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79화 (79/569)

79화

손님

철진기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현철로만 검을 만들어달라고? 이 녀석, 제정신인가?’

진옥룡의 명성만큼 악명도 많이 들었다.

하나하나 되짚어보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철진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되네.”

“왜요?”

“검 한 자루 만들려고 본장의 기둥뿌리를 뽑으란 말인가?”

“아. 철혈장이 보기보다 돈이 없나 보네요.”

“……뭐?”

“좀 보태 드릴게요. 그럼 됐죠?”

“……되긴 뭐가 돼!”

씩씩거리던 철진기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렇게 하세. 현철을 세 냥(兩) 섞어주겠네.”

“너무 적은데.”

“……다섯 냥!”

“그렇게 적은 양이면 섞어봐야 티도 안 날 것 같은데요.”

철진기는 이제껏 살아오며 만났던 싸가지 없는 놈들을 떠올렸다.

그들과 비교하면 정광은 그래도 낫다고 스스로 세뇌를 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놈은 이미 넘어섰어!’

철진기는 한 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자네가 고른 그 검은 꽤 무거운 검이네. 두 근(斤) 세 냥(兩)이야. 그걸 현철로 만든다? 스무 근이 훌쩍 넘어가 버릴걸세.”

“정확히 스물한 근 열네 냥이죠.”

“……계산이 빠르군. 어쨌든 그걸 제대로 다룰 수 있겠는가?”

정광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관우는 여든두 근짜리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썼는데요, 뭐.”

“그걸 믿는가! 연의(演義)에 나오는 얘기잖아!”

“되는데.”

철진기가 폭발하려는 순간, 정광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말했다.

“마땅한 게 없네. 이렇게라도 해볼게요.”

“……?”

정광은 견본으로 골랐던 검과 비슷한 검 아홉 개를 모았다.

이로써 총 열 개.

지켜보던 철진기는 조소를 흘렸다.

‘열 배 무게를 다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열 개를 휘두르겠다? 한 손에 어떻게 쥐려고?’

검자루의 굵기는 사람의 손에 맞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열 개를 한 손으로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헉!”

정광은 가능했다.

“……검을 거꾸로 잡아?”

검자루가 아니라 검날을 잡다니!

물론 저렇게 하면 열 개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지만 손이 멀쩡할 리가…….

있네?

철진기는 벌어진 입을 가까스로 움직여 물었다.

“……검날을 열 개나 쥐었는데 왜 손이 괜찮은 건가?”

“제대로 잡았으니까요.”

“……제대로라니?”

“병기 파지법(把指法) 모르세요? 무식하게 움켜쥐는 게 아니라 달걀을 감싸듯 잡는 거잖아요.”

물론 철진기도 들어본 말이었다.

‘그런데 그건 과도한 힘을 넣지 말라는 의미 아닌가? 그렇게 잡아서 검을 어떻게 휘두른다고…… 엉?’

정광은 휘두르고 있었다.

단순한 베기와 찌르기도 아니었다.

우아하고 멋지면서도 강한 곤륜 검법을 펼친 것이다!

‘말도 안 돼!’

철진기가 경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검은 긴 병기이고 무게가 그 길이에 전부 배분되어 있다.

스무 근은 소년도 들 수 있는 무게지만 검처럼 긴 물건이면 힘들다.

더구나 그걸 한 손으로 잡고 의지대로 움직이는 건 고수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정광은 그걸 해내고 있었다.

그것도 검날을 잡고!

검에서 제일 무거운 부위인 검자루가 검끝이 되어 더 무거워졌는데도!

철진기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더니만 과연…….”

보통 과장되기 일쑤여서 쓰는 말이지만 정광은 달랐다.

소문을 훨씬 뛰어넘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철진기의 눈빛이 깊어졌다.

‘저 나이에 저런 경지에 이른 이가 있었던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이미 죽은 진천마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리라.

‘잡아야 해. 당장은 출혈이 크겠지만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마침 정광이 검무를 멈추고 철진기를 돌아봤다.

“이제 믿으시죠?”

“……믿네.”

“하하.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조금 보탤 테니 통 크게 해주세요.”

‘조금’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크게 말한 정광이었다.

평소의 철진기라면 울컥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긍정적으로 검토하지. 아버님이 오실 때까지 본장에 머무시게.”

“언제 오시는데요?”

“며칠 내로. 혹 필요한 게 있나?”

정광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우뚝 멈췄다.

필요한 게 생각나서였다.

“그사이에 사제 것은 먼저 만들어주실 거죠?”

“그러세.”

철진기가 흔쾌히 승낙하자 정광이 덧붙였다.

“그런데 사제는 아직 도호를 못 받았거든요.”

“……그래서?”

