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78화 (78/569)

78화

천하제일명검

철혈장의 소장주 철진기가 경악하며 외쳤다.

“철혈무쌍용갑(鐵血無雙龍甲)!”

“네?”

정광이야말로 경악했다.

무슨 그런 촌스러운 이름이 다 있단 말인가!

“이거 도마뱀 내의인데요.”

“무슨 그런 허접스러운 이름을! 철혈무쌍용갑이야! 아버님과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역작이란 말일세!”

“그래서 앞에 철혈을 붙인 거예요?”

“물론이지!”

정광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쇠만 두드려서 그런가. 이름을 짓는 감각이 엉망이구나.’

철혈장에서 만들었다는 건 듣고 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무각사룡의 비늘을 다룰 수 있는 야장이 철혈장 아니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도 철혈 어쩌고는 영…….”

“……이미 정해졌네! 안쪽 가슴 부분에 철혈무쌍용갑이라고 새겨져 있거늘 왜 자꾸 딴소리를 하는가!”

“아. 거기까지 보진 않아서요.”

“……그런 보물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단 말인가?”

“괜찮길래 그냥 바로 입었죠.”

“…….”

철진기가 입을 떡 벌렸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가문의 총력을 쏟아부어 만든 걸작을 저잣거리 포목점에 걸린 내의처럼 취급하다니!

세상에 단둘밖에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을!

‘잠깐. 혹시?’

철진기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경박한 녀석이 ‘그분’일 리는 없지 않은가.

‘백가상단주가 한 벌은 쌍각사룡을 잡은 이에게 줄 거라 했지. 그게 차라리 말이 되는군.’

차라리 말이 되는 것일 뿐, 그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나이에 그런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한편 정광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모랑 아저씨가 돈 좀 썼겠네.’

백가상단이 있는 청해성에서 이곳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다.

그 거리를 왕복하는 시간에 제작 기간까지 고려하면 굉장히 빠른 시간에 완성한 것이다.

“얼마 받으셨어요?”

“……무슨 말인가?”

“도마뱀 내의 만든 비용이요.”

“철혈무쌍용갑!”

“네, 네. 그거요.”

철진기는 정광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조카인 후위진도 참아냈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재물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받았네.”

“토지요? 몇 평?”

“…….”

철진기가 한쪽 벽면을 누르자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여러 개의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꺼내 여니 반경 한 자쯤 되는 무각사룡의 가죽이 있었다.

철진기는 그 위에 촘촘히 박힌 비늘들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남은 부분을 받았지. 이런 강도와 탄성을 가진 금속은 없어.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합금을 연구 중일세.”

정광은 순수하게 탄복했다.

철진기는 그가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이야. 앞으로 나아가시는 분이셨군요.”

“음? 그건 무슨 의미인가?”

“선대로부터 전해져 온 지식만 다듬는 게 아니라 새로운 길을 여는 분이라고요.”

철진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광은 손가락을 꼽으며 말을 이었다.

“돈이며 시간이며 인력이며 엄청나게 들 텐데 대단하시네요.”

“……뭐 새로운 길을 열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 정도라뇨. 그걸 감수할 수 있는 이가 천하에 몇이나 있다고.”

“……사실 그렇긴 하네.”

“철혈장 철혈장 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요. 역시 오길 잘했네.”

철진기의 얼굴에는 어느새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정광은 그 봄바람에 꽃잎들을 띄웠다.

“장주님과 소장주님이 힘을 합치시면 어떤 검이 나올까? 진짜 궁금하네.”

철진기는 애써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눈이 웃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보통 무인들과는 다르군.’

무공을 익힌 이들은 다른 직종의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

힘을 가졌기에 그런 것인데 그 정도가 심한 경우가 많았다.

‘많은 무인이 좋은 병기를 찾아 본장을 방문하지만…….’

부탁할 때는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나 은연중 깔린 천시는 숨길 수가 없었다.

철혈장은 철을 다루기 위해 무공을 익힌 가문이었지만 야장이라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아까 왔던 사마련의 이 공자. 그놈도 그랬지. 그에 비하면 이 녀석은…….’

오만불손하긴 더할지도 모르나 성품 자체가 다르다.

