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칠야마영(漆夜魔影)
청해가 남궁신건을 배웅하는 틈을 타 정광이 몰래 챙긴 것들은 꽤 대단했다.
남궁세가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정도로.
좀 사는 집안이라 생각했건만, 상당히 사는 집 아닌가.
‘하수오(何首烏), 설삼(雪蔘), 구엽자지초(九葉子枝草)…… 전부 이삼백 년은 묵은 것들이네.’
영약뿐만이 아니었다.
상당한 금액의 전표와 영롱한 보석까지. 중도를 지키던 자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 만큼 알찬 구성이었다.
‘이 정도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군.’
실로 정파답지 않은 수법이다.
아니, 칼질로 협박하진 않았으니 이거야말로 정파다운 수일지도.
정광은 분노가 아니라 고마움을 느꼈다.
‘덕분에 돈 굳었네.’
돈으로 사려던 영약을 무상으로 챙길 수 있게 됐다.
아니, 오히려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남궁신건 일행은 다른 숙소의 문을 또 두드리고 있었다.
청성파의 숙소에서 했던 짓을 또 하려는 것이리라.
‘어디 보자. 항아리가 하나, 둘, 셋…….’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짊어지고 있는 항아리는 아직도 많았다.
저기에도 조금 전의 것들과 같은 수준의 것들이 들어 있다면…….
‘남궁세가가 안휘성(安徽省)의 패자라 해도 쉽지 않은 지출이겠지.’
정광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하지만 남궁화인의 얼굴을 떠올리자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예를 탐하는 위군자.’
그런 이들은 가문의 출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문보다 자신이 먼저였기에.
‘맹주만 되면 그 이상의 것들을 챙길 자신도 있을 거고.’
최대한 많은 이권을 탐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또 뇌물을 뿌려야 할 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받을 여러 문파의 지지는 그의 힘을 더 공고히 하게 되리라.
‘그렇게 되면 허울뿐인 맹주가 되진 않겠는데.’
꽤나 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될 것이다.
팽수관보다 무림맹을 더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이런 비열한 놈을 봤나.’
정광은 남궁화인에 대한 평가도 수정했다.
‘제법 괜찮은 인재구나.’
저 정도는 돼야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에 비하면 팽 씨는 좀…….’
능력도 있고 야망도 있는 자였으나 아쉽게도 협기(俠氣)가 너무 강했다.
어쩔 수 없는 진짜 정파인이라고 할까.
‘그래도 할 수 없지.’
곤륜을 위해서는 팽수관이 맹주가 되어야 했다.
정광을 위해서도 그랬고.
‘손이 모자라겠네.’
남궁세가의 뇌물을 모두 가로채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정광은 지붕의 기와를 들어서 챙긴 것들을 쑤셔 넣은 뒤 몸을 일으켰다.
빨리 움직여야 나머지 것들도 몽땅 챙길 수 있으리라.
‘가볼까.’
그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어둠과 동화되었다.
전생에 익혔던 무공, 칠야마영(漆夜魔影)이었다.
전생에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적을 쳐 죽이는 용도로 사용한 마공이었건만.
‘나도 정파인 다 됐네.’
현생에는 남의 짐을 덜어주는 공명정대한 무공으로 사용하는 정광이었다.
* * *
극심한 피로로 시체처럼 잠들었던 백승무가 눈을 떴다.
코끝을 간질이는 역한 냄새 때문이었다.
‘우욱. 뭐야 대체.’
재빨리 방문을 열어서 환기를 시키는데, 이번엔 또 다른 냄새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것 아닌가.
이건 또 뭔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정광이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사형. 이른 아침부터 뭐 하시는 겁니까?”
“탕약 달이잖아.”
“……그러니까 갑자기 웬 탕약이냐고 여쭌 겁니다.”
“먹으려고.”
“…….”
누가 그걸 몰라서 물었을까.
백승무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의 사형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신경 쓰지 말고 자자.’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사제. 이리 와서 부채질 좀 해.”
“사형. 제가 지금 많이 피곤해서…….”
“조금 나눠줄게.”
백승무는 어느새 정광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조금 더 강하게. 그래. 딱 좋아. 그대로 계속해야 해.”
“네, 사형. 맡겨주십시오.”
