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철혈장(鐵血莊)
장원의 거대한 크기만큼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다.
관병들이 말과 수레를 끌고 나오는가 하면 부유한 차림새의 유생들이 화려한 검을 들고 희희낙락하는 모습도 보였다.
백승무가 나직이 감탄했다.
“고집 센 장인들이라 들었거늘. 의외로 장사를 할 줄 아는군요.”
“그럴 수밖에. 제대로 된 걸 만들려면 필요한 게 많잖아.”
정광의 말에 백승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에 납품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부유한 이에게 팔아 이문을 남긴다.
이 두 가지는 사업을 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었다.
“헌데 사형. 철혈장에 검을 구하러 오신 겁니까?”
“응.”
“그들이 제대로 만든 병기는 무척 얻기 힘들다 들었습니다만…….”
백승무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그의 사형이 다짜고짜 검 내놓으라고 난동을 부릴까 두려워서였다.
“다 방법이 있지.”
정광은 정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백승무는 불안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정문에 서 있던 위사들 중 단단한 체구의 사내가 인사했다.
“철혈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찌 오셨습니까?”
“검을 얻으려고요.”
“본장과 거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뇨.”
위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철혈장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라 생각한 것이다.
“기성품을 원하십니까, 주문제작을 원하십니까.”
“주문제작요.”
위사는 빙그레 웃었다.
규격화된 모양으로 미리 만들어놓은 것보다 주문을 받아 새로 만드는 게 비쌀 수밖에 없어서였다.
“혹 원하시는 야장(冶匠)은 있으신지?”
“네.”
“누군지 말해주시면 통보한 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미소 짓고 있던 위사는 정광의 말 한마디에 굳어버렸다.
“장주님이요.”
“……네?”
“장주님이 제일 잘 만드시는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러니까 그분이 만들어주셔야 한다고요. 제가 쓸 거거든요.”
“……!”
위사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백승무가 끼어들었다.
“사형! 농이 많이 느셨군요! 하하! 무척 재밌었습니다!”
“농 아닌데.”
“……농이잖습니까! 그렇다고 말하십시오!”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단 말인가.
고개를 돌려 다시 위사를 바라보며 확실히 말했다.
“장주님께 빨리 전해주실래요.”
“……장주님은 아무에게나 병기를 만들어주는 분이 아니오!”
“당연하죠, 장주님인데.”
분노했던 위사는 정광이 동의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대체…….”
“이거 받으세요.”
정광은 품속에서 청록빛을 띤 옥패를 꺼내 위사에게 내밀었다.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것을 노려보던 위사가 눈을 부릅떴다.
“오, 옥기린? 후, 후위진 공자?”
“네. 잘 아시네요.”
옥패를 건네받아 자세히 보니 진품이 확실했다.
위사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정광이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라 그럴 만한 자격이 있음을.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있었으니.
“그, 그분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정광은 후위진의 재수 없는 얼굴을 떠올렸다.
‘친우라 얘기하라고 했었지.’
그런 놈이 친우는 무슨.
그래도 그렇게 말해야 좋은 병기를 얻을 수 있을 거라 했으니 어쩔 수 있나.
정광은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남자였다.
“친우인데요.”
“……!”
“표정이 왜 그래요?”
경악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보던 위사가 얼결에 대답했다.
“그, 그분에게 친우가 있다니 믿을 수가…… 헙!”
다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말은 흘러나온 상태.
정광은 대충 감이 잡혔다.
‘그놈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하긴.
누가 그런 놈을 좋아하겠는가.
정광은 마음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아주아주 많이 순화해서.
“후위진 그 녀석. 진짜 짜증 나는 성격이죠?”
“헉!”
“아니지. 성격이 무슨 잘못이야. 그건 병이죠, 병. 불치병인데 진짜 어쩌려나 몰라.”
위사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흠칫했다.
후위진은 철혈장주의 외손자.
철혈장의 녹을 먹는 일개 위사가 어찌 감히 욕할 수 있겠는가.