직종을 따지지 않고 경탄할 이에겐 경탄할 줄 아는 놈이었다.

오랫동안 쇠를 두드리며 사람들을 대해온 철진기는 정광의 말과 표정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땀 좀 흘릴 만한 가치가 있는 녀석이군.’

어차피 후위진의 신물을 회수하려면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한다.

거기에 정광의 괜찮은 모습이 더해지니 철진기의 단단한 마음이 열렸다.

“어떤 검이 필요한가? 내 힘써보지.”

* * *

정광의 요구는 간단했다.

“저랑 어울리는 검이요.”

다른 이가 들으면 말장난하냐고 화를 냈겠지만 철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명검을 만들어달라 했으면 화를 냈을 걸세. 자네는 정말 검을 잘 아는군.”

어떤 병기가 됐든 자신에게 맞는 것이 제일이다.

소유자의 신체 조건과 무공, 성정에 맞아야 좋은 병기란 말이다.

정광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랑 어울리면 천하제일명검이 될 자격이 있는 거죠.”

“…….”

“오래 걸리나요?”

철진기는 탁자를 들어 정광을 내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말을 뱉으면 지키는 사내였으니…….

“후우우…… 일단 따라오게나.”

그는 정광 사형제를 이끌고 다른 전각으로 들어갔다.

현판에 적힌 ‘검각(劍閣)’이란 이름답게 그 내부는 검으로 가득했다.

“검의 길이, 형태, 무게는 천차만별이지. 여기 모든 종류의 검들이 있네. 제일 맞는 걸 골라보게나.”

“네.”

정광은 가볍게 답하고 검들을 둘러봤다. 수가 너무 많아 길이와 모양만 고르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백승무는 부러운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철진기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자네도 골라보게.”

“네? 저, 저도 말입니까?”

“그래.”

“……그래도 될지…….”

철진기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의 말이 전음으로 바뀌었다.

-자네가 저 친구 때문에 고생하는 걸 봐서 그러네. 아까도 오만한 말을 순화하느라 애쓰지 않았는가.

-…….

-자네가 쉽게 죽으면 많은 이가 곤란해질 것 같더군. 그러니 부담 없이 골라보게나.

-……감사합니다.

백승무는 정중히 예를 취했다.

검을 주는 것보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준 게 고마워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신이 나서 검을 고르는 백승무를 보며 철진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웃기는 사형제군. 잠깐. 그런데 어느 문파의 녀석들이지?’

그때 정광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딱 봐도 지극한 현기(玄機)가 담겨 있는 것이, 이름 높은 도문(道門)의 검법이 분명했다.

철진기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는 느낌을 받았다.

‘도문의 제자라고? 저런 인간이?’

당연히 사파나 정사(正邪) 중간의 인물이라 생각했거늘! 어찌 이런 일이!

철혈장은 무림은 물론 관과 일반인들까지 상대하는 곳이었다.

다양한 곳에 몸담고 있는 이들과 부대끼다 보면 그놈이 다 그놈처럼 보이기 마련. 정사에 대한 편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아니지. 겉과 속이 같은 게 어디야.’

도복이나 승복을 입고도 민초들을 쥐어짜는 이들이 허다한 게 현실이었다.

그런 이들에 비하면 정광은 오만하고 싸가지가 없을 뿐 아닌가.

물론 그 정도가 좀 심했지만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이들보단 훨씬 나았다.

‘게다가 오만할 자격도 있군.’

대충 휘두르는데도 현기가 철철 넘친다.

게다가 화려할 정도로 멋지기까지 하다.

철진기는 상당한 무공을 익힌 고수였다.

그래서 정광의 검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대단한 무공을 지닌 도문의 청년이라. 게다가 성품에 하자가 있는 이라면…… 아!’

우아하고 멋지면서도 현기가 담긴 무공이라면!

“……곤륜파?”

그 문파의 제자로 명성은 물론 악명도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고 있는 청년은!

“이럴 수가…….”

근래에 귀가 따갑게 들어온 소문의 주인공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진옥룡!”

정광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 여기까지 제 소문이 퍼졌어요?”

“……그렇네.”