정광은 장작을 넣어라, 탕약을 저어라 등등 잔소리를 했다.
백승무는 군말 없이 혼신의 집중력을 발휘해 탕약을 달였다.
시간이 흐르자 탕약은 잔뜩 졸아서 걸쭉해졌다.
정광은 손가락에 묻혀 맛을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백승무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사형. 효과가 제대로 나온 겁니까?”
“아니. 맛이 꽤 괜찮아서.”
“……그렇군요.”
정광이 씩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효능도 제대로일 터.
‘바쁘게 뛰어다닌 보람이 있네.’
남궁화인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상당히 많은 문파에 벽곡단 항아리를 뿌렸다.
그걸 일일이 다 챙겨서 근처에 숨겨뒀다가 전부 다 모으니 그 양이 보통이 아니었다.
정광이 써야 할 분량을 넘어 곤륜 도사들에게도 나눠줘야 할 정도로.
‘슬슬 해야겠군.’
정광은 백승무를 물러서게 한 뒤 두 손에 공력을 끌어모았다.
턍약을 보관하기 편한 단환으로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사조인 운후를 위해 반선단을 만들었을 때처럼 주무르면 됐으니까.
잠시 후.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단약들이 완성됐다.
“사형. 이 단환의 이름은 무엇인지요?”
“아직 안 정했는데.”
“……설마 사조님께 지어 올리신 것처럼 직접 고안하신 단약입니까?”
“응. 사제, 하나 먹어봐.”
백승무의 머릿속에 다른 사형들에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정광이 만든 반선단의 일부를 먹었던 산양이 어떻게 됐었는지.
‘……웅장한 방귀를 뀌었다 했지.’
백승무는 바보가 아니었다.
왜 사서 그런 꼴이 되겠는가.
하지만.
‘……그 후 그 산양은 표범보다 날쌔고 강해졌다 했다.’
그깟 방귀 따위가 대수랴.
강해질 수만 있다면 뭘 못하겠는가.
“감사히 먹겠습니다, 사형.”
백승무는 단환을 삼켰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부를 관조했다.
과연 영약은 영약인 걸까.
얼마 안 가 배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일어났다.
‘역시 사형이시구나! 이렇게 빨리 약효가 나타나다니!’
성품에는 문제가 많으나 천재 중의 천재인 정광다웠다.
그리고 잠시 뒤.
백승무는 역시 정광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약효가 삽시간에 퍼지는 것 아닌가!
전신의 기혈이 아닌, 밑으로!
‘이런 망할 사형 같으니!’
백승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아랫도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 사형. 제, 제발…….”
“벌써 왔어? 생각보다 빠르네.”
정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남궁세가가 제법 신경을 썼는지, 영약들의 효능이 꽤 괜찮았던 것이다.
“첫 번째 효능이 탁기를 배출하는 거거든. 당황하지 말고 측간에 가서 시원하게 쏟아.”
백승무는 당황할 정신조차 없었다.
“……사, 살려주십…….”
“아. 못 걷겠어? 도와줄게.”
정광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측간에 백승무를 집어 던졌다.
훨훨 날아간 백승무는 측간 속에 절묘하게 착지함과 동시에 바지를 내렸다.
푸르르르륵-
마치 말이 투레질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배 속에 있던 탁기가 쏟아져 내렸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잠시 후 백승무가 비척거리며 걸어 나왔다.
“주, 죽을 뻔했습니다.”
“사람이 그리 쉽게 죽을 리가. 방에 들어가서 당장 운기조식해. 제법 얻는 게 있을 거야.”
이날 아침, 곤륜 제자들은 모두 측간에 들어갔다 나온 뒤 운기조식을 했다.
버릴 건 버리고 얻을 건 얻는 기연이었다.
‘진정으로 비우면 묘한 도리를 얻을 수 있는 거지.’
정광은 새로 만든 영약의 이름을 진공묘유환(眞空妙有丸)이라 지었다.
* * *
남궁화인은 한 가지 지론이 있었다.
‘비우는 만큼 더 얻을 수 있는 법이지.’
욕심을 버리면 도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낌없이 투자해야 제대로 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우인 남궁신건을 시켜 선물, 아니, 뇌물을 펑펑 뿌린 그는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전각 안에 들어갔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가 항상 원해왔던 것이었다.
