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75화 (75/569)

75화

진정한 중원행

허청이 안 된다고 말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정광이었다.

“안 돼요?”

“그래.”

“그냥 도망치면 어떡하시려고요.”

“후우우. 그게 걱정이다.”

허청은 한숨을 내쉰 뒤 중얼거렸다.

“어쩐다. 혼자 보내기엔 도저히 마음이 안 놓이는데…….”

“사부. 다 들려요.”

“음. 그렇다면…….”

고심하던 허청이 말을 이었다.

“내가 같이 갈까?”

“아뇨.”

“왜?”

“잔소리하실 거잖아요.”

허청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만큼 잔소리 안 하는 사부가 어딨더냐.”

“사부도 여길 떠나고 싶으세요?”

“말이라고.”

“왜요?”

“……분에 넘치는 짐을 졌어. 솔직히 조금 두렵구나.”

허청이 무거운 마음을 토하자 정광이 위로했다.

“그럼 떠나세요. 혼자.”

“하아. 끝끝내 같이 가고 싶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허청은 쓴웃음을 짓다가 무겁게 말했다.

“나는 갈 수 없다. 여기서 할 일을 해야 해. 그래, 너라도 자유롭게 날아야지.”

“역시 사부시네요.”

“하지만.”

“네?”

“역시 혼자선 안 돼. 한 명은 데려가거라.”

“누구를요?”

허청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정광의 시선도 그쪽으로 따라갔다.

그 시선들을 받은 백승무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사, 사부. 사, 사형. 왜, 왜 그러십니까?”

정광이 허청을 다시 보며 물었다.

“그냥 혼자 가면 안 돼요?”

“승무는 대협이 되고 싶어 한다. 함께 가면 네가 되도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할 것 아니냐.”

“네? 제가요?”

정광이 황당해하자 허청이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너무 무리인가.”

“당연하죠.”

“어쨌든 무조건 한 명은 같이 가야 해. 홀로 갔다가 돌아오면 매일 두 시진씩 도경을 읽게 할 거다.”

“……!”

정광은 지금 당장 튀어버릴까 하다가 포기했다.

곤륜은 그의 집이었기에.

전생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포근함을 안겨주는 진짜 집 말이다.

‘가끔 들르기는 할 텐데 그때마다 그런 꼴을 당할 순 없지.’

허청이 고민하는 만큼 정광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음…… 적당한 이가 없나.”

“으음…… 없는 것 같은데요.”

“승무는 도저히 안 되겠느냐?”

“네.”

“그럼 네 사숙인 허직으로 하자.”

“사부. 승무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갔다 오너라.”

두 사람의 극적인 타협을 지켜본 백승무는 입을 떡 벌렸다.

‘……왜? 왜 내가?’

그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허청이 부드럽게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승무야. 늦게 입문하여 고생하고 있는 걸 잘 안다. 정광을 따라가거라. 네 앞길을 닦아 줄 것이야.

-……사부. 절 위해서 이러신 것이었군요. 감사합니다.

-또한, 네가 세상일에 밝고 협을 품고 있으니 정광에게도 도움이 될 터. 네 책임이 막중함을 잊지 말거라.

-……안 가면 안 되겠습니까?

허청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백승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편 정광은 허청과의 타협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꼭 데려가야만 한다면 그래도 사제가 낫지.’

그나마 쓸모 있고 부려먹기 편한 백승무였다.

허직 같은 이와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는 보물 아닌가.

이렇게 정광과 백승무의 도망…… 아니, 무림행이 결정됐다.

정광은 지금 당장 떠날 생각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제. 가지고 있는 재물 다 꺼내서 사부님께 드려.”

“네?”

“어서.”

“아, 알겠습니다.”

백승무는 어안이 벙벙했다.

‘다 드리라고? 사형이 뭘 잘못 드셨나?’

어쨌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게 그의 처지. 방구석에 숨겨둔 봇짐을 꺼내서 허청 앞에 쏟았다.

와르르르-

수많은 것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들을 본 허청은 눈을 부릅뜨며 헛바람을 뱉었다.

“허억!”

은전이나 금원보는 눈에 차지도 않을 정도!

보석에, 전표 뭉치에,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많은 재물 아닌가!

허청은 크게 벌어졌던 입을 간신히 움직였다.

