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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69화 (69/569)

69화

벽곡단(辟穀丹)

수련회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정광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어디 보자.’

마음을 먹자 진기가 움직였다.

단전에 쌓여 있던 내공이 전신의 기혈(氣血)로 퍼져 나갔다.

그 상태로 내부를 관조했다.

가고자 하는 길에 막힘이 없고, 막힘이 없으니 새로운 길로 나아가려는 상태.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다 됐네.’

곤륜비전 상청무상신공은 훌륭한 내공심법이었다.

비록 진기를 쌓는 속도는 마공과 비교했을 때 매우 느린 편이나, 정순함과 안정성은 그조차 인정할 만했다.

그것을 거의 십성까지 이뤄냈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갈 준비가 된 것이었다.

‘다음으로 갈까?’

정광은 잠시 고민했다.

익숙한 것으로 두텁게 할 것이냐, 새로운 것으로 나아갈 것이냐.

어차피 내공의 절대적인 양은 부족한 상태였기에 둘 중 무엇을 택해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그래도 새것을 익히는 게 낫겠지. 어차피 가야 할 길이니까.’

영약이 있으면 편할 터.

절세영약까진 필요 없다. 기존 내공을 새로운 심법으로 녹이고 기틀을 다지려면 적당한 영약 여러 개가 더 나을 수도 있다.

‘돈을 쓰면 되겠지.’

정광이 부자였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약이란 돈이 있다고 구하기 쉬운 물건이 아니었다.

아마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리리라.

‘미리 준비 좀 해놔야겠네.’

발이 넓은 개방에 말할까, 독은 물론 약재 유통에도 막대한 힘을 지닌 사천당가에 말할까.

‘둘 다 얘기해 놓지 뭐.’

생각을 정리한 정광은 전신의 기맥을 돌고 있던 내공을 거둬들였다.

조금 더 할 생각이었지만 문밖에서 허청의 인기척이 느껴져서였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네. 사부.”

다소 피곤한 얼굴을 한 허청이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그는 정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네 눈빛이 더 깊어졌구나.”

“그런가요?”

“그래. 좋은 일이 있었더냐?”

“조금요.”

안 좋았던 허청의 얼굴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정광의 조금은 범인의 조금이 아니었기에.

“무량수불. 원시천존께서 도우셨구나. 축하한다.”

몇 번이나 정광의 어깨를 다독인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신 것 같네요. 무슨 일 있으세요?”

“남궁 가주가 일을 벌였다.”

“아.”

“그다지 놀라지 않는구나. 하긴. 그로선 더 늦기 전에 나서야 했지.”

허청은 무림맹 회의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원래 맹주 선출까지는 시간이 더 남았지만 칠주야(七晝夜) 안에 끝내자 하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수련회에 참여하는 이들은 많아질 게 뻔했다.

일반 무인들뿐만이 아닌, 명망 있는 문파의 제자들도 점점 참여하고 있었기에 이쯤에서 끊으려는 생각일 터.

“팽 가주는 반대하지 않았나요?”

“물론 했지. 하지만 남궁 가주가 화산과 종남 얘기를 꺼내서 다른 문파들의 경각심을 고조시켰다.”

화산파와 종남파의 상황은 무척 안 좋은 편이었다.

정광의 조언을 받아들인 사마련주의 제자 옥기린이 관과 손을 잡고 화산과 종남의 이권을 뺏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체면 때문에 쉬쉬하다가 결국엔 손들었나 보네.’

화산과 종남의 텃밭인 섬서성이었다. 그곳에서 불법적인 것도 아니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이권을 뺏기고 있었으니 얼마나 속이 탔겠는가?

‘더는 손 놓고 볼 수 없었겠지. 속 좀 쓰리겠군.’

일전에 일반 무인들과 밥을 먹으며 들었던 사실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흘러갈 거라 생각했기에 정광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반대로 허청의 얼굴은 무척 심각했다.

“화산과 종남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다른 문파들도 남의 일이 아니라 여기는 거지. 사마련의 마수가 언제 자신들의 텃밭에 뻗칠지 모르는 일 아니냐.”

“벌써 뻗었을 수도 있고요.”

“그렇지. 그러고 보니 우리만 그런 걱정을 안 하고 있구나. 허허.”

속세에 이권이랄 게 없는 곤륜이었기에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었다.

“결국 칠주야 뒤에 맹주 선출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동안 사람들의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질 것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알지?”

“사고 치지 말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부탁하마.”

“네.”

정광이 지체 없이 승낙했건만.

허청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허허. 사부가 제자를 못 믿다니.’

정광의 평소 행실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믿어야지 어쩌겠는가.

“……믿으마.”

정광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웃으니까 더 불안하구나.”

“하하하.”

정광이 웃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남궁화인이 선출 일자를 당긴 건 좋은 수다. 정광이라도 당연히 그랬을 정도로.

‘이제 어떻게 나올까?’

전생의 정광이었다면…….

밤을 틈타 전력을 다해서 칠 것이다.

반대하거나 중도를 표방하는 모든 세력을.

‘위군자가 그럴 리는 없고.’

남궁화인의 성품을 떠나 정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한번 알아봐야겠군.’

정광의 눈이 빛났다.

당연히 허청의 가슴은 철렁했다.

* * *

허청이 나간 뒤, 정광은 중단했던 운공을 계속했다.

소주천(小周天)을 거쳐 대주천(大周天)을 계속하자 진기의 순환이 빨라지고 끊임이 없게 되었다.

