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72화 (72/569)

72화

사리사욕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하북팽가의 대공자 팽강웅이었다.

그는 큼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보고 싶어 왔네. 혹 방해가 되었나?”

“조금요.”

“이런. 미안하군. 사실 그 이유로만 온 건 아닐세. 잠깐 얘기 좀 하세나.”

“그러죠.”

팽강웅이 방에 들어와 앉았다.

그는 정광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 들었네. 자네가 지룡단주 자리를 거절했다고.”

“네.”

“솔직히 좀 놀랐단 얘기를 해야겠군. 왜 그랬는가?”

정광은 팽강웅의 속셈이 빤히 보였다.

‘이 녀석. 날 떠보려고 왔네.’

게다가 그런 기색을 숨기지도 않는다.

정광이 어떻게 나올지 흥미로워하는 얼굴이다.

‘어디까지 가보려는 걸까.’

정광은 궁금해졌다.

“몸이 얽매이잖아요. 그걸 뭐 하러 해요.”

“단지 그 이유인가?”

“네.”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고?”

“당연하죠.”

“…….”

침묵하던 팽강웅이 피식 웃었다.

“모든 후기지수의 위에 설 수 있는 자리를 걷어차다니. 자네는 바보군. 아니, 진짜 도사인가?”

“음. 둘 다 아닌데.”

“하하하. 그래, 자네는 천재 중의 천재라 그런 헛된 신분에는 관심이 없는 거겠지. 앞으로 무얼 할 생각인가?”

“즐기려고요.”

“즐긴다……?”

정광의 말을 되뇌던 팽강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사 거의 모든 일이 힘들고 괴로운 일투성인데 혼자 유유자적하겠다는 거군. 그게 되겠는가?”

“되게 해야죠.”

“아니. 힘들 거야. 강호가 자네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걸세.”

“강호가요?”

“그렇네. 진옥룡이라는 이름은 이미 강호인들의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있거든.”

팽강웅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리 멀지 않은 훗날, 무림은 자네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될 걸세. 자네가 별생각 없이 한 일도 강호인들에게는 크게 다가올 거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무겁게 물었다.

“그때 자네는 어떡할 생각인가?”

어떡하긴.

정광의 성격상 대답은 하나였다.

“신경 안 쓸 건데요.”

“……왜?”

“왜 써야 하죠?”

“……오해를 풀어야 할 것 아닌가.”

정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해 봤자 계속 오해할 거예요.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려서 받아들인 것이니 그 후로도 그럴 거란 거죠.”

“……너무 극단적인 얘기군.”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겠죠. 그런데 그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다 챙겨요. 그냥 두는 게 낫지.”

팽강웅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다가 물었다.

“……만약에 말일세. 누군가 자네를 오해하다 못해 배척하면 어찌할 건가? 심지어 공격까지 하면 말일세.”

정광이 웃었다.

보는 사람의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시원한 미소였다.

하지만 팽강웅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경고하듯 시리게 얼어 있는 정광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뭐 별수 있나요.”

정광이 두 손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무량수불.”

“……?”

“좋은 곳으로 보내 드려야죠.”

“……!”

* * *

정광은 멀어져가는 팽강웅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거렸다.

‘떠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욕심 많은 녀석이야.’

정말 지룡단주 자리에 관심이 없는지는 물론 앞으로의 행보까지 물었다.

게다가 ‘오해’를 받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는 물음까지.

당연히 그 오해를 하게 될 이들 중엔 팽강웅도 껴있을 터.

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해줬으니 팽강웅이 취할 행동은 뻔했다.

‘뭔가 수를 부리겠지.’

명성과 권력에 관심이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을 놈이 아니었다.

왜?

팽강웅은 그것들을 움켜쥐기 위해서 사는 놈이었으니까.

저대로 크면 남궁화인과 좋은 경쟁자가 될지도 모를 만큼.

‘저런 놈들은 자신이 탐하는 만큼 다른 이들도 탐할 것이라 믿지.’

그리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이에게 가차 없이 칼을 휘두른다.

당연히 정광에게도 그럴 것이다.

‘전대(前代) 구룡사봉 중 한자리를 꿰찼던 도룡(刀龍)이라 했지? 어떻게 나올지 기대하마.’

정광은 두 손을 비비며 웃었다.

팽강웅의 무공이 아니라 그 심계(心計)가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대체 어떤 놈들일까?’

팽강웅은 처음 봤을 때부터 다른 팽가의 인물들과 다른 기운을 품고 있었다.

