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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73화 (73/569)

73화

협행(俠行)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 산다.

하지만 그래 봐야 빠져나가는 돈이 더 많은 게 보통이다.

설령 돈이 모여봤자 쥐꼬리만 한 수준.

돈을 가장 확실하게 버는 방법은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정광은 그럴 만한 돈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실행할 만한 인재도 있었다.

-사제가 생각해 봐.

-……네?

-내가 일단 시작을 했으니 사제가 이어받아서 하라고.

-……!

백승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정광이 덧붙였다.

-당장의 벌이만 생각하지 말고 길게 봐. 돈 말고 다른 걸 벌 수도 있잖아.

이마를 좁히고 생각하던 백승무가 물었다.

-……설마 해서 그럽니다만. 혹 명성이나 평판 같은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잘 아네.

백승무는 정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사형께서 그런 걸 신경 쓰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누가 내 이름으로 하래? 곤륜의 이름으로 해야지.

-아! 중원에 본문의 기틀을 다지시겠다는 말씀이군요.

-기틀씩이나 할 건 없고. 최소한 입김이 먹힐 정도로는 닦아야지.

곤륜은 변경에 있다 보니 중원에서의 입지가 무척 약했다.

구파일방의 하나로 대우받기는 하나, 실질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광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을 떠올렸다.

‘덕분에 재밌긴 했지만 본문에는 좋은 일이 아니었지.’

언의진을 연모하던 청년들이 정광을 질투해서 벌어졌던 일.

곤륜의 어른들이 있는데도 시비를 걸었던 것이 그 단적인 예였다.

백승무는 정광의 뜻을 이해했다.

-그렇지요. 지금은 팽가와 관계가 좋으나 앞으로는 모르는 일. 미리 준비해 놓는 게 맞습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하지 않게 영향력을 키워야 합니다.

-사제. 굉장히 세속적으로 계산하네.

-……그러시는 사형은…….

-칭찬이야.

-……하아. 감사합니다.

정광은 백승무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전음을 이었다.

-정파는 명분이 중요해. 미리 쌓아놓자고. 본문이 무얼 해도 웬만하면 지지를 받을 수 있게.

-좋은 일을 벌이라는 말씀이지요?

-물론.

-……좋은 일인데 왜 음모를 꾸미는 것 같은 느낌인지 모르겠습니다.

정광은 기분 탓이라고 위로해 준 뒤 사람들을 둘러봤다.

기다리던 유정풍이 냉큼 물었다.

“아우. 자네 사제와 무슨 전음을 그리 대놓고 나눴나?”

“좋은 얘기요.”

“어떤?”

“같이 협행(俠行) 좀 하죠.”

협의가 넘쳐 의룡이라 불리는 유정풍은 먹이를 냉큼 물었다.

“좋지! 단, 진짜 협행이어야 하네.”

“협행에 진짜 가짜가 어디 있어요. 누가 판단하고.”

“……음. 아우, 내가 실언을 했군. 생각이 짧았어.”

정광은 유정풍이 고민하게 놔둔 뒤 장이 모자를 바라봤다.

“하실 거죠?”

“가, 감사합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광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백승무를 바라봤다.

“사제도 열심히 할 거지?”

백승무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그런데 뭐 해? 빨리 움직여야지.”

“……네?”

정광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사제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잖아. 장 소협이랑 어머님 모시고 가서 반점 자리부터 정해야지.”

* * *

정광은 먼저 곤륜의 어른들을 만나 그의 생각을 설명했다.

“어떠세요?”

운학이 빙긋 웃더니 대답했다.

“이제부턴 네 사부에게 묻거라.”

“와아. 사숙조님, 이제 일 안 하시려고요?”

“무어라? 하하하. 그래, 네 말이 맞다. 이제 우리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

운학을 비롯한 운 자 배 도사들이 껄껄 웃었다.

정광은 동정의 눈빛으로 허청을 바라봤다.

‘당분간 곤륜에 돌아가기는 힘드시겠네.’

허청이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구나. 네 생각대로 하자. 다만…….”

“……?”

“본문의 이름을 앞세우면 많은 시기를 받을 것이다. 그게 문제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요.”

“그래도 짐은 나누면 나눌수록 가벼운 것 아니더냐. 사람들에게도 더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정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부는 말하기 편하다니까.’

그의 입에서 준비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네. 개방과 당가도 끼워야죠.”

“악가도 넣자. 관과도 연이 굵은 집안이니 도움이 될 게다. 그들도 표국 사업의 확장을 위해 인심을 얻고 싶어 할 것이야.”

얼마 뒤, 곤륜파의 처소에 사람이 모였다.

사천당가 가주 당영중, 산동악가 무리의 수장 악형익, 개방 방주 양회였다.

