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철혈장주시니까요
진충은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
지금부터 그는 자오(慈烏)였다.
하지만 이전의 자오와는 달랐으니.
언젠가는 각응(角鷹)이 될 자오였다.
“백 공자.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편하게 자오라 불러주십시오.”
“……네. 그런데 실례지만 뉘신지……?”
“간략히 말씀드리지요. 저는…….”
자오는 날카로운 눈매에 평범한 체격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마치 자객(刺客)의 표상 같다고 할까?
하지만 의외로 그는 말이 무척 많고 빨랐다.
간략히 말하겠다 해놓고 일각 내내 쉼 없이 떠들 정도로.
덕분에 백승무는 곤륜의 사형들에 대해 아는 걸 다 합친 것보다 자오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을 확실하게 정리하게 되었다.
‘앞으로 말을 걸면 안 되겠구나.’
사실 이건 두 번째 문제였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사마련의 무인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정광이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주실 분’이라 했지만 말이 안 됐다.
저 엄청난 수다라니. 차라리 혀와 입이 될 공산이 커 보이지 않는가.
무엇보다 만성독약을 먹여놓고 해약으로 위협해서 잡은 자다.
정광이 대단한 무공을 전수해 준다고는 하는데…….
‘사파인이다. 언제 배신할 몰라.’
백승무는 바로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형. 저는 이자를 믿을 수 없습니다.
-어? 나도 그런데.
어이없는 대답에 눈을 끔뻑거리던 백승무가 간신히 물었다.
-……그럼 왜 거두신 겁니까?
-그럼 죽여?
백승무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어떤 이든 간에 목숨은 귀중한 것.
그게 평시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사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바른길로 들도록 힘을 써봐야지요.
당장 자오가 악행을 저지르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정파인으로서 최소한의 노력은 해봐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오히려 사형보다 마에 가깝구나. 이래서야 어찌 사형을 보필하겠는가.’
자책하는 백승무를 정광이 나무랐다.
-바른길로 인도한다고? 어느 세월에?
-……네?
-그냥 적당히 쓰면 돼. 아니다 싶으면 그때 가서 치우고.
-……!
백승무는 좀 전에 자책했던 것을 후회했다.
정광은 역시 정광이었기에.
‘과연 사형이시구나. 헌데 저자를 어떻게 믿고 일을 시킨단 말인가.’
백승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게 있었으니.
사파의 습성이었다.
그들은 충성으로 엮인 조직이 아니다.
서로 적절한 대가를 주고받는 거래 관계에 가까웠다.
수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지 않으려면 그만한 대우를 해주면 되는 법.
이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나 쉽게 해치우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정광이 그랬다.
“자오. 사마련에선 얼마나 받았어요?”
자오가 대답하자 백승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사제. 표정이 왜 그래? 너무 많은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그건 아닐걸.”
“……네?”
“사파에선 녹봉을 허투루 주지 않아. 능력에 맞게 주지. 안 그랬다간 등을 찔리거든.”
자오가 사실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자 백승무는 사파에 대한 편견이 더 심해졌다.
‘신의가 아니라 이익으로 맺어진 이들이라더니 생각보다 더 심하구나. 사형은 얼마를 주려는 걸까?’
백승무는 아직도 정광을 잘 몰랐다.
“자오. 보수는 없어요.”
“…….”
“……사, 사형. 그건 좀 심한 것 아닙니까?”
“왜? 우리는 주종 관계가 아니잖아.”
백승무는 입을 떡 벌렸다.
‘주군으로 모시겠다 했을 때 거절한 게 이런 이유였나!’
눈만 움직여 흘깃 보니, 자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더 큰 것을 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아!”
백승무가 탄성을 터뜨리자 정광이 씩 웃었다.
“돈 따위야 힘만 있으면 금방 생기지. 그게 사파의 방식이야.”
“그렇습니다, 진옥룡.”
동의하는 자오에게 정광이 물었다.
“열심히 배우실 거죠?”
“물론입니다!”
자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승무는 그런 그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정광의 ‘열심히’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게 불쌍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백승무가 누굴 동정할 때인가.
당장 날이 밝으면 대장간에서 비지땀을 흘려야 하는 처지였다.
백승무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 고생이 빨리 끝나길 빌며.
* * *
백승무는 동이 트자마자 대장간으로 향했다.
정광은 자오에게 일러 몰래 밖으로 나갔다가 정식으로 다시 들어오게 했다.
자오는 즉시 그 말에 따랐고 정광의 친우로 철혈장에 머물게 되었다.
“아는 거 다 펼쳐보세요.”