더 강해지기 위해 다른 세력의 무공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날 칠 때는 그놈들을 끌고 오겠지.’

미약하게나마 사특함이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정파는 아닐 터.

‘놈들을 만나면…….’

마음껏 손을 쓸 생각이었다.

환생 후 처음으로 실컷 날뛸 수 있으리라.

정광의 입술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다가오던 허청은 경기를 일으켰다.

“제, 제자야. 또 뭘 꾸미는 거냐?”

“꾸미긴요. 걱정 마세요.”

“후우. 전혀 안심이 안 되는구나.”

허청은 문지방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깜깜한 밤하늘에 수많은 별빛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빛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곤륜에서 본 것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다.

중원에 있는 허청보다 곤륜에 있던 허청의 얼굴이 밝았던 것처럼.

한동안 허청을 보던 정광이 조용히 물었다.

“돌아가고 싶으세요?”

“……조금 그렇구나.”

“그럼 가세요.”

“……그건 안 되지.”

“왜요?”

“정파무림의 세대교체가 시작됐다. 본문에선 내가 그 선두에 서야 하지 않겠느냐.”

“사숙조님들께 떠넘기면 되잖아요.”

정광의 말에 허청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분들께서 먼저 곤륜으로 떠나 버리실걸?”

“먼저 움직이시면 되는데.”

“……그럴까?”

“늦기 전에 서두르세요.”

잠시 엉덩이를 들썩이던 허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그럴 순 없지. 알면서 왜 그러느냐?”

“그럼 다른 사숙께 넘기시죠.”

“누구한테?”

“음. 허직 사숙?”

“……차라리 내가 하마.”

허청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융통성 없기론 천하제일을 다툴 수 있는 허직이었다.

그런 그가 곤륜의 대표로 나서면 정광보다 더한 사고를 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내가 괜히 약한 소리를 했구나. 못 들은 거로 해다오.”

“약한 소리라뇨. 세속이 너무 더러워서 안 맞으시는 거죠.”

“허허. 나라고 깨끗하겠느냐?”

“음…….”

“예끼, 이 녀석. 생각하는 척하지 말아라.”

“진짜 생각 중인데요.”

허청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자랑스러운 제자가 정말로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제자야. 잘 생각해라. 그래도 네 사부지 않느냐.”

“그렇긴 하죠.”

허청은 씩 웃으며 정광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멈칫했다.

“이런. 네가 다 컸는데 내가 아직도 이러는구나.”

“그러게요.”

“하하하하. 그래. 그러게 말이다.”

대소를 터뜨린 허청이 담담히 말했다.

“누가 맹주가 될지 대충 윤곽이 나왔다. 아마 팽 가주가 될 것이야.”

“남궁 가주가 밀렸나요?”

“분위기가 그렇다. 몇몇 문파와 가문은 아주 찬바람이 쌩쌩 불더구나. 최근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듯하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결과였기에.

‘이제 와서 다른 수를 써봐야 소용없지.’

남궁세가가 무엇을 주든, 어떤 이권을 보장하든 소용없을 것이다.

두 번이나 물을 먹었는데 누가 믿겠는가.

오히려 더 큰 반감을 사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다.

‘그래도 꿋꿋하게 뇌물을 더 뿌리면 좋을 텐데.’

가로챌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게 얼굴에 드러났는지 허청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혹시 네가 무언가를 했고, 또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게냐?”

“설마요.”

허청은 눈을 부릅뜨고 정광을 살펴봤지만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진공묘유환의 재료는 어디서 구했느냐?”

“저 돈 많잖아요.”

“……그렇기야 하지.”

“그만 들어가도 되죠?”

“……그래. 푹 쉬거라.”

“사부님도요.”

정광이 방으로 들어가는데 허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

정광이 돌아보며 씩 웃었다.

“네. 알고 있어요.”

웃고 있는 정광과 달리 허청의 얼굴은 진지했다.

정광의 얼굴도 점차 그렇게 변해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까의 미소처럼 여전히 밝았다.

“정말 잘 알고 있어요, 사부.”

* * *

정광은 무슨 일을 더 꾸밀 생각이 없었다.

한 가지만 빼고.

다음 날 수련이 끝난 뒤, 정광은 쓰러져 있는 장이에게 물었다.

“장 소협. 어머니께선 잘 계세요?”

“헉. 헉. 물론입니다 은공. 제게 항상 은공의 안부를 물으십니다.”

“그럼 한번 뵙죠.”

“……네?”

정광은 고개를 돌려서 유정풍도 불렀다.