그들은 허청의 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의술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 민초들이 본가에 대해 가진 편견을 씻을 기회군. 하겠소이다.”

“관과의 조율과 아이들 교육은 맡겨주시오. 적잖은 지출이 예상되나 본가에도 이로운 일이오.”

“본방은 협(俠)을 쫓는 무리. 기꺼이 나서겠소이다.”

당영중과 악형익이 양회를 바라봤다.

오직 그만이 얻게 될 이득을 말하지 않아서였다.

그들의 시선이 제법 따가웠나 보다. 양회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마지못해 말했다.

“……뭐, 진옥룡 그 녀석이 반점에 구걸하러 오면 넉넉하게 챙겨준다고 하니까…….”

곤륜을 포함한 네 문파의 뜻이 합쳐졌다.

모든 이들이 바빠졌지만 제일 바쁜 건 역시 정광이었다.

그는 방에 앉아서 열심히 말했다.

“유 소협. 그때 그 거간꾼들을 모아주세요.”

“알겠네, 아우.”

거간꾼들이 모이자 정광이 선언했다.

“놀고 있는 땅에 이것저것 지을 거예요.”

통이 큰 정광이었다.

이번엔 또 얼마나 돈을 쓸 것인가!

거간꾼 중 한 명이 침을 꼴깍 삼킨 뒤 물었다.

“이것저것이라 하시면……?”

“말 그대로예요. 반점, 의방(醫房), 도관(道觀), 고아원…….”

정광의 말이 이어질수록 거간꾼들의 입이 벌어졌다.

“저…… 다른 건 그렇다 치고 그 금싸라기 같은 땅에 도관이라니요?”

“그건 작게 지을 거예요. 산에 있는 도관까지 다니기 힘든 분들 있죠? 그런 분들이 잠시 들러서 축원하고 간단한 제를 지낼 수 있게요.”

“……하오면 고아원은……?”

“고아들을 거두어 기르는 곳이죠.”

“……그 뜻을 모르는 게 아니라 왜 그런 비싼 땅에…….”

“그런 땅만 가지고 있으니까요.”

거간꾼들은 내심 감탄했다.

정광은 진짜 그 이유로 말한 것이었으나 그들에게는 다르게 다가온 것이다.

‘그릇이 정말 크군. 하긴, 수수료를 넉넉히 챙겨줄 때부터 알아봤지.’

‘그래, 고아라고 변두리에서 살아야 하는 법이 있나. 진옥룡이라더니 정말 선인이로구나.’

정광은 그들이 만족할 만한 금액을 챙겨줬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목장(木匠)들은 물론 자재상들까지 섭외했다.

일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곤륜이 땅을 대고 건물을 짓는다.

당가는 의방에 의원을 보낸다.

개방은 필요한 사람들을 모은다.

악가는 관에서 잡음이 나오지 않게 하고 고아원 아이들을 교육할 이들을 파견한다.

이는 쉬운 사업이 아니었다.

처음에 돈을 대고 사람을 넣었다고 끝나는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다 있었으니.

그럴듯한 일을 벌이면 거기에 숟가락을 얹고자 하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

이에 탁월한 자질을 가진 하북팽가주 팽수관이 제일 먼저 참여할 의향을 비쳤다.

허청이 이 소식을 전하자 정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팽가는 끼면 안 되죠.”

“왜 그렇느냐?”

“에이. 아시면서.”

팽수관이 맹주가 되고 나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에 대비해 곤륜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벌인 일 아니던가.

허청이라고 그걸 모르지는 않았으나 어떻게 거절할지 난감했을 뿐이다.

“후우우. 결국 속 보이는 얘기를 해야 하는 건가.”

“아예 대놓고 얘기하시면 오히려 편하게 받아들일 거예요.”

“팽가주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렇겠지. 그렇게 해야겠구나.”

허청은 팽수관을 만나서 있는 그대로 말했다.

“가주. 내 솔직히 말하겠소. 이 일은 본문의 이름으로 진행하고 싶소이다.”

“호오. 어째서 그렇소이까?”

“이런 말 하긴 미안하나, 안전장치를 만들기 위함이오.”

“……내가 약조를 지키지 않을지 몰라 곤륜의 발언권을 키우겠다는 말이오?”

“그렇소이다.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

인상을 찡그리고 침묵하던 팽수관이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좋소이다. 사실 나도 내가 어찌 변할지 모르는데 곤륜이 나를 어찌 믿겠소. 내가 이상한 길로 가면 잡아주시오.”

“물론이외다.”

“단.”

팽수관이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이며 무겁게 말했다.

“내가 맹을 이끌고 걷고자 하는 길이 잘못되지 않았을 땐, 곤륜이 나를 보호해 줘야 할 것이오.”

“약조하겠소이다. 헌데 팽가주는 본문을 믿으시오?”

“후우. 솔직히 완전히는 아니외다.”