“네, 진옥룡.”
수많은 무공이 쏟아져 나왔다.
자오의 무공은 사파 출신답게 사이하고 기괴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 종류가 난잡할 정도로 무척 많았다.
정광의 감상은 간단했다.
“몰래 뒤통수치는 데 특화돼 있네요.”
“첩보와 암살을 업으로 하다 보니…….”
자오가 말끝을 흐리자 정광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기죽지 마세요. 효율적이고 좋은 데요, 뭐.”
“……!”
“그쪽으로 제대로 파보죠.”
자오는 아무래도 좋았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무슨 상관인가.
아니, 지금껏 익혀온 것을 버리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다.
불혹을 넘은 그에게 시간은 무척 소중한 것이었기에.
‘제대로 배우리라! 내 모든 것을 걸고!’
그 결심은 한 시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강도의 수련!
이게 수련인지 고문인지 도저히 구분이 안 될 정도 아닌가!
머릿속에서 탈출 계획이 저절로 떠올랐다.
하지만 자오는 현명한 이였으니.
‘그래도 독의 고통보다는 낫다! 도망치면 그 고통에 계속 시달려야 해!’
이를 악물고 참는 그를 보며 정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살수(殺手)라서 그런지 인내심이 강하군.’
그렇다면 그에 걸맞게 수련 강도를 높여야 하는 법.
정광은 자오를 몰아쳤다.
무림맹 사람들에게 전수했던 체조법을 변형해서 가르쳤고, 가장 중요한 잠행술과 은신법도 괜찮은 것으로 줬다.
자오는 그것들의 귀중함을 알 만한 실력자였기에 더욱더 수련에 매진했다.
탈출은 물론 자결 충동까지 느끼면서도 계속 버틴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절했는지 일을 끝내고 돌아온 백승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추궁과혈을 해줄 정도였다.
정광의 제지에 하루 만에 끝나버렸지만.
“사제. 무인에게 추궁과혈은 길게 보면 안 좋다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사흘째가 되자 자오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정광이 그걸 보고만 있을 리가 있나.
내공을 주입해서 극심한 고통을 주어 깨웠다.
“크아아악!”
“보기보다 몸이 허하시네.”
“크으윽. 쿨럭, 쿨럭. 죄송합니다.”
자오는 일어서려 했으나 몸이 말을 안 들었다.
정광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를 보며 고민했다.
‘의지가 강하고 자질도 있어. 그런데 허접스러운 사공을 익혀와서 몸 상태가 엉망이군.’
사파의 무공에는 갖가지 편법이 동원되었기에 부작용도 많았다.
제대로 된 것이라면 정도가 덜했지만 그런 걸 익힌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자오는 거기에 포함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때문에 마공과 정공을 바탕으로 한 정광의 무공을 익히자 몸에 탈이 나버린 것이다.
‘걷어주기만 하면 쑥쑥 늘 텐데.’
자오의 몸속 가득한 사기(邪氣)를 말함이었다.
‘어쩐다.’
방법은 있었다.
다만 그렇게까지 해줄 이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때, 자오가 부들부들 떨며 일어섰다.
정신이 육체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정광은 결정했다.
‘투자해 보자.’
영약 한 알을 꺼내서 내밀자 자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드세요.”
“……이건 또 어떤 독약입니까?”
“네? 영약인데.”
“……!”
자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가 언제 영약을 구경이나 해봤겠는가.
‘잠깐. 정말 독이 아니라 영약일까?’
의심스러워도 답은 나와 있었다.
어차피 이미 만성독약에 찌든 몸.
독 하나 더 추가한다고 대수랴.
먹지 않으면 정광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
자오는 망설임 없이 단환을 삼켰다.
그리고.
내부에서 피어오르는 막대한 기운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진짜 영약이었다!
‘진옥룡! 지금 이 순간을 잊지 않겠소!’
그와 달리 정광은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회수하려면 아주 제대로 부려먹어야겠어.’
이렇게 두 사람이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철혈장의 정문 앞에 땅딸막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곳을 지키던 위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외쳤다.
“장주님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 * *
다음 날 아침.
한 사내가 찾아와 정광에게 말했다.
“장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가시지요.”
백승무는 이미 대장간에 간 상황.
정광은 자오에게 수련을 하라 한 뒤, 사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 그들은 소박한 전각 앞에 이르렀다.
“들어가시지요.”
“네.”
안으로 들어가자 철진기와 땅딸막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은 철진기처럼 화상이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쇳덩어리로 얼굴을 빚은 것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철진기가 노인을 소개했다.
