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의기소예생(意氣素霓生)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에서 하북성(河北省)까지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더욱이 허창(許昌), 낙양(洛陽), 정주(鄭州), 개봉(開封) 등 하남성의 명소를 모조리 둘러보는 여정이었기에 더욱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햇볕이 따가운 어느 날, 정광과 백승무는 한 곳에 이르게 되었다.
하남성의 최북단이자 하북성 코앞인 안양(安陽)이었다.
정광은 산 중턱을 오르며 풍경을 둘러봤다.
‘소박하니 좋구나.’
곤륜산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작은 산이다.
하지만 작은 만큼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원래 계획대로 그냥 지나갔으면 못 느꼈을 정취이리라.
‘오길 잘했어.’
앞에서 안내해 주고 있는 이십여 명의 장한들 덕분이었다.
정광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산세가 좋네요.”
“히, 히끅!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정광은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떠는 그들을 위로했다.
“왜 그래요. 편하게 말하세요, 편하게.”
따뜻한 말이었건만 장한들의 눈에는 여전히 공포심이 떠올라 있었다.
정광과 함께 걷던 백승무는 고개를 미약하게 저었다.
‘그렇게 패놓고 편하게 말하라니. 사형도 참 어지간하시군.’
장한들의 얼굴은 시퍼런 멍투성이였는데, 어찌나 찰지게 때렸는지 얼굴 전체가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물론 그 흔적들 중 일부는 백승무의 것이었지만, 정광이 한 것과 비교하면 넓은 호수에 돌멩이 하나 던진 정도였다.
장한들의 몰골은 동정심을 유발할 만했으나 백승무는 울화가 치밀 뿐이었다.
‘그러게 왜 얌전히 지나가는 우리를 가로막았냐고.’
장한들은 산적이었기에 직무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하필이면 정광에게 속곳만 빼놓고 다 토해내라고 호통을 치다니!
‘아무도 안 죽은 게 천운이지.’
정광이 손을 쓰기 직전에 백승무가 외친 덕분이었다.
‘손속에 사정을! 생명의 무게를 가벼이 취급하지 마십시오!’
이런 케케묵은 말이 아니었다.
‘살려서 길잡이를 시키시죠! 산채라도 털어야 기분이 풀리실 것 아닙니까!’
이런 지극히 현실적인 외침이었다.
정광을 겪다 보니 제법 경륜이 쌓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이지.’
정광은 ‘사제, 너무 밝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어디 제대로 된 도사가 되겠어?’ 하면서도 승낙했다.
그 얄미운 말을 떠올리자 백승무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오늘만 이런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여정 중 산적은 기본이요, 수적에 시장통의 흑도 패거리까지 참 많은 놈들이 덤벼왔다.
왜?
정광의 차림새가 너무 화려했으니까!
게다가 역용한 얼굴은 왜 하필 순진무구해 보이는 미공자인지!
검을 찼으나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화려한 것.
누가 봐도 정광은 세상 물정 모르는 대갓집 귀공자요, 백승무는 풋내기 호위무사였다.
침 좀 뱉는 이라면 군침을 흘릴 만한 먹잇감일 수밖에.
‘이거 혹시 일부러 저런 모습으로 역용한 거 아니야?’
정광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지금도 산적들에게 주위에 있는 다른 악적들의 소재를 캐묻고 있지 않은가.
“그분들은 재물 많이 모았대요?”
“물론입니다! 정말 나쁜 놈들이거든요!”
“호오. 한 번 들러야겠네.”
“저희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계속 있었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아니, 앞으로도 있을 일이라 당연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음?’
백승무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저 앞의 수풀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운 때문이었다.
백승무는 즉각 내공을 끌어올렸다.
오감(五感)이 활발해지며 기감(氣感)도 확장됐다.
‘……여든, 아흔, 백……. 백이 훌쩍 넘는구나.’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상당히 많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정광이 물어왔다.
“사제. 몇 명?”
“백이 넘는다는 것밖에 파악 못 했습니다.”
“제법 잘 봤네. 준비됐지?”
백승무는 내심 한숨을 쉬며 검을 뽑았다.
몇 번이나 반복해 오다 보니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흐름이었다.
“네, 사형.”
“좋아. 다른 분들도 준비됐죠?”
아까 정광에게 얻어터지며 단단히 교육받은 산적들이었다.
그들은 필사의 각오를 담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공자!”
“좋아요. 일단 여기 지나고요.”
덤불 사이로 나아가자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여기저기 조악한 집들이 널려 있었는데 지나다니는 이들도 꽤 많이 보였다.
하나같이 흉악해 보이는 산적들이었다.
정광이 그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자! 가세요! 협의를 위해서!”
“으아아아아!”