“속인이란 얘기죠.”

“……?”

정광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무량수불. 사제가 고기 요리를 좋아하니까 많이 부탁드립니다.”

* * *

철혈장은 그 명성만큼 특별했다.

백승무가 견본으로 고른 검과 똑같게 만드는 게 아니라 아주 사소한 요구까지 반영하려 했다.

“이보게, 백 소협. 자네는 손가락이 가늘고 긴 편일세. 검파(劍把)의 길이를 좀 줄이고 굵기를 키우는 게 어떻겠는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철진기는 검자루에 가죽을 조금씩 둘러가며 백승무의 의향을 물었다.

“아! 이 정도가 딱 좋군요.”

“알겠네. 그럼 다음 문제로 넘어가세.”

“네?”

“내 곤륜의 무공을 잘 모르네만, 아까 진옥룡 저 친구나 자네의 검법을 보니 무척 우아하면서도 멋지더군. 헌데 그 속에 강함도 있어.”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서 든 생각일세. 상대와 검을 맞대고 힘쓸 일이 거의 없어 보이더군. 맞는가?”

백승무 대신 정광이 대답했다.

“역시 소장주님. 눈썰미 좋으시네요.”

“……고맙네. 그러니 고동(古銅)의 크기를 줄이세. 정말 미세한 차이겠지만 검을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게야.”

실전에서는 실낱같은 차이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

정광이 찬성하자 백승무도 얼결에 동의하게 되었다.

백승무는 내심 감탄했다.

‘이게 진짜 장인이구나.’

이런 장인이 자신만을 위한 검을 만들어준다.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헌데 그게 끝이 아니었으니.

“좋아.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세.”

“……네? 아직도 남았습니까?”

신중하던 철진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네 검을 무어라 생각하는가? 그리도 만만한가?”

“그, 그게 아니라…….”

“아니고 뭐고 필요 없네! 검을 만드는 건 나야!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일 못 하네!”

백승무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어쩔 줄을 모르다가 정광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 사형…….”

정광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철진기에게 당당히 말했다.

“소장주님.”

“왜 그러는가? 자네도 할 말이 있는가?”

당연히 있었다.

“사제가 좀 모자라서요. 이해해 주십시오.”

“후우우. 내 자네를 봐서 참지.”

“감사합니다. 사제, 뭐 해? 빨리 사죄드려야지.”

배반당한 백승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사과했다.

“소, 소장주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알겠네. 대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야.”

“무, 물론입니다!”

일이 해결되자 정광이 씩 웃었다.

오랜만에 진짜 장인을 보자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역천마장(逆天魔匠) 그 녀석은 벌써 죽었을 거고. 아들놈은 잘 있으려나.’

제법 똘똘한 아이였으니 어떻게든 살아 있으리라.

제대로 컸다면 눈앞의 철진기와 좋은 상대가 될 것이고.

‘철혈장주가 역천마장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 할 텐데.’

현철만으로 검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광으로선 그저 철혈장주가 뛰어나기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뭐 하나.’

구경밖에 더 있나.

마침 백승무와 모든 논의를 끝낸 철진기가 정광에게 말했다.

“당장 시작하겠네.”

“구경해도 돼요?”

“좋을 대로.”

철진기가 앞서 걷자 정광과 백승무가 따랐다.

백승무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형. 보통 장인은 일하는 모습을 안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헌데 소장주는 왜 그럴까요?

-진짜 장인이니까. 아니지. 아직 연륜이 모자라니 반 진짜 장인쯤 되려나.

-네?

백승무가 이해를 못 하자 정광이 설명했다.

-진짜 장인이 하는 건 봐도 따라 하지 못해.

-아!

-사실 무공도 마찬가지야. 연무하는 거 본다고 따라 할 수 있어? 초식 모양새야 흉내 낼 수 있겠지만 내공심법도 다르고 진기를 움직이는 길도 모르는데?

-……사형은 가능하시잖습니까.

-그거야 나니까 그렇지.

백승무는 스스로 그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럽지 않냐는 의미로 정광을 쏘아봤다.

하지만 정광은 당당했다.

어쩌란 말인가. 사실인데.

백승무는 한숨을 쉰 뒤 또 물었다.

-그럼 본문이 수련할 때 남이 보는 걸 막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모르니까.

-…….

-나 정도는 아니어도 뛰어난 놈이 있을 수도 있잖아.

백승무는 자포자기했다.

-……네. 이해했습니다.

-사실 소장주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야장이 아니니까 그렇지. 역천마장쯤 되는 이가 있었으면 이렇게 못 해.

-……역천마장요? 그건 또 누굽니까?

-그런 사람 있어.

백승무가 더 물으려 했지만 그들은 이미 거대한 대장간에 이르러 있었다.