“오셨는가. 아버님이시네.”
정광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장주님. 곤륜의 정광입니다.”
“…….”
묵묵부답인 노인 대신 철진기가 미안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선 과묵하시니 이해해 주게나.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괜찮아요.”
정광의 반응에 오히려 철진기가 당황했다.
아무리 연배가 높다 해도 후학의 인사를 무시하는 건 무례한 짓이다.
그간 살펴본 정광은 그런 걸 참을 성품이 아니지 않은가.
‘의외의 면이 있군.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녀석이구나.’
그가 알면 더 놀랄 일이 있었으니.
정광은 무척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철혈장주를 보며 전생의 누군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역천마장(逆天魔匠) 그 녀석처럼 말이 없네. 이제 실력만 닮으면 되겠는데.’
정광이 빙그레 웃자 철혈장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철진기가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 자네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 하셨네. 괜찮겠는가.”
“물론이죠.”
“사실 아버님이나 나나 위진이를 썩 좋아하진 않아. 그 녀석 애비부터 마음에 안 드니 당연한 일이지.”
철진기의 말에 따르면 그에겐 착하디착한 누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를 사파의 불한당이 채갔는데, 그가 바로 후위진의 아비가 된 사람이었다.
“위진이 그놈의 성품을 보게나. 내 누이는 그렇지 않아. 분명 그 도적놈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됐을 걸세.”
철진기의 누이는 후위진을 낳자 남편과 함께 철혈장을 찾았다.
철 씨 부자가 그녀의 남편을 쫓아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녀도 울면서 후위진을 안고 떠난 것이었다.
“아버님께선 무척 상심하셨지. 누이가 언젠가 다시 찾아올 날을 기다리시며 옥패를 만드셨네. 자네가 가져온 그것을 말하는 걸세.”
철혈장주는 딸이 가진 뛰어난 재주를 손자가 이어받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귀하디귀한 청옥으로 만든 패에 전설 속의 신수(神獸) 기린(麒麟)을 새긴 것이었다.
“그런데 장성해서 찾아온 그 녀석은…….”
철 씨 부자가 꿈꾸던 기재가 아니었다.
싸가지 없는 망나니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옥패를 내어주고 나가라 했네. 거기에 새겨진 기린과 같은 이가 되어 돌아오면 원하는 걸 들어준다 했지.”
후위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삼 년이면 충분하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정확히 삼 년 뒤.
사람들을 패고 협박하여 옥기린이란 별호를 강제로 만든 뒤 돌아왔다.
“그런 놈이 원하는 걸 어찌 들어줄 수 있겠나?”
“아아. 당연하죠.”
“그래도 계속 떼를 쓰길래 다른 이에게 양도하라 했네. 그걸 들고 오는 이에게 원하는 병기 하나쯤은 주겠다고.”
“이제 이해가 가네요. 그래서 순순히 내줬구나.”
철진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다가 아비가 노려보자 찔끔했다.
“말이 너무 길어졌군. 아버님께서 물으셨네. 그 아이와 어떻게 친우가 됐는지. 듣자니 자네가 패줬다며? 어쩌다 그렇게 됐는가?”
정광이 왔을 때 그를 안내한 위사에게 들은 얘기였다.
그때는 허풍이라 생각했으나 정광을 직접 대하자 사실임을 믿게 되었다.
“저보고 사마련으로 들어오라고 했거든요.”
“……곤륜 제자인 자네에게?”
“네. 그래서 싫다 했죠.”
“……길길이 날뛰었겠군.”
“좀 심할 정도로요. 어떡할까 하다가 병도 고쳐줄 겸 때렸습니다.”
“……병?”
“그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병 있잖아요.”
“아!”
탄성을 터뜨렸던 철진기는 헛기침을 한 뒤 정광을 칭찬했다.
“크흠. 같은 연배에는 적수가 없다고 큰소리치던 녀석이지. 자네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면 좋겠군.”
“으음. 힘들걸요.”
“후우우. 그러게 말일세.”
정광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철진기를 보다가 물었다.
“이제 저도 하나 여쭤봐도 돼요?”
“뭔가? 말해보게나.”
정광의 시선이 철혈장주에게로 옮겨갔다.
철혈장주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 시선을 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장주님.”
“…….”
이어지는 정광의 말에 철혈장주의 얼굴이 변했다.
처음으로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게 생긴 것이다.
“현철 스물한 근 열네 냥을 통째로 써서 만드는 검에 어떤 걸 섞어야 탄성이 더해지는지쯤은 아시는 거죠? 철혈장주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