“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네가 부자인 건 알았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제도 같이 가니까 사부님께 드려야죠. 사업 운영 자금으로 쓰세요. 본산에도 좀 보내시고요.”

“그, 그러마. 정말 고맙다.”

“뭘요.”

“……헌데 토지 문서는 안 보이는구나.”

“그건 제가 챙겨야죠.”

“음. 그거야 그렇지.”

재물들을 꼼꼼히 확인한 허청은 모조리 챙긴 뒤에 물었다.

“이렇게 다 주면 너희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정광은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도인이 길을 걷는 데 재물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저 발걸음만 옮기면 되지요.”

허청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챙겼나 보구나. 그래, 잘했다.”

자신의 제자를 너무 잘 아는 허청이었다.

정광이 남궁세가가 뿌린 뇌물을 가로챈 것까지는 몰랐지만, 어느 정도의 여비는 갖고 있으리라 짐작한 것이다.

‘둘 다 보내려니 기분이 이상하군.’

정광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허청으로선 물가에 애를 내놓는 기분이었다. 하물며 백승무는 어떻겠는가.

그래도 보내야 할 때였다.

“그만 가거라. 어르신들께는 잘 말씀드리마.”

“괜찮으시겠어요?”

“잔소리를 많이 듣겠지.”

허청이 어깨를 으쓱하자 정광이 작게 웃었다.

“어르신들도 그렇지만 맹주가 날 얼마나 들볶을지 걱정되는구나.”

“힘내세요, 사부님.”

허청이 피식 웃으며 두 팔을 벌리려다가 흠칫했다.

오랜만에 한 번 안아볼까 했지만, 어느새 그보다 훌쩍 큰 제자 아니던가.

허청은 마음으로만 안은 뒤에 뒤돌아섰다.

그런 그의 귀에 정광의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허청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에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강호는 험하다. 항상 몸조심하거라.”

백승무도 허청에게 인사를 한 뒤 고소를 지었다.

‘조심해야 할 건 사형이 아닙니다만…….’

그의 생각에 정말 조심해야 할 건 강호였다.

그렇게 정광과 백승무의 강호행이 시작되었다.

* * *

정광은 무림맹에서 한참 벗어나자 어깨에 들쳐 메고 있던 백승무를 내려놨다.

“사제. 왜 비틀거려?”

“우욱. 토, 토할 것 같습니다.”

“이런. 균형 감각이 그렇게 약해서 어떡해.”

“우웩. 사, 사형께서 나는 것처럼 달리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백승무는 호흡을 가다듬자 조금 나아지는 걸 느꼈다.

덕분에 이제껏 신경 쓰지 못하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형. 봇짐이 축 처진 게 무척 무거운 것 같군요. 뭐가 들어 있길래 그럽니까?”

“재물이랑 이것저것.”

“그건 또 어디서 뺐으…… 구하셨는지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

백승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군요. 사부님께 거의 다 드린 줄 알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강호행을 하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게다가 이것도 있고.”

정광이 중지(中指)를 세우자 그곳에 끼워져 있는 거무튀튀한 철환(鐵環)이 보였다.

“아. 청해성주님이 주신 반지가 있었지요.”

“응. 돈 필요하면 대륙전장에 가서 이걸 내밀면 돼.”

백승무는 완전히 안심하게 됐다.

그러자 다른 의문이 생겼다.

“헌데 사부님께 왜 그리 많이 드린 겁니까?”

“벌여놓은 사업을 운영하려면 자금이 탄탄해야지. 그리고 본산에 계신 분들은 칼바람 맞으시며 풀 쪼가리만 드시고 계실 거야. 뭐라도 해드리는 게 도리잖아.”

“……도리요?”

“응. 뭐가 잘못됐어?”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다만 그런 당연한 말을 정광이 했다는 게 문제였다.

‘혹시 또 뭔가 계산을 하신 건가?’

의심하던 백승무는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사형은 본문 사람들에겐 아낌없이 베풀었구나.’

돈은 물론 영약까지 물 쓰듯이 뿌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어머니인 허여민에게 들었던 말도 생각났다.

‘사형은 자기 사람에겐 남들과 다르게 대한다고 했었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백승무도 곤륜의 제자였으니 정광의 사람 아닌가.