아니, 정광이 자신을 시험해 보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벼, 병이라니요. 후 공자는 좋은 분입니다.”
“아하. 이해해요.”
“지, 진심입니다!”
정광은 아예 손을 들어 위사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그 손에 깃든 곤륜의 정심한 내공이 위사의 몸을 따뜻하게 풀어줬다.
게다가 말도 따뜻했으니…….
“정신 차리라고 좀 패줬으니 차차 나아지겠죠. 힘내세요.”
정광에 대한 위사의 평가는 십분 바뀌었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더니 과연!’
정광도 첫인상이 좀 안 좋기는 했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장주가 직접 검을 만들어야 한다. 왜? 내가 쓸 거니까’라고 지껄이는데 어찌 좋게 보이겠는가.
‘그래도 후 공자와 비교하면 성인군자지.’
단 두 번 봤을 뿐인데도 후위진은 정말 재수 없었다.
그런 놈을 패주기까지 했다니…….
‘말뿐이라도 고맙구나.’
후위진은 사마련에 몸담고 있었기에 정파의 구룡사봉에는 못 끼었으나 그 명성이 대단했다.
이미 후기지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고 평가될 정도.
눈앞의 미공자는 팼다고 하지만 후위진이 가만히 맞을 이는 아니다.
그들의 친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말이 분명했다.
“후 공자와 사이가 무척 좋으신 것 같군요. 옥패를 주실 정도로 말입니다.”
“그다지 좋진 않은데요. 성격이며 가치관이며 너무 달라서요.”
정광은 솔직히 말했을 뿐이지만.
위사는 완전히 믿게 되었다.
‘그래. 서로 완전히 달라도 친해지곤 하는 게 사내 아니던가.’
그런 관계일수록 오래 가는 건 물론이요, 생사를 함께 하기도 하니 진짜 친우라 할 수 있으리라.
“금방 전해 드리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위사는 정중히 허리를 굽힌 뒤 장원 안으로 사라졌다.
백승무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다가 전음을 보냈다.
-후위진이 사형의 친우였습니까? 사마련주의 막내 제자 아닙니까?
-친우 아니야.
-아까 분명히…….
-거짓말이지.
-……역시 사형이시군요.
-어째 말이 좀 이상하다?
-……그런데 대체 어떤 관계입니까? 그의 신물까지 가지고 계시고. 평생 곤륜에서만 살아오신 사형께서 어떻게…….
백승무가 쉼 없이 전음을 날리는데 정광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사형. 왜 시선을 피하십니까?
정광은 대답 없이 한 곳을 바라봤다.
백승무의 시선도 자연히 그쪽을 향하게 되었다.
한 청년이 여러 명의 무인과 걸어오고 있었는데 청년의 모습이 무척 특이했다.
‘엄청나게 화려한 옷이군.’
이렇게 휘황찬란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이가 있다니.
백승무도 제법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살아왔건만, 저런 이는 청해성주를 빼고는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청해성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옷이 어울려 보일 정도의 얼굴과 풍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저게 사람이야, 돼지야?’
체형은 물론 얼굴까지.
두 손으로 땅만 짚으면 당장 돼지우리에 던져놔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이렇게 백승무가 경악하고 있을 때, 정광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것 봐라?’
생김새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청년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독특해서였다.
‘꽤 요사한 사기(邪氣)네. 후위진 보다 더한데?’
대충 봐도 이립은 안 됐을 나이.
저 나이에 저 정도 고수라면…….
‘후위진의 사형쯤 되려나.’
사파의 세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젊은 고수는 흔한 게 아니었다.
정광의 생각은 무척 합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왜?’
그때 뒤뚱거리며 걸어오던 청년 또한 정광을 바라봤다.
눈을 크게 뜨는 게 무척 놀란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으니.
‘어쭈. 내공을 끌어 올려?’
청년의 몸에서 사이한 기세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은 매우 은밀했기에 정광만이 알아챌 수 있었다.