길잡이를 하던 장한들이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그 소리에 놀란 산적들은 급히 병기를 꼬나 쥐고 대응하려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관병의 습격인가 했더니 동료들이 덤비는 것 아닌가!
제일 큰 집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유난히 덩치가 큰 사내가 대감도(大砍刀)를 들고 뛰쳐나왔다.
“이것들이! 영업하러 갔다 와서 뭐 하는 짓이야! 미쳤냐?”
그는 이 산채의 채주였는데 평소 대단한 용력과 잔인함으로 수하들 위에서 군림하던 자였다.
하지만 정광과 비교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 같은 존재일 뿐.
이십여 명의 장한들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그래! 미쳤다!”
“죽어! 그래야 우리가 산다!”
채주는 분기탱천해서 대감도를 휘둘렀다.
“이것들이 감히! 죽어라!”
하지만 그의 적은 따로 있었으니.
어느새 백승무가 비조처럼 떨어져 내라며 일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쩡!
“크흑! 네, 네놈은 뭐냐!”
단 일검에 나동그라질 뻔한 채주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백승무가 대답하려 했으나 정광이 더 빨랐다.
“금권검협(金權劍俠) 백승무요.”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었지만 백승무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사형! 창피하게 자꾸 왜 그러십니까!”
“협행(俠行)에 창피함이 어딨어. 수고해, 사제.”
정광이 말하지 않아도 백승무는 이미 수고하고 있었다.
삼검을 더 펼쳐 채주를 고꾸라뜨린 그는 질풍 같은 기세로 산적들을 휩쓸고 있었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 구사하는 적절한 초식.
세심하게 주변을 살피는 시선과 과감한 결단력까지.
정광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빨리 늘고 있단 말이야. 유모가 보면 흐뭇해하겠어.’
허여민이 봤다면 내 착한 아들이 어쩌다 이렇게 흉악해졌냐고 울었겠지만 정광의 생각엔 그랬다.
‘다들 열심이구나.’
정광에게 두들겨 맞고 전향한 이십여 명의 산적들은 백 명이 훌쩍 넘는 동료들에게 야차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나도 할 일을 해야지.’
정광은 채주가 튀어나왔던 큰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비스듬히 드러눕자 장내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埰)에도 못 드는 산채치곤 제법이네.’
산적들은 겉핥기로나마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이미 쓰러진 채주는 어느 산채에 가도 괜찮은 대접을 받을 정도였고.
‘뭐 그래 봤자지만.’
이십여 명의 전향자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백 명이 넘는 산적들로서도 쉽사리 제압할 수 없을 지경.
그리고 무엇보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을 넘어 군계일호(群鷄一虎)처럼 날뛰는 백승무가 있었으니.
‘그런데 이 녀석은 몇 번을 말해도 고치질 않네.’
정광이었다면 전향자들을 방패로 삼아 한쪽을 맡겨놓고 나머지 적들을 처치했을 것이다.
그사이 전향자들과 그들을 상대하던 산적들이 소모될 터. 느긋하게 도륙하면 편하지 않은가.
하지만 백승무는 그러지 않았다.
전향자들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도우며 적들을 쓰러뜨려 가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대협이란 게 되고 싶나 보군.’
지금이야 산적들보다 훨씬 뛰어난 무공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나면 삼도천을 건너기 딱 좋은 마음가짐이었다.
‘죽지 않게 더 제대로 수련시켜야겠어.’
백승무가 들었다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지도 모를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슬슬 끝나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백숭무의 활약 때문에 사기가 꺾인 산적들이 사방으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지금이 바로 정광이 나설 때!
그는 산적에게서 뺏은 전낭 속에서 철전(鐵錢)을 한 움큼 꺼냈다.
그리고 그대로 던졌다.
쐐애애애액-
철전들은 귀가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사방으로 쏘아졌다.
그것에 맞은 산적들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으아악!”
“끄어억!”
뒤늦게 도망치려던 산적들의 몸이 굳어버렸다.
도망쳤다간 저 꼴이 될 게 뻔했기에.
모두의 시선이 지붕 위에 있는 정광에게 향했다.
정광은 싱긋 웃으며 그들을 독려했다.
“사내답게 싸우다가 쓰러지세요.”
산적들의 눈이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 * *
싸움은 길지 않았다.
전향한 산적들이나 아닌 산적들이나 바닥에 쓰러져 낑낑대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향한 이들은 지쳐 쓰러진 것이고, 아닌 이들은 뼈가 부러지거나 근맥이 잘려 쓰러진 정도일까.
치료를 받아봤자 힘든 삶을 살아야 하리라.
정광은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사제. 너무 잔인하잖아.”
“……네?”
“저렇게 만들어놓으면 어떡해. 차라리 그냥 죽이는 게 낫지.”
“…….”