벽이 없고 지붕만 있는 대장간이었는데 웃통을 벗은 근육질의 장한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그랬지만 가까이 오니 엄청난 소음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정말 대단하군요!”

백승무가 감탄하자 철진기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여긴 하품을 만드는 곳일세.”

“……네?”

“계속 따라오게나.”

철진기는 야장들을 보며 몇 명의 이름을 말했다.

그들은 즉시 손을 멈추고 일어나 철진기를 따랐다.

그들이 하던 일은 쉬고 있던 자들이 이어서 했는데 그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미리 짜 맞춘 것만 같았다.

철혈장의 명성이 새삼스럽게 다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수장 철진기가 한쪽을 가리켰다.

“이쪽일세.”

조금 더 걷자 작은 대장간이 보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대장간 크기에 안 맞는 거대한 화로였다.

야장들은 바로 화로에 달라붙어 풀무질을 했다.

금세 불꽃이 커졌다.

그리고 여러 차례 색이 변하다가 백색의 불꽃이 되었다.

철진기도 야장들처럼 웃통을 벗었다.

망치질과 풀무질로 다져진 쇳덩어리 같은 구릿빛 상체가 드러났다.

빼곡한 화상 자국이 그의 경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켜보다가 눈을 빛냈다.

‘이 기운은 또 뭐야?’

미약하지만 이질적인 기운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동하고 있군.’

고개를 돌려 확인하는 건 바보짓.

정광은 기감을 넓혔다.

철혈장은 불을 다루는 장인 가문.

이곳에 속한 이들은 모두 화(火)의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제외하고 오직 이질적인 기운만을 쫓았다.

얼마 안 가 요사스러운 기운이 또렷하게 잡혔다.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미 잡은 기운을 놓칠 정광이 아니었다.

‘그놈이 보낸 건가?’

정광은 찾아온 손님을 홀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선 단둘이 있을 만한 자리를 마련하는 게 순서였다.

“사제.”

“네, 사형.”

“도와드려.”

“네?”

백승무가 의아해하자 정광이 나무랐다.

“사제 검이야. 한 손 거들어야지.”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데 방해만 되지 않을까요?”

“풀무질은 할 수 있잖아. 내가 연단할 때 했던 거 잊었어?”

“……그건 아닙니다만.”

“해. 얻는 게 있을 거야.”

정광이 말한 건 무리한 풀무질로 인한 근육통이었다.

외공 수련과 마찬가지 아닌가.

하지만 도구를 챙기던 철진기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역시 진옥룡이군. 옳은 말이네.”

백승무는 당연하고 정광까지 황당해했다.

하지만 검을 만들 준비를 하던 철진기는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병기에 너무 애착을 가지면 안 되지. 하지만 소홀해도 좋을 게 없어. 자신의 병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고, 그 과정을 돕는다면 더 제대로 된 마음가짐으로 쓸 수 있는 법이야.”

“……사제. 들었지?”

“……네. 사형.”

백승무도 웃통을 벗고 풀무질을 하기 시작했다.

야장들과 달리 허연 피부였으나 근육만큼은 지지 않았다.

그다지 좋지 않은 표정으로 보던 야장들의 눈빛이 달라질 정도였다.

“소협. 제법이구려. 한번 잘해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뜨뜨!”

벌써 불에 데어 호들갑 떠는 백승무였다.

정광은 신경 쓰지 않고 철진기에게 인사했다.

“저 숙소로 먼저 갈게요.”

“알겠네. 이따 보세.”

정광은 철진기가 알려준 방향으로 가서 숙소에 도착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제법 괜찮은 방이었다.

그대로 바닥에 누워 뒹굴던 정광이 씩 웃었다.

‘너무 조심스럽잖아. 담이 약한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광이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십장 이상 떨어진 전각의 지붕 위에 나타났다.

“왜 밖에서 이래요? 들어오시지 않고.”

정광이 허공을 보며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라? 가게요? 그건 안 되지.”

그의 허리춤에서 빛이 튀어나와 허공을 베었다.

허공이 십자로 베어지며 눈을 부릅뜬 복면 사내가 드러났다.

빛이 사내의 몸 몇 군데를 찍었다.

마혈(痲穴)을 제압당한 사내는 나무토막처럼 굴러떨어졌다.

“크윽! 이, 이런 쾌검이라니…….”

정광은 검을 검집에 넣으며 물었다.

“사마련에서 무슨 일이세요?”

“……!”

“아아. 입이 무거운 분이시네.”

“…….”

정광은 사내의 아혈(啞穴)도 누른 뒤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 좋거든요.”

“…….”

사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정광이 하얗게 웃었다.

“그러니까 실망시키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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