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74화 (74/569)

74화

세상도 품을 수 없는 존재

백승무는 새삼 깨달았다.

‘역시 사형은 도사가 아니구나.’

아니, 아닌 정도가 아니었다.

속세의 때를 탈 만큼 탄 그조차 놀랄 정도 아닌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이 정도일 줄이야…….’

백승문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무공이 놀랄 정도로 빨리 느는 건 고마운 일이었으나 늘어나는 실력만큼 때도 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고수야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협이 되기는 요원한 일 아닌가.

‘계속 사형을 따라야 할까?’

곧 맹주 선출이 끝난다.

그때가 되면 본산으로 돌아가는 인원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포함되어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형.”

“왜?”

입을 열기가 어려웠지, 뒷말을 꺼내기는 쉬웠다.

“저는 솔직히…….”

그때, 정 자 배의 대사형인 정우가 다가왔다.

“사제들은 오늘도 힘이 넘치는군.”

“대사형, 오셨어요?”

“정광, 네게 물어야 할 게 있어서 왔다.”

정우는 약간 피곤한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개방의 유 소협에게 들으니 생각보다 고아들이 많더구나. 되도록 많이 거두어 돕고 싶은데 자금이 걱정이구나.”

여러 문파에서 돈을 지원한다곤 하나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일이다.

지금 당장 여유가 된다고 많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에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문제였다.

정광은 당연히 냉정하게 판단했다.

“많이 받으면 되죠.”

“……나중에 힘들어지지 않을까?”

“그땐 아이들이 먹고 입는 걸 줄이면 되죠. 지금처럼 위험하게 살게 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나요.”

“……흠. 그건 그렇지.”

어리고 힘없는 고아들은 거지보다 못한 삶을 산다. 오히려 거지들에게 착취당하는 게 현실이었다.

최소한 고아원에 들이면 신체적 위협이라도 면하게 해줄 수 있으리라.

“지금 애들 건강 안 좋죠?”

“맞다. 한동안 많이 먹이고 푹 재워야 할 거야.”

“애들 몸 추스르면 일 시키죠.”

“……일을? 글을 배우고 싶으면 글을, 무공을 배우고 싶으면 무공을 가르치기로 하지 않았더냐.”

“가르치더라도 몇 명이나 제대로 배우겠어요. 대부분 얼마 못 가 포기할걸요.”

문(文)이나 무(武)나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타고난 자질이 다르고 원하는 삶도 다른 법. 모든 아이에게 그런 길을 걷도록 하는 건 책임 없는 강요였다.

정우는 그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배우길 원하지 않을 아이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언제까지 먹여 살릴 수는 없으니까 일도 가르치는 거죠. 뭐, 거지가 되고 싶다면 개방에 소개해 주고요.”

“……그럴 아이들은 없을 것 같구나.”

“어쨌든 그래야 빨리 독립해서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당장 어르신들께 말씀드리고 세세한 방법을 짜보마.”

“아. 그리고 애들 독립하면 기부금도 받아야 해요.”

뜻밖의 말에 정우가 멈칫했다.

기부금이란 주길 원하는 이에게 받는 것이지 강제로 받는 게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또 문제가 있었으니.

“그 아이들이 훗날 벌어야 얼마나 벌겠느냐?”

“그래도 받아야죠. 도움을 받았으면 돌려줘야 한다는 걸 머릿속에 심어줘야 해요.”

“아!”

푼돈이라도 받아내려는 거였건만.

정우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래. 악에 받쳐서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있는 아이들이지. 녀석들 잘못은 아니지만 바로잡아 줘야 해.”

그 돈은 그들 뒤에 들어올 고아들에게 쓰일 터.

좋은 선순환이 될 게 분명했다.

정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사제군! 이리도 생각이 깊다니!”

백승무도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사형이군! 그렇게 또 비용을 충당할 생각을 하다니!’

정우는 기쁜 얼굴로 정광을 칭찬한 뒤 사라졌다.

그와 달리 백승무는 복잡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사형은 정(正)인가 마(魔)인가. 정말 모르겠구나.’

자신의 사욕을 위해서 일을 벌이지만, 그 일은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뿐이었다.

‘의도는 선(善)하지 않지만 결과는 선(善)하다. 이것도 협행이라 할 수 있을까?’

백승무의 마음속에서 두 목소리가 싸웠다.

-본질은 선이 아니잖아.

-그래도 말뿐인 선보단 낫지.

-대협이 되고 싶던 것 아니었어?

-대협이 대체 뭔데?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나만큼은 확실했기에.

‘어쨌든 사형은 세상에 도움이 되고 있어.’

정광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틀렸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게 사형의 협(俠)이겠지.’

그에 비해 백승무 자신은?

무엇이 협인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아직 몰랐다.