“그냥 내가 편하게 해줄까.”
정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쓰러져 있던 산적들이 재깍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일제히 외치는 모습이 비장하다 못해 아름다워 보일 지경이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한 번만!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특히 채주의 목소리가 우렁찼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대왕께서 오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전부 내어드릴 테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백승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대왕? 전부 내어준다고?’
숫제 도적 중에서도 대단한 도적으로 취급하는 말 아닌가!
그나마 멀쩡한 산적들은 백승무가 불쾌해하는 걸 느끼자마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자신들의 채주에게 달려들어 몰매를 놨다는 말이다.
“이 멍청한 놈! 대협을 어찌 보고 그런 망발을!”
“죽어! 너 같은 건 살아봐야 세상에 도움이 안 돼!”
채주는 금방 정신 줄을 놓게 되었다.
정광은 아쉬움에 머리를 긁었고.
“사제. 표정 관리 좀 해. 쉬운 일이 어렵게 됐잖아.”
“후우우.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형. 소제가 늘 해오던 일 아닙니까.”
백승무는 채주가 튀어나왔던 큰 집으로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에 얼굴을 찌푸린 것도 잠시, 내부를 둘러보던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략질해 온 듯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는데 그 가치가 상당해 보이는 것 아닌가.
‘겉보기로 이 정도면…….’
숨겨놓은 건 더 많은 법.
그는 방바닥을 소리가 나게 밟으며 걷다가 다른 소리가 들리자 우뚝 멈춰 섰다.
‘여기군.’
정광과 다니며 수많은 산채와 수채, 흑도문파를 털어온 백승무였다.
수괴들이 재물을 어디에 숨기는지는 지겨울 정도로 봐왔다는 말이었다.
콰지직!
바닥을 부수자 숨겨져 있던 재물들이 드러났다.
그것도 예상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어느새 들어와 있던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헛걸음은 안 했네. 챙겨가자.”
“네, 사형.”
백승무는 재물을 쓸어 담은 뒤 어깨에 짊어졌다.
그간 얼마나 많은 곳을 털었는지 봇짐은 무림맹에서 출발할 때에 비해 몇 배로 불어나 있었다.
정광은 눈대중으로 가늠하며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너무 많아졌네.”
백승무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사형. 이제 누가 시비를 걸어도 그냥 지나치시지요.”
“그럴 순 없지.”
“……네?”
“사제는 꿈이 대협이었잖아. 협행을 멈출 거야?”
“……이게 협행입니까?”
백승무는 어이가 없었지만 정광 또한 그랬다.
“당연하지. 협객행(俠客行) 몰라? 당(唐)나라 시대의 시인이자 시선(詩仙)으로 추앙받는 이백(李白)의 시 있잖아.”
알다마다.
그만큼 유명한 시도 흔치 않았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있었던 영웅들의 의기와 호연지기를 노래한 것으로 협객을 칭송할 때 쓰이는 것 아닌가.
백승무는 그래서 더 이해가 안 갔다.
“……그 시와 지금 상황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사제 글공부는 안 했구나. 의외인걸.”
정광이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얼거렸다.
“십보살일인(十步殺一人), 천리불유행(千里不留行).”
열 걸음에 한 사람씩 죽이며, 천 리를 나아가도 멈춤이 없어라.
사람을 죽이진 않고 두들겨 패고 왔으나 천 리가 넘은 지 오래이긴 했다.
“사료불의거(事了拂衣去), 심장신여명(深藏身與名).”
일을 마치고 옷을 떨고 떠나니, 그 몸과 이름을 깊이 숨기네.
의로운 일을 한 후에 드러내지 않는 협객의 마음가짐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들도 털자마자 재빨리 떠났으니 비슷하긴 했다.
“안화이열후(眼花耳熱後), 의기소예생(意氣素霓生).”
술에 취해 눈에 꽃이 피고 귀가 뜨거워지면, 의기가 흰 무지개처럼 생겨나네.
“아. 술은 아직 안 마셨지.”
“…….”
정광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서 가서 협객행을 마무리 짓자고.”
결국에는 술이나 마시러 가자는 말이었다.
* * *
협객행은 하북성에 접어들고 나서야 멈추게 되었다.
정광의 마음이 바뀌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하북성은 천자(天子)가 머무는 연경(燕京)이 있는 곳.
그 치안이 다른 성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정했기에 도적 무리를 만나기 힘들어서였다.
정광은 눈앞의 거대한 장원을 보며 감탄했다.
‘이야.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
크다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보장은 없지만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정광은 옥기린(玉麒麟) 후위진에게 받았던 옥패(玉牌)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어디 효과가 얼마나 있나 볼까.’
이곳은 철을 귀신처럼 다루는 장인들의 가문.
철혈장(鐵血莊)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