‘내 얼굴을 보고 열 받은 건가?’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곧 아닌 걸 알게 되었다.
‘아. 나 역용하고 있지. 그 이유는 아니겠네.’
지금도 괜찮은 얼굴이긴 하나 본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
‘그러면 다른 이유란 건데…… 혹시?’
설마 했건만.
그의 귀에 전음이 들려왔다.
가늘면서도 질척거리는 게 돼지의 것이 틀림없었다.
-천마신교에서 귀인이 오셨구려.
-…….
정광은 꽤 놀랐다.
천변만화역용축골마공(千變萬化易容縮骨魔功)을 펼치고 있어서 마기가 좀 드러난 상태이긴 했다.
지근거리라고는 하지만 그걸 알아채려면 십존쯤 되는 무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정광이 파악한 청년의 수준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단 하나.
‘감각이 유난히 날카로운 놈이군.’
간혹 승부사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들이 그랬다.
저 녀석이 바로 그런 종류이리라.
-왜 답이 없소?
-놀라서요.
-나야말로 그렇소이다. 아까부터 날 노려보던데…… 혹시 나를 치기 위해 십만대산(十萬大山)에서 내려온 것이오?
정광은 확신했다.
청년이 후위진의 사형이라는 것을.
이렇게 심한 병은 흔치 않았다.
-아뇨.
-……그럼 왜?
-그냥 놀러 내려왔는데요.
-……그걸 믿으란 말이오?
-네. 그리고 십만대산이 아니라 다른 산에서 내려왔어요.
청년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나다가 갈무리되었다.
-내가 누군지 밝히지 않아 마음이 상하셨나 보군.
-뭘 그런 걸 가지고. 사마련주님 제자시잖아요.
-……!
-그쪽이야말로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병기를 장만하셨구나.
청년의 옆에 있는 무인이 기다란 나무상자를 들고 있기에 추측한 것이었다.
-어때요? 여기 것, 쓸 만해요?
-……나쁘진 않소.
-그렇군요. 그럼 수고하세요.
-……대체 내 정체를 어떻게 안 것이오?
-전음 그만하죠. 벌써 내 옆을 지나가고 있잖아요.
청년은 정광을 지나쳐 걸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발걸음이야 멈추면 되건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대로 갈 순 없소. 그대가 어떻게 내 정체를 알았는지, 그리고…….
청년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는데 장원 안쪽에서 아까의 위사가 오며 말했다.
“소협. 들어가시지요. 소장주께서 만나보시겠답니다.”
“소장주요? 장주님 아들?”
“그렇습니다. 장주께서 자리를 비우신지라 소장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없다는데 어쩔 수 있나.
정광은 일단 들어가기로 했다.
“수고하셨어요. 가보죠.”
정광은 백승무와 함께 위사를 따라갔다.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돌아보던 청년은 이를 악물었다.
존귀한 신분을 지닌 그가 언제 이런 수모를 겪어봤겠는가.
‘대업에 변수가 되나 싶어 먼저 말을 걸어봤거늘. 아무리 천마신교의 사람이라 해도 내게 감히 이런 결례를!’
청년은 무인들 중 한 명에게 전음을 날렸다.
-마교의 종자다. 왜 중원에 나왔는지 알아봐라.
마교라는 말에 흠칫하던 무인이 결연한 얼굴로 답했다.
-네! 소주!
-하나도 남김없이 샅샅이!
-알겠습니다!
청년의 눈에서 살기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마음속의 살기는 오히려 더 커지고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땐 지옥을 보여주지.’
그는 사마련주의 둘째 제자이자 악상(惡象)이라는 별호로 악명을 떨치는 상소운이었다.
* * *
철혈장의 소장주는 작은 키에 울퉁불퉁한 근육질이었다.
나이는 오십 줄이 넘어 보였는데 손은 물론 얼굴에까지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엄청난 몸에 어울리게 무척 낮고 굵었다.
“위진이의 친우라. 반갑군.”
“안녕하세요.”
“자네는 누구인가?”