‘사형과 함께하다 보면 알게 될 날이 올지도…….’

작은 깨달음과 결심.

앞으로도 계속 화두로 삼고 정진해야 하리라.

백승무의 가슴 속에서 강한 열망과 다짐이 일어났다.

‘가리라. 반드시 해내리라.’

하지만 그에겐 당장 더 급한 일이 있었으니.

정광이 손가락을 들어 지풍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사제. 일각(一刻) 지났어. 다시 수련 시작해야지.”

* * *

무림맹주를 선출하는 날 아침.

맹주가 맹의 주요 인물들과 회의를 하는 의혈각(義血閣)에 사람들이 모였다.

구파일방(九派一幇)과 칠대세가(七大世家)는 물론이요, 육방칠단삼장(六幇七團三莊)까지 포함된 총 서른세 개의 문파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학창의(鶴氅衣)를 걸친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단상 위에 올랐다.

대대로 머리가 뛰어나, 강제로 무림맹 군사 역할을 도맡아온 제갈세가의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무림맹의 군사를 맡게 된 제갈문형입니다.”

그는 무림맹의 설립 목적과 사마련이 발호하는 현 상황을 설명한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부터 맹주 선출을 시작하겠습니다.”

무림맹에서 맹주를 뽑는 방법은 간단했다.

후보들의 연설을 들은 뒤 지지하는 이의 이름이 불렸을 때 거수를 하면 됐다.

남궁화인과 팽수관이 저마다 할 얘기를 끝내자 제갈문형이 말했다.

“남궁 대협을 지지하는 문파의 대표는 거수해 주십시오.”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팽 대협을 지지하는 문파의 대표는 거수해 주십시오.”

아까보다 많은 손이 올라왔다.

제갈문형은 셈을 마친 뒤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궁 대협, 열세 분. 팽 대협, 열여덟 분. 기권은 두 분이군요.”

그의 손이 팽수관에게로 향했다.

“이번 무림맹주로는 하북팽가의 팽수관 대협이 선출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팽수관이 단상 위에 섰다.

그의 취임사는 짧고 강렬했다.

“강호를 위해! 강호를 위해 피 흘릴 우리 맹도들을 위해! 나 팽수관은 최선을 다할 것을 천명하오! 많은 지도와 가르침을 주시길!”

“우와아아아!”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팽수관을 지지하지 않던 문파의 이들도 안색이 그리 나쁘진 않았는데, 이는 그의 성품이 모나지 않고 호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팽수관이 주위를 돌며 인사를 하자 정중히 말했다.

“지금까지는 맹주를 지지하지 않았으나 앞으론 다를 것이오.”

“하하하.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부족한 사람이니 많이 도와주시면 고맙겠소이다.”

팽수관은 모두를 끌어안았다.

장내의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맹주.”

“오. 남궁 대협.”

경쟁자였던 남궁화인이 팽수관에게 다가와 축하했다.

“미력한 힘이지만 전심전력으로 돕겠소. 맹주의 뜻을 마음껏 펼치시오.”

“하하하. 고맙소이다, 남궁 대협.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소.”

이렇게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한 모습이었지만, 서로의 속마음은 완전히 달랐으니…….

남궁화인은 이를 갈았다.

‘맹주가 되었으니 다 끝난 것 같으냐? 철저히 괴롭혀 주마. 맹주직에 오른 걸 후회할 정도로.’

팽수관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은 뒤집혔겠지. 네가 어떻게 나오든 맞서서 이겨낼 것이다. 와봐라.’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대결.

팽수관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지금은 비록 창끝이 무디나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로워질 테니까.

‘적은 남궁세가뿐만이 아니야.’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화산, 종남, 공동 등 꽤 많은 문파였다.

‘앞으로가 더 문제지.’

이해관계에 따라 남궁세가에 포섭될 문파들이 얼마나 생길지 몰랐다.

‘그걸 막기 위해선 곤륜을 더 단단히 잡아야 해.’

곤륜만 잡으면 당가, 개방, 악가를 비롯해 많은 문파가 딸려올 것이다.

설령 그렇게까진 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의 중립은 지켜줄 터.

팽수관은 곤륜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한 사람을 힐끔 봤다.

사심 없는 얼굴로 축하하고 있는 허청이었다.

‘보기 드문 참된 도사지.’

그렇다고 꽉 막히지도 않았다.

말이 잘 통하는 자라 얼마나 다행인지.

약조한 대로 팽수관이 정도에 어긋나는 일만 안 한다면 계속 지지해 주리라.

‘그리고 진옥룡.’

맹의 일반 무인들과 후기지수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신룡(新龍)이다.

그만 잡으면 밑으로부터의 지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으리라.

팽수관은 창밖을 바라봤다.