“뭐라고 해요?”

“……모르는 게 나을 걸세.”

정광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더 어이없는 건 철진기였다.

“소문과 다른 게 하나 있군.”

“……?”

“자네가 미남인 건 인정하네만, 천하제일미남은 아니지 않은가?”

“아, 이런 실례를.”

정광은 천변만화역용축골마공을 풀었다.

그의 얼굴과 몸이 삽시간에 원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숨기려던 건 아니고요. 귀찮은 일이 많이 생겨서 역용했어요.”

“…….”

“진짠데.”

“……알겠네. 소문이 사실이었군.”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정광은 누가 봐도 천하제일미남이었다.

“그런데 그 역용술은 뭔가? 축골공도 그렇고. 그렇게 신묘한 것이 있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네.”

정광이 대답하려는데 백승무의 외침이 들렸다.

“이거다!”

정광과 철진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백승무가 장검 한 자루를 쓰다듬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사제. 그게 마음에 들어?”

“네! 사형!”

“어디 보자.”

정광이 검을 쥐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되지.”

“……네?”

“여긴 철혈장이잖아. 그런 하품(下品)을 고르면 어떡해.”

“……하, 하품이라니요. 이 정도면 명검 아닙니까.”

정광이 황당한 표정을 지은 뒤 철진기에게 사과했다.

“소장주님. 사제가 철혈장을 모욕했네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딱히 모욕이라고 할 건 없네만.”

“마음도 넓으셔라. 사제에게 진짜 철혈장다운 명검을 주실 거죠?”

“……물론일세.”

정광은 백승무를 보며 씩 웃었다.

“이걸 견본으로 좋은 걸 만들어주실 거야.”

백승무는 상단에서 태어나 자라왔지만 때가 덜 묻은 순수한 이였다.

하지만 정광과 함께한 짧은 시간이 모든 걸 바꿔 버렸다.

즉시 포권을 하며 철진기에게 사죄했다.

“제가 철이 없고 견문이 짧아 크나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괘, 괜찮다니까.”

“아닙니다. 현재의 저는 물론 평생의 벗이 되어줄 명검을 만들어주실 텐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

“그 벗의 이름은 ‘철혈신검(鐵血神劍)’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천하 사람들에게 자랑함으로써 오늘의 죄를 조금이나마 씻고…….”

백승무의 말은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고 길었다.

짧게 간추리면 ‘세상에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명검을 내놔라’였는데 철진기로서는 어떻게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알겠으니 그만하게. 최선을 다해 만들지.”

“……그로써 철혈장의 명성에 누를 끼친 점을 조금이나마…….”

“사제, 그만해. 잘 해주시겠대.”

“아! 감사합니다! 소장주님!”

철진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탄했다.

‘저 녀석이 진옥룡 옆에 붙어 있으면 오히려 세상에 더 해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지나친 생각이었다.

백승무가 아무리 해를 끼쳐봤자 정광만 할쏘냐.

“소장주님. 이게 마음에 드네요.”

정광이 검을 하나 내밀자 철진기가 지친 얼굴로 물었다.

“……여기에 무엇을 더하면 되겠는가?”

“무게요.”

“……?”

“열 배만 더 무겁게 해주세요.”

철진기가 헛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가 야장이 아니라 잘 모르는군.”

“왜요?”

“그 크기와 형태로 무게를 열 배로 늘리려면 현철(玄鐵)을 통째로 써야 해.”

현철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녹여서 만든 철이었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들뿐더러 제련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은?

게다가 그것만으로 검을 만든다?

‘불가능한 일이지.’

누천년을 이어온 무림사(武林史)에 그런 검을 쓴 이가 어디 있는가!

‘아. 한 명 있었나.’

과거 천마신교의 진천마가 그런 미친 짓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소문일 뿐, 진짜로 그랬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 말 이해했는가?”

“네. 열 배 더 무겁게 만들어주시면 돼요.”

“……그러려면 현철로만 만들어야 한다고!”

철진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광은 전생에 진천마였던 남자.

그리고 현철을 통째로 쓴 검을 사용했던 남자였다.

“바로 그거죠. 현철만 써서 검을 만들어주시면 돼요.”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