받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뭔가 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사부님 말씀대로 사형이 어긋난 길로 나가지 않게 도와야 해.’

잘만 된다면…….

세상은 전례 없는 협객을 만나게 되리라.

정광이라는, 사욕을 위해 살지만 그것이 곧 협이 되는 협객을.

백승무는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사형.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우선 이것부터.”

정광이 봇짐을 건네자 백승무가 기운차게 짊어졌다.

“오오. 역시 꽤 무겁군요.”

“앞으로 더 무거워질 거야.”

“네? 무슨 의미입니까?”

“재물을 계속 채워 넣을 거라고.”

“……아. 네.”

정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백승무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니까 잘 불려봐.”

“……하아아. 알겠습니다, 사형. 그런데 어디로 가실 겁니까?”

“하북(河北).”

“그쪽에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뭐 겸사겸사. 들르고 싶은 데 있어?”

멈칫했던 백승무는 수많은 명승고적(名勝古蹟)을 줄줄이 뱉었다.

청해성에서 나고 자란 그가 언제 중원에 와봤겠는가.

어려운 어른들도 없는 상황, 이 기회에 막연히 꿈꿔왔던 모든 곳에 가보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사형. 마음이 들떠서 너무 많이 떠들었습니다.”

“괜찮아. 나도 가보고 싶었던 곳들이니까.”

“……!”

“천천히 가보자고.”

“네! 사형!”

정광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백승무를 보며 웃었다.

‘그렇게 좋은가.’

사실 정광도 좋았다.

이렇게 마음이 내키는 대로 중원 유람을 하다니.

전생에는 꿈도 못 꾸던 일 아닌가.

기분이 좋아지니 호기가 솟았다.

“좋아! 술부터 한잔하자!”

“네! 사형! 네에에에?”

“아. 다른 데에 먼저 들렀다가.”

* * *

정광은 포목점에 가서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비단으로 지은 경장(輕裝)이었는데 그 재질이며 모양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좀 불편하네.’

환생한 뒤 근 이십여 년을 도복만 입고 지내다 보니 어색했지만 어쩔 수 있나.

제대로 먹고 즐기려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을.

하나를 얻기 위해선 하나를 버려야 하는 법. 아니, 하나를 버렸으니 여러 개를 얻고야 말리라!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데.

백승무가 주저하다가 불렀다.

“저…… 사형.”

“응?”

“지금 변복을 하셨잖습니까.”

“그렇지.”

“별로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만.”

“왜?”

“사형처럼 잘생긴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금방 소문이 퍼질 겁니다.”

“아. 맞네.”

하북으로 가려면 개방의 총타(總舵)가 있는 개봉(開封)을 지나야 한다.

새까맣게 깔린 거지 떼가 금방 정광을 알아볼 터. 무림맹에 소문이 흘러들어 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건 곤란한데.’

어찌할까 생각하던 정광은 제일 편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마기(魔氣)가 좀 드러나겠지만 무림맹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으로 흩었다.

그 상태로 천변만화역용축골마공(千變萬化易容縮骨魔功)을 펼치자 느낌이 왔다.

‘그럭저럭 된 것 같은데.’

정광은 확인차 백승무에게 물었다.

“어때?”

“……실례지만 뉘신지……?”

백승무가 황당한 얼굴로 되묻는 걸 보니 아주 제대로 됐다.

“네 사형.”

“……저, 정말 사형 맞으십니까?”

“보고도 몰라?”

백승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보고도 모르니 물은 것 아닌가!

‘세상에 이런 역용술이 있다니!’

순식간에 사람이 바뀌었다.

얼굴은 물론 체격까지!

이건 역용술 따위가 아니라 사술(邪術)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본산에서는 이런 역용술도 가르쳐 주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

정광이 전생에 만든 것이었다.

한편, 정광은 사제가 혼란에 빠지건 어쩌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걸 뒤늦게 깨달은 백승무가 다급히 외쳤다.

“사, 사형! 같이 가셔야지요!”

“어서 따라와.”

“네!”

백승무가 허겁지겁 정광을 쫓았다.

그의 사형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볍게 걷고 있었다.

실제로 정광의 마음도 그만큼 가벼웠다.

‘어디 가볼까.’

신분까지 완벽하게 감춘 정광은 거칠 것이 없었으니…….

지금부터가 진정한 중원행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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