당연히 기분이 좋아져야 했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뭐지?’
아우를 시켜 뇌물을 건넨 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 아닌가.
남궁화인은 즉시 남궁신건에게 전음을 보냈다.
-일을 똑바로 처리한 게 맞는가?
-물론입니다, 가주.
-헌데 얼굴들이 왜 저렇지?
-……알아보겠습니다.
남궁신건은 그들에게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뇌물을 받은 건 떳떳하긴커녕 무척 켕기는 일이다.
다른 이들도 받았더라도 자신이 받은 건 숨기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남궁신건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
누가 받았는지 그들 모두가 알게 될 게 분명했다.
-……가주.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전음으로 묻겠습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어서 하게.
곧 회의가 시작됐다.
맹주 선출식 준비에 대한 것과 각 기구의 개편 문제에 관한 얘기들이었다.
그사이 남궁신건은 전음을 날렸다.
우선 청성파의 청해부터였다.
-진인.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으셨소?
-……허어. 진심으로 묻는 게요?
-혹 벽곡단이 마음에 안 드셨소이까? 나름 성심껏 준비한 것들이었는데…….
청해의 얼굴에 싸늘한 한기가 맺혔다.
‘이놈이 진짜!’
무공을 높여주고 문파 살림에 도움이 될 벽곡단이라더니 그냥 벽곡단이었다.
혹시 몰라 먹어보기까지 했는데 맛만 괜찮았을 뿐, 정말 벽곡단이었단 말이다!
‘날 놀리는 건가?’
당장에라도 호통을 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는 일.
전음으로 왜 뇌물이 왜 그따위였냐고 묻기도 뭐했다.
어쨌든 그는 도사 아닌가.
‘후우우. 표정을 보면 놀리는 것 같진 않은데…….’
남궁세가에서 실수로 진짜 벽곡단만 넣었을 수도 있다.
그래.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는 개뿔. 그렇게 무능력한 놈들과 무슨 일을 해!’
청해는 울화를 삭이며 전음을 보냈다.
-……벽곡단이 나와는 맞지 않더이다. 돌려 드릴 테니 없던 얘기로 합시다.
-……!
남궁신건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는 욕설을 내뱉으며.
‘이 말코 도사 놈이 뭐가 어째! 그 귀한 것들이 몸에 맞지 않아? 전설의 만년삼왕(萬年蔘王)이나 공청석유(空淸石油)쯤은 돼야 한단 말인가!’
전부터 음흉한 도사 놈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광오(狂傲)할 줄이야.
‘잠깐. 이거 혹시?’
남궁신건은 뇌물을 줬던 다른 이들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다들 청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 아닌가!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형 남궁화인은 눈치가 무척 빨랐다.
즉시 전음으로 물은 그는 아우의 대답을 듣자마자 검을 뽑을 뻔했다.
‘안 돼. 참아. 참아야 해!’
스스로를 다독여 간신히 참은 그는 두 눈을 빛냈다.
‘이놈들이 이렇게 욕심이 많을 줄은 미처 몰랐군.’
누군가가 몽땅 털어갔으리란 가정은 상상조차 못 하는 남궁화인이었다.
‘좋아. 네놈들의 그릇을 한번 봐주마.’
더 큰 뇌물을 준비하리라.
날이 어두워지면 직접 들고 찾아가 물으리라.
이래도 모자라냐고.
남궁화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감히 그의 앞에서 부족하다고 말할 이는 없을 것이기에.
* * *
침상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던 정광은 밤이 깊어지자 일어났다.
‘슬슬 가볼까.’
얼마 뒤, 그는 남궁세가 숙소 근처에 있는 전각 지붕 위에 나타났다.
한동안 시간을 죽이다 보니 사람 몇 명이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호오. 가주도 있네.’
남궁화인의 얼굴을 확인한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가 직접 나섰으니 어제보다 더한 것들을 준비했을 게 뻔하지 않은가.
‘혹시 몰라 와봤는데 잘됐군.’
정광의 몸이 흐려지더니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칠야마영.
남궁화인의 명성이 드높다 하나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한 잠행술이었다.
‘어디 더 털어볼까.’
정광의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