은 뒤 나흘째였다.
하루가 늘었으니 기뻐해야 할 일이건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다른 건 괴물처럼 똑똑하면서 왜 이거는 잊었단 말이오!’
하지만 새로운 절기를 익히느라 정신이 없어 그도 잊고 있었던 일.
자오는 자신의 멍청함을 욕하며 바닥을 계속 뒹굴었다.
정광은 그의 마혈과 아혈을 짚은 뒤 백승무에게 말했다.
“사제. 오늘은 더 할 일 없는 거지?”
“그, 그렇습니다만.”
“그럼 나가서 약재 좀 사 올래. 해독약 만들어야 돼.”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어떡합니까?”
정광이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쩌긴. 이번엔 그냥 참아야지.”
빳빳이 굳은 채로 누운 자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백승무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렇군요. 어서 적어주십시오.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해독약은 자오가 기절해서 똥오줌을 또 지리고 나서야 완성됐다.
정광은 자오를 깨웠다.
“크아아아악!”
“어? 살짝 찔렀는데. 어서 드세요. 안 드시면 일각 후쯤에 또 아플 거예요. 아, 우선 정화부터.”
정광에게 다시 정화를 당한 자오는 해독약을 씹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고의야. 이만한 천재가 잊을 리 없어.’
고통을 줬다가 절기를 줬다.
영약을 줬다가 다시 고통을 줬다.
자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정광의 심계를 측량할 수 없어서였다.
‘내가 너무 풀어진 모습을 보인 걸까?’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또다시 이런 꼴을 겪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주의해야 해! 최대한 빠릿빠릿하게! 믿음을 심어야 한다!’
자오는 즉시 바쁘게 움직였다.
“암어를 고쳐왔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음. 좋네요. 그대로 가죠.”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근처의 지부에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어? 몸 좀 추스르고 가시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자오는 재깍 허리를 굽힌 뒤 비조처럼 사라졌다.
정광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여덕위린(與德爲隣)이라. 덕이 있으면 모두가 친할 수 있다더니. 덕으로 대하는 것도 효과가 꽤 크네.’
전생과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이었다.
아직도 몸에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해보니 나름 할 만하지 않은가.
‘여기 머무는 동안 더 신경 써서 가르쳐야겠다.’
정광의 결심 덕분에 백승무와 자오는 매일 삼도천을 넘나들어야 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을 때.
정광에게 사람이 찾아왔다.
“진옥룡, 장주께서 찾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