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이른 아침.
백승무는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팔이 빠져라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으윽. 사형. 더 해야 합니까?”
“응.”
“얼마나요?”
“내가 그만하라 할 때까지.”
“하아. 어제보다 훨씬 힘들군요. 더 좋은 단약이라 그런 것입니까?”
정광이 빙긋 웃었다.
실제로 그래서였다.
‘남궁 애들이 생각보다 잘 살아.’
새벽에 남궁화인을 쫓으며 가로챈 것들은 어제 것보다 훨씬 좋은 것들이었다.
재료가 좋으면 더 좋은 걸 만들 수 있는 법.
지금 만들고 있는 단약은 전날 만든 진공묘유환보다 훨씬 좋은 약효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건 내가 다 먹고. 진공묘유환은 나눠줘야겠네.’
일단 곤륜파 식구들부터 각자의 수준에 맞게 몇 개씩 주고.
그리고 남는 건…….
‘장이를 포함한 일곱 명에게 줄까.’
일반 무인 중 처음부터 수련시켰던 사람들을 말함이다.
제법 싹수도 있었고 영약을 내리면 충성심도 더 커질 터.
앞으로도 무림맹에서 그의 눈과 귀가 되어주리라.
‘음. 그래도 네 개가 남네.’
곤륜 도사들에게 더 줄까 생각하던 정광은 고개를 저었다.
영약은 많이 먹는다고 좋은 게 아니기에. 그 그릇에 따라 적정한 양이 있는 것이다.
‘아. 걔들한테 주면 되겠구나.’
쓸 만한 녀석들이었으니 헛된 투자는 아닐 터.
생각을 정리한 정광은 백승무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어 사제. 이제 내가 할게.”
“헉. 헉. 아, 알겠습니다.”
정광은 걸쭉해진 탕약을 내공을 일으켜서 둥글게 빚었다.
얼마 후 알싸한 향을 풍기는 단환들이 완성됐다.
정광은 그것들을 일일이 손바닥 위에서 굴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나왔네.’
상청무상신공으로 모은 내공을 새로운 심법으로 녹여야 했다.
그때 나올 불순물을 녹이고 내공을 높이는 데 꽤 도움이 되리라.
자연히 단환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역시 사람은 첫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니까.’
남궁화인, 이 기특한 양반 같으니.
다음에 만나면 한 번 웃어주기라도 해야겠다.
비웃음이 아니라 고마움을 담아서.
* * *
정광은 수련회가 시작되기 전에 장이를 포함한 일곱 명의 일반 무인을 불렀다.
“은공. 무슨 일이신지요?”
그들은 정광을 은공이라 칭하고 있었는데, 허례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이거 하나씩 받으세요.”
진공묘유환을 나눠주자 그들은 의아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엇이온지…….”
“영약요.”
“……!”
경악하는 그들에게 정광이 설명했다.
“내일 아침, 공복에 드세요. 이왕이면 측간과 가까운 곳에서요.”
“여, 여, 여, 영약…… 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하하. 하하하…….”
장이를 포함한 일곱 명은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영약이라니!
무인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얻길 원하는 것 아닌가!
“이, 이렇게 귀한 것을 왜 저희 같은 놈들에게…….”
“드릴 만하니까 드리는 거죠.”
일곱 청년은 복잡한 눈빛으로 정광을 바라보다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공의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만 하지 말고 몇 배로 돌려주세요.”
“……!”
허리를 편 청년들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천만에요라던가 신경 쓰지 말라 했으면 마음이 더 무거워졌을 것을.
훗날 더 크게 돌려달라는 정광의 말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그래. 열심히 수련해서 갚아드리면 돼.’
‘강해질 수 있어. 은공께 작은 보답이나마 해드리고 말 테다.’
수련 의지가 더 강해지고 자신감도 생긴 그들은 진심을 담아 약조했다.
목숨을 걸 정도로 강해진 충성심을 꾹꾹 눌러 담아서.
“물론입니다, 은공. 분골쇄신하여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네, 기대할게요. 이따 봐요.”
정광은 청년들을 보낸 뒤 교관들을 만났다.
유정풍, 당오군, 당예지, 언의진이었다.
“손바닥 내밀어보실래요.”
그들은 의아한 얼굴로 정광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잠시 뒤, 그들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진공묘유환을 바라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독은 물론 약에도 조예가 깊은 당 씨 남매는 코를 킁킁대며 향을 맡았다.