정광이 대답하려는데 소장주가 손을 내밀었다.
“아니, 됐네. 알아서 뭐 하겠나.”
“……?”
“검이 필요하다고? 그것도 아버님께서 직접 만드신 검이?”
정광은 소장주가 후위진을 탐탁지 않아 하는 걸 느꼈다.
‘그럴 만도 하지.’
조카라면 귀여운 맛이 있어야 하거늘, 그런 병이 있고 싸가지 없는 놈을 어느 외숙이 좋아하겠는가.
“네.”
“안 됐네만 아버님께선 출타 중이시네. 내가 대신 하지.”
“어? 안 되는데.”
“……무슨 뜻인가?”
“장주님이 제일 잘 만드시잖아요.”
“……내 실력도 나쁘지 않아.”
“음. 그래도 곤란한데.”
정광이 중얼거리자 소장주가 울컥했다.
“좀 전에 사마련의 이 공자가 왔었지. 그도 내 작품에 만족하며 돌아갔네. 더구나 그건 기성품이었어. 자네가 원하는 대로 내 직접 만들어준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그럼 견본 좀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내 실력을 시험해 보겠다는 말인가?”
정광이 입을 여는데 백승무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사형의 말은 소장주님의 작품을 견식할 기회를 주시면 영광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말주변이 없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사제. 내가…….”
“네! 그렇지요! 사형께서도 인정하시는군요!”
정광이 황당해하는 모습을 보며 소장주가 한숨을 쉬었다.
사제라는 녀석이 저리도 애쓰는 걸 보니 정광의 평소 행실이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둘이 괜히 친우가 아니었군.”
“네?”
“아닐세. 따라오게나.”
소장주는 사형제를 데리고 작은 전각으로 들어갔다.
벽면 빼곡히 병기들이 걸려 있었는데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소장주는 그중 한 장검을 들어 정광에게 내밀었다.
“올해 만든 것 중에 제법 괜찮게 나온 걸세. 보게나.”
정광은 검을 잡고 눈앞에 세웠다.
서릿발 같은 한기가 느껴지는 게 보통 검이 아니었다.
‘그럴싸한데.’
팅- 팅- 티딩-
손가락으로 검면 곳곳을 튕기자 날이 휘어지며 맑은 소리를 토했다.
휘잉- 훙-
휘두르고 찔러 보니 무게중심까지 훌륭했다.
“괜찮네요.”
“……내가 괜찮다 했다고 자네까지 그렇게 말하면 어쩌나. 강호의 어떤 검에도 밀리지 않는 수준 아닌가.”
“겉보긴 그런데…….”
“……그런데?”
“강도(强度) 좀 시험해 봐도 돼요?”
소장주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내가 만든 작품인데 강도를 보겠다?’
당장 축객령을 내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야 있나.
잠시만 참았다가 검을 내어주면 후위진의 신물을 회수할 수 있지 않은가.
“……후우우. 마음대로 해보게.”
“네.”
정광은 검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높이 들었다.
그리고 왼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우아했다.
소장주는 의혹 어린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까 검을 시험했던 모습을 보면 검에 대해 잘 아는 게 틀림없거늘. 이건 대체 뭐 하는 짓이지?’
소장주는 곧 알 수 있었다.
정광이 높이 치켜들었던 검을 자신의 왼팔에 내려친 것이다!
쐐애애액-
“억!”
“사형!”
소장주와 백승무가 경악했으나 검은 이미 정광의 왼팔에 닿고 있었다.
쩌엉!
그리고 그대로 부러졌다.
“에이. 너무 약하네.”
“…….”
“…….”
“소장주님. 그냥 장주님 기다릴게요. 괜찮죠?”
백승무는 넋이 나가 있었다.
하지만 소장주는 정광의 왼팔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것은!”
정광의 찢어진 옷 사이로 누런 비늘 같은 것이 보였다.
그것은 쌍각사룡이었다가 무각사룡이 되어버린, 정광식으로 말하자면 도마뱀의 비늘로 만든 내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