“그런데 어찌?”

“그래도 제일 믿을 만한 곳이 곤륜이라 그러오. 개방도 그렇지만 어차피 곤륜과 손을 잡지 않았소이까? 한번 잘해봅시다.”

허청이 고마운 시선으로 바라보자 팽수관이 덧붙였다.

“아. 빼먹을 뻔했군. 조건이 하나 더 있소.”

“무엇이오?”

“나처럼 한 발 걸치려고 하는 문파들이 많을 터. 그들이 지원하는 만큼 본가도 지원하겠소이다. 전면에 나서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모양새가 빠지면 곤란하지 않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허청은 승낙했다.

대신 그도 조건을 하나 붙였다.

“제자 녀석이 수련회에서 이만 빠지겠다 하오. 팽가에서 온전히 맡아서 진행해 주시오.”

“흐음…….”

팽수관은 정광을 떠올렸다.

얽매이기 싫어하는 그 성정을 보면 지금껏 해온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진옥룡이 빠지면 실망하는 이들이 많겠지. 하지만 수련법은 이미 모두 배운 상태. 이제부턴 본가가 주도해서 하는 게 좋다.’

수련회에 참여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팽가의 영향력을 키울 좋은 기회 아닌가.

“아쉽긴 하지만 본가에는 좋은 일이군. 기꺼이 그렇게 하겠소이다.”

“맹주 선출이 끝나고 그랬다간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 미리 말씀드렸소.”

“동의하오. 지금 공표해 버리는 게 낫지. 그렇게 합시다.”

두 사람은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서로 간에 얻을 건 얻고, 내줄 건 내준 기분 좋은 거래였다.

* * *

소문은 빨랐다.

삽시간에 무림맹은 물론 인근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정도로.

무림맹에서는 끼어들고 싶은 문파들이 곤륜파 숙소를 방문했다.

인근의 사람들은 곤륜을 칭송하며 더 좋아질 환경을 기대했다.

정광은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 쓰지 않고 백승무의 무공을 지도하고 있었다.

“사제. 오른팔이 두 치 내려오고 왼쪽 무릎은 반 푼 덜 꺾였어.”

“헉. 헉. 그, 그런 걸 어떻게 다 보시는 겁니까?”

“보이니까.”

“헉. 헉. 괜한 걸 물어서 죄송합니다.”

그 후로도 계속 유룡검(遊龍劍)을 펼치던 백승무는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버렸다.

“크윽. 사, 사형. 조금만 쉬어도 되겠습니까?”

“일각(一刻)만.”

“가, 감사합니다.”

백승무는 누운 채로 하늘을 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사형. 곤륜에는 구름이 많지요?”

“엄청나게 많지. 왜? 보고 싶어?”

잠시 주저하던 백승무가 넋두리하듯 말했다.

“아직 도호도 못 받았고, 일주문 안에 들어가 본 적도 없어서 그런 걸까요. 아직도 제가 곤륜의 제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나도 내가 곤륜 제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음. 그건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만.”

정광이 손가락을 들어서 지풍(指風)을 날리자, 백승무가 민첩하게 검면으로 막아냈다.

띵-

“하하하. 사형, 이 사제도 많이 늘지 않았습…… 커헉!”

뒤이어 날린 지풍에 이마를 얻어맞은 백승무가 울상을 지었다.

“왜 그리 손속에 사정이 없으십니까?”

“진짜 사정이 없었으면 사제 이마에 구멍이 뚫렸지.”

“아. 그렇지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백승무가 쓴웃음을 지었다.

“거참. 제가 사형께 많이 물들었군요.”

“좋다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아니, 이번엔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다른 목적도 있지만 그렇게 좋은 일을 하셔서요.”

“아. 땅값 오르면 팔아야지.”

“그러게 말입니다. 사형께서 그런 면이…… 네?”

눈이 휘둥그레진 백승무에게 정광이 설명했다.

“업종이 뭐가 됐든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은 가격이 오르지?”

“……네.”

“현판이 바뀌어도 성황을 이루고.”

“……그렇지요.”

그 사람들을 계속 잡는 건 새로운 땅 주인이 해야 할 일이다.

이미 땅을 팔아버렸을 정광이 고민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꽤 비싸게 팔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자고.”

“……그렇게 팔아버리면 본문을 안 좋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팔고 외곽 지역의 싼 땅을 또 사야지.”

“……네? 그랬다간 도사가 땅장사를 한다고 더 욕먹을 것 아닙니까?”

정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사제는 돈을 잘 다루고 사람도 제법 대할 줄 알았지만 결정적인 게 빠져 있었다.

‘이렇게 때가 덜 묻어서야 원.’

정광은 부족한 사제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에 다시 짓는 거야. 더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서 옮겼다고 하면서. 이해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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