“이건…… 하수오와 설삼이 들어간 것 같은데.”
“구엽자지초 향도 나는군요.”
당예지와 의견을 교환하던 당오군은 정광을 바라봤다.
“아우. 보통 약재들로 만든 게 아니군. 좋은 영약인 것 같은데.”
“나쁘진 않죠.”
“대체 어디서 난 건가?”
“제가 만들었는데요.”
“……!”
평소 나무토막 같은 당오군과 얼음장 비슷한 당예지가 눈을 크게 떴다.
‘아우가 독을 많이 아는 만큼 의술도 능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직접 영약을 제조할 정도라고?’
수많은 사람이 오래전부터 쌓아온 방대한 지식을 익히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경지인 것이다.
경악하던 남매는 얼마 안 가 이상할 정도로 쉽게 납득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무공도 그런데 의술이라고 다를까.’
모두 정광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그는 신비한 존재였으니까.
어느 정도 놀라움이 가시자 고마움이 밀려왔다.
그들은 명문 중의 명문, 사천당문의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가주의 적자와 적녀였으니 그 신분이 남달랐다.
하지만 그렇게 존귀한 신분을 가진 그들도 이런 종류의 영약은 자주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는 하북성의 대토호(大土豪)인 진주언가의 언의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우. 고맙네.”
“……훗날 꼭 갚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정광은 씩 웃으며 주의사항에 대해 알려줬다.
측간 얘기에 당예지와 언의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게 대수랴.
영약을 먹는 데 그 정도야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모두가 고마워했지만 유정풍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손바닥에 놓인 단환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여, 영약? 이게 내 거라고?’
개방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거지 집단이요, 다음 대의 방주인 후개라 해봤자 남들 보기엔 거지 왕자일 뿐이다.
빌어먹고 사는 거지가 언제 영약을 구경해 봤겠는가.
아니, 영약을 살 돈이 있으면 빈민구제에 쓰는 것이 개방의 협의!
거지 주제에 자신들보다 잘사는 이들을 위하는 게 개방 아니던가!
‘……다른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이 영약 얘기를 할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건만…… 오늘에서야 나도 뭔가 할 말이 생겼구나.’
유정풍은 정광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우. 고맙네. 내 자네의 뜻에 맞게 목숨을 걸고 수련해서 협(俠)을 행하겠네.”
“그냥 갚으세요.”
“…….”
역시 정광이었다.
그는 유정풍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무언의 압박을 줬다.
다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광이 손뼉을 쳤다.
“자. 자. 사람들 올 텐데 슬슬 준비하죠.”
왠지 정광과 더 가까워진 듯한 기분을 느낀 네 사람이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좋아!”
“그래요!”
대연무장에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 * *
원로원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기분 좋게 들어왔던 남궁화인의 얼굴이 경직될 정도로.
‘……설마 이놈들이 또?’
새벽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열심히 돌았건만.
뇌물을 받았던 자들이 하나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 아닌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서로 간의 체면 때문에 직접 꺼내 보이진 않았었지만, 분명 항아리를 건네며 확실히 말했었다.
이번 것들은 어제와 다르다고.
분명 마음에 드실 거라고.
그런데.
‘좋다고 받을 때는 언제고 입 싹 닫고 이런 식으로 나와?’
뇌물로 쓴 것들의 가치는 대단했다.
안휘성의 패자인 남궁세가가 한동안은 몸살을 앓을 정도로.
‘대국적으로 생각해 이를 악물고 뿌렸건만…….’
이런 대접을 받으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검무를 출 수는 없는 일.
일단 물어보기라도 해야 했다.
마침 차갑다 못해 얼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청성파의 청해와 시선이 마주쳤다.
-진인. 어째 표정이 안 좋으시오. 무슨 일 있으셨소?
청해의 얼음 같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주. 더 이상 나를 욕보이지 마시오.
-욕을 보이다니? 무슨 의미요?
-진정 이렇게 나올 것이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찬찬히 얘기해 봅시다.
-됐소이다! 청성은 남궁과 다른 곳을 볼 터이니 그렇게 아시오!
청해가 폭발했고 남궁화인도 마찬가지였다.
-무어라? 다 받아놓고 이렇게 나오시겠다?
-받기는! 내가 뭘 받았다고!
-벽곡단 항아리!
-흥! 그깟 거 도로 가져가시오!
-그깟 거라니! 말 다 했소?