곤륜파의 숙소가 있는 방향이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곁에 둬야 해.’

팽수관은 현명한 이였다.

정광이 기분 나빠하지 않게 목줄을 채울 방법을 강구해 낼 만큼.

‘하하. 곧 보세나.’

팽수관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권했다.

“자. 이제 대연무장으로 갑시다.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지 않소.”

“하하. 그래야지요.”

팽수관은 의혈각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선두에 선 팽수관을 보자 예를 취하며 외쳤다.

“맹주! 축하하오!”

“맹주! 축하드립니다!”

팽수관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답례했다.

그는 단상 위에 올라 연설을 한 뒤 크게 외쳤다.

“지금부턴 즐깁시다! 맹의 돈이 아니라 부인 몰래 챙겨둔 내 비자금으로 사겠소!”

“와하하하!”

팽수관은 바가지 긁히게 될지도 모르니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사람들은 크게 웃으며 기꺼이 그러겠다 답했다.

팽수관은 술 항아리를 들고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 많은 사람과 일일이 술잔을 부딪쳐가며.

그런데…….

‘어디 간 것이지?’

정광이 안 보이는 것 아닌가.

사부인 허청에게 물어보려 하는데 그 또한 없었다.

팽수관의 눈이 커졌다.

‘……설마?’

* * *

백승무가 놀란 얼굴로 정광에게 물었다.

“사형.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러는 사제는 뭐 해. 연회에 가서 즐기지 않고.”

“지쳐서 그곳까지 걸어갈 힘이 없습니다.”

“오오. 수련 열심히 했구나.”

백승무는 기가 막힌 얼굴이 되었다.

그 수련을 시킨 게 누군데 그런 말을!

‘이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백승무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정광에게 물었다.

“사형. 정말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겁니다만…….”

“뭔데?”

“……설마 도망가시려는 겁니까?”

“아니.”

“그런데 짐은 왜 싸십니까?”

“세상을 둘러보려고.”

“……그게 그거잖아요!”

“그런가?”

정광은 봇짐에 짐을 다 쑤셔 넣은 뒤 어깨에 메었다.

백승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말 가시려는 겁니까?”

“응.”

“어찌 이리 갑자기 떠나십니까? 최소한 사부님께 말씀은 드리고 가셔야지요.”

“걱정하지 마.”

“네?”

“지금 오고 계시니까.”

“……?”

잠시 뒤, 밖에서 허청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네. 사부.”

허청이 문을 열고 들어와 정광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정광이 어깨에 멘 봇짐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왠지 이럴 것 같더니만.’

원래 제멋대로인 제자였다.

이제껏 무림맹에 붙어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로.

“맹주 선출이 끝났으니 그만 가려는 것이냐?”

“뭐 겸사겸사요.”

“분명 팽 가주가 열세였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큰 차이로 이겼구나.”

“그러게요.”

“……다 네 덕이겠지. 정말 고생 많았다.”

“제가 뭘 했다고 그러세요.”

허청이 싱긋 웃었다.

“뭔진 모르지만 뭔가 했다는 건 안다.”

“와아. 사부님, 도 많이 느셨네요.”

“휴우우. 그러게 말이다. 이것도 너 같은 제자를 얻은 덕이겠지.”

허청의 한숨 섞인 말에 백승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정광이 노려보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광아. 애꿎은 승무를 잡지 말고 나를 봐라. 네가 여기에서 할 일이 다 끝났다 생각하는 것이냐?”

“대충요.”

“그리고 맹주가 지룡단주 자리를 떠넘길까 봐?”

“그런 것도 있죠.”

“그냥 거절하면 되지 않느냐.”

“거절하면 다른 자리를 만들어서 내밀겠죠.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는 그런 것으로요.”

“그 정도면 너도 할 만할 텐데.”

“밖이 더 할 만한 일들이 많거든요.”

“…….”

정광의 말대로였다.

무림맹이 정파무림의 중심이라 하나 그래 봐야 한 조직.

이 넓은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간 얼마나 답답했을꼬.’

곤륜에서 십구 년이나 갇혀 있다가 겨우 나온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까지 한곳에 메여 있으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정광은 곤륜이, 무림맹이 품에 안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존재가 아니었다.

아니, 세상도 품을 수 없을지도.

“가면 안 돼요?”

정광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묻는 말에 허청이 웃었다.

“하하하. 안 된다 하면 안 갈 것이냐?”

“으음…….”

“괜히 생각하는 척하지 말아라. 이 사부는 마음을 정했느니라.”

“……?”

허청은 정광을 바라봤다.

그 눈길은 더없이 따뜻했다.

“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 나는 언제나 네 편이라 말하지 않았더냐.”

정광이 씩 웃었다.

역시 사부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허청의 이어지는 말에 정광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도…… 그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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