“유 소협. 시간 있으세요?”

“이런. 아우, 미안하네. 지금은 너무 몸이 힘들어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건데.”

“……힘들어서 맛있는 걸 먹고 싶던 참일세. 어서 가세나!”

정광은 비틀거리며 도망치려던 백승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신법을 펼쳤다.

쓰러져 있던 장이는 유정풍의 몫이었다.

얼마 안 가 그들은 장이 모친의 반점에 도착했다.

아직 식사시간 전이라 사람이 없었기에 장이의 모친은 재빨리 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음식을 나르려는데.

정광 일행이 직접 와서 가져가는 것 아닌가.

“에구머니. 귀한 분들께서 음식을 나르시면 안 됩니다.”

“저희 안 귀한데요.”

“어, 어찌 그런 말씀을…….”

정광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포함한 일행을 하나씩 가리켰다.

“가짜 도사, 거지 왕자, 속인 주제에 도사보다 더 도사처럼 살아온 숫총각. 아, 아드님은 귀하죠.”

“…….”

“이리 오셔서 같이 드세요. 드릴 말씀도 있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정광 일행은 탁자에 둘러앉아 요리를 맛봤다.

“……응?”

몇 점 집어먹던 유정풍은 아예 접시를 들고 입속에 쓸어 넣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의룡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신위였다.

정광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맛이 어때요?”

“아우. 이런 외진 곳에 좋은 반점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런데 가격은 어떻게 되는가?”

장이의 모친이 대신 대답하자 유정풍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훌륭하군요. 이 맛에 그 가격이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부, 부끄럽습니다.”

“어허. 부끄럽다니요. 제가 동냥질로 잔뼈가 굵은 몸입니다. 이렇게 맛있고 싼 집은 흔치 않아요.”

장이의 모친이 부끄러워서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데 정광도 거들었다.

“유 소협 말대로예요.”

“아이고. 이를 어째.”

“그런데 왜 여기서 장사 하시는 거예요?”

“그, 그야 돈이 없어서…….”

“돈 있으면 사람 많은 곳에 가서 해보실 의향이 있으세요?”

그녀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였다.

정광은 백승무를 보며 물었다.

“사제. 사놓은 땅 중에 반점 차릴 만큼 목 좋은 자리 있지?”

“그렇습니다, 사형.”

“크기가 얼마나 돼?”

“음. 제일 적당한 곳은 대충 일미반점 정도 크기입니다. 사형, 혹시……?”

“응. 맞아.”

정광은 장이와 그의 모친을 번갈아 봤다.

“땅을 빌려 드리고 반점도 지어드릴게요. 세를 드리겠다는 말입니다.”

“……!”

“규모가 꽤 커지니까 사람도 구해야 할 거예요. 필요하시면 유 소협한테 말씀하세요. 평판 좋은 이들을 소개해 주실 겁니다.”

“아, 아우. 내가 언제…….”

“대신 개방분들이 구걸하러 오시면 남는 음식 좀 많이 챙겨주시고요.”

“장 소협, 그리고 어머님.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이래 봬도 발이 꽤 넓습니다.”

장이와 그의 모친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광이 어째서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저하던 장이가 가까스로 물었다.

“……으, 은공. 어찌해서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바로 그거죠. 요리를 잘하시니까.”

“…….”

“어차피 장 소협은 무공에 뜻을 세우셨으니 요리 안 하실 거죠?”

“무, 물론입니다.”

“혼자 일하실 모친이 걱정되시죠?”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예 크게 차려서 사람을 고용하는 거예요. 무림맹과 가까우니 장 소협이 왔다 갔다 하시기도 편할 테고.”

“…….”

당황해서 손까지 떨던 장이의 모친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 하지만 그러면 은공께서 너무 손해를 보실 텐데요…….”

“그거야 두 분께 달렸죠.”

“네?”

정광은 의아해하는 모자에게 설명했다.

“계약 끝날 때까지 장사 잘하셔야 해요. 그래서 저한테 땅을 사시든지, 더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옮기든지 하세요.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비싸게 팔면 되니까.”

멍하니 정광을 바라보던 모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정광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라 말했지만, 그들이 봤을 때는 너무 큰 선행이었던 것이다.

유정풍 또한 감탄한 얼굴이었는데 백승무만큼은 달랐다.

-사형.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뭐 잘못 드셨습니까?

-아니.

-그럼 계산을 잘못 하셨군요. 반점 하나로는 돈이 되지 않습니다.

-알고 있어.

-그럼 대체 왜……?

정광이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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