전음을 나눌수록 격양된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기세를 일으키게 되었다.
자연히 주위에 있던 이들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헌데 청해처럼 분노한 기세로 남궁화인을 노려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간밤에 뇌물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기세를 느낀 남궁화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럴 수가! 전부 이렇게 나온다고?’
탐욕이 넘치는 자들이지만 모두가 이럴 순 없다.
분명 벽곡단 항아리에 문제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내가 직접 확인해서 가져갔다. 내용물이 잘못 됐을 리는 없어.’
그렇다면…….
‘건넨 후에 누군가 빼 간 것일까?’
남궁화인은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기에.
자신은 물론 현 무림을 이끌어가는 중진들 몰래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혹시 십존?’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밖에 없었다.
십존이라고 그런 잠행술을 펼칠 수 있으리라 믿기는 힘들었지만 그들 아니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 고약한 늙은이들이 팽가를 밀고 있으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분노가 일어났다.
눈앞에 다가왔던 꿈을 짓밟아버린 악적들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
남궁화인은 즉시 아우인 남궁신건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난 이틀 동안 독존, 걸존, 창존. 그 세 늙은이가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게.
남궁신건도 나름 똑똑한 자였기에 그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가주. 헌데 저들은 어떡할까요?
뇌물을 줬던 자들을 어떻게 할지 묻자 남궁화인이 으르렁거렸다.
-저 탐욕스런 놈들은 증거를 보여줘야 믿을 것이야. 내 일단 오해를 풀 방법을 찾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하겠네. 그러니 자네는 반드시 십존의 행적을 캐오게!
남궁신건은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목숨을 걸고 해내겠습니다!
* * *
괴팍한 세 노인의 행적을 캐는 건 의외로 쉬웠다.
몇 다리 건너지 않아 그들이 지난 이틀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무림맹과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루. 전신의 힘이 쭉 빠진 남궁신건이 눈앞의 점소이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그분들이 여기에서 계속 술만 드셨다, 이건가?”
“그, 그렇습니다.”
“내가 그 말을 어찌 믿지?”
“주,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압니다. 지난 며칠 내내 쉬지 않고 드셨거든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점원의 말대로 독존, 걸존, 창존이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불콰한 얼굴로 구시렁대며.
“나쁜 놈 같으니. 날 괄시해? 빨리 배우면 다야?”
“땅꾼 너는 그래도 낫지. 내 깨달음은 배울 생각조차 안 하잖아.”
“허어. 우리가 더 가르쳐 주겠다는데 오히려 다른 이들을 가르치다니. 이런 일을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네.”
창존의 말에 독존이 탁자를 내려쳤다.
콰직!
“내 말이! 그런데 그 체조법과 체술, 곤술은 또 뭐야! 보통 것들이 아니잖아!”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듯 점소이들이 박살 난 탁자를 치우고 다른 탁자를 낑낑대며 가져왔다.
음식과 술이 다시 깔리자 당기황이 주루 주인에게 전표를 건네며 사과했다.
“자꾸 미안하네. 내 하도 화가 나서 그러니 이해해 주게나.”
“무슨 그런 말씀을. 마음껏 부수십시오, 어르신.”
주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러나자 노인들이 다시 떠들었다.
“망할 놈의 괴물 같으니. 그걸 남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직접 만들었다는 게 말이 돼?”
“후우우.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더니만. 지금 우리 꼴이 딱 그렇구먼.”
세 노인은 화를 내랴 한탄하랴 무척 바빴다.
남궁신건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세 노인의 시선이 그에게 꽂혀서였다.
“남궁가의 청풍검협(淸風劍俠) 아닌가. 우리 꼴을 구경하러 왔나?”
“거참. 늙었다고 괄시받으니까 화나네. 자네, 잠깐 얘기 좀 해볼까?”
“오기 귀찮으면 거기 있게나. 우리가 가지.”
남궁신건은 급히 예를 표하며 부정한 뒤 부리나케 도망갔다.
주위를 수소문해서 점소이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해 가며.
남궁세가의 숙소로 돌아온 그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화인은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그럼 대체 어떤 놈이냐고!”
* * *
정광은 운기행공을 멈추고 귀를 후볐다.
‘아. 간지러워. 근데 이놈은 또 왜 온 거지?’
문밖에서 다가오는 기척은 그가 아는 이의 것이었다.
‘뭐 일단 들어나 볼까?’
정광은 문밖의 이가 말하기 전에 문을 활짝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