‘좋아. 십성까지 가자.’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결국 정광은 기경팔맥(奇經八脈), 십이경맥(十二經脈), 십이경별(十二經別)은 물론 전신의 세맥까지 전부 타통(打通)하게 되었다.

‘으으. 냄새.’

전신의 경략에서 밀려 나온 노폐물 때문에 악취가 났다.

극심한 수련 뒤, 정광의 옆에서 시체처럼 자고 있던 백승무가 코를 움찔거릴 정도로.

‘씻어야겠네.’

정광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에 고고히 떠 있는 달이 마치 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흥취에 젖은 정광은 검을 뽑았다.

밤하늘의 달이 차가운 검날에 맺힌 채 휘둘렸다.

머릿속에만 넣어놓고 펼쳐보지 않았던 상청무상검도(上淸無上劍道).

곤륜비전검법의 묘리에 따라서 풀어내는 검식이었다.

‘좋아!’

몸을 움직일수록, 검을 놀릴수록 전신의 진기가 솟구쳤다.

그 진기는 정광의 몸에 묻은 노폐물들을 태워서 날려 버렸고 그의 마음마저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결국에는 삼청(三清)이라.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 모두 하나이면서 무(無)로 돌아가는 것.’

도경을 싫어해서 멀리하는 정광이었으나 곤륜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 알기는 해야 했다.

그래서 깨달은 도가 있었으니.

정광식 도라 해야 할까.

그의 심성이 도교와 안 맞고 자신에게 맞는 쪽으로 해석했기에 개파조사의 도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자연히 본연의 위력을 끌어낼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내 식으로 보완하면 되지.’

그게 정광에게 맞는 길이었다.

그는 남이 그려준 길을 걸어가는 사내가 아니었으니까.

그가 그려갈 길에 무엇이 있든 상관없었다.

‘마음에 들면 계속 걷고, 안 들면 새로운 길을 낸다.’

지금 그가 펼치고 있는 검식이 그랬다.

마음이 가는 대로 가다 길을 잃으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열리지 않으면 직접 열어 또 다른 발걸음을 시작한다.

정광의 검무는 격렬해지다가 잦아들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리고 완전히 멈춰 버렸다.

정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다 비웠다.’

몸에 묻어 있던 노폐물들은 물론 상청무상검도에 불필요하게 붙어 있던 검초까지 모두 털어낸 정광이었다.

비워낸 만큼 배가 고파졌다.

‘먹을 만한 게 있으려나.’

정광은 식당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번을 서는 일반 무사들을 위해 준비된 음식은 뻔했으나 그거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행술(潛行術)을 펼쳐 식당으로 향하던 정광은…….

‘응?’

은밀히 움직이고 있는 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네 명의 무인이었는데 신법이 표홀한 것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번을 서던 일반 무인들은 그들이 지나가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뭐 하는 놈들이지?’

어둠 속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 애들이잖아.’

그들 특유의 고고하면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선두에 선 놈은 위군자 옆에 있던 놈인데. 남궁신건이었지 아마.’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복면이라도 하지, 휘영청 밝은 달 때문에 얼굴이 다 보이지 않는가.

‘잠행술에 자신이 있어서 저러는 건가? 겨우 저 실력으로?’

어쨌든 야밤에 저러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정광은 그들의 뒤를 따랐다.

* * *

청성파(淸成派)의 장로 청해는 과장스럽게 두 팔을 벌렸다.

“허어. 남궁세가의 청풍검협(淸風劍俠)께서 와주시다니 영광이외다. 헌데 이 시간에 웬일이시오?”

남궁신건은 정중하게 포권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소이다.”

“흐음. 긴한 말이라. 그래, 무슨 일인지 한번 들어봅시다.”

정파 명숙답지 않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청해였다.

이 시간에 찾아온 건 비밀스러운 일 때문일 터. 괜한 얘기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번 맹주 선출. 청성에서 도와주시면 고맙겠소.”

“……맹주 선출이라…….”

청해는 말끝을 흐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이제껏 가만히 있더니 이제 와서? 몸이 달긴 했군.’

애초에 팽수관에 비해 많은 세력의 지지를 받던 남궁화인이었다.

하지만 수련회가 많은 걸 바꾸어 놓았다.

대의명분에서 밀린 것은 물론, 중도를 지키던 이들이 팽가 쪽에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청성파 역시 중도를 표방하고는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남궁세가를 지지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장문인을 대신해 청성파 대표로 무림맹에 온 청해에게는 그것을 바꿀 권한이 있었고.

그의 머릿속에 장문인의 말이 떠올랐다.

‘남궁세가를 지지하기로 중지를 모았으나 상황에 따라 처신하게. 본문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이는 청해뿐만이 아니라 중도를 표방하는 문파의 수장들도 같은 상황일 것이었다.

‘일단 들어나 봐야겠군.’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본문은 몇 번째로 오신 것이오?”

“당연히 첫 번째 아니겠소.”

믿지 못할 말이었으나 기분을 맞춰주려는 성의가 느껴졌다.

하지만 기분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법.

청해는 전음을 보냈다.

-도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소만. 본문에 어떤 이득을 줄 것이오?

남궁신건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비록 형인 남궁화인에게는 구박을 받으나 정세를 파악하고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능통한 이였다.

게다가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참을 수 있을 만큼 인내심도 있었고.

‘그러면 도인답게 닥치고 있지 이득을 따져?’

남궁신건은 노련하게 표정을 감춘 채 입을 열었다.

“가지고 들어오너라.”

“네.”

문이 열리고 남궁세가의 무인 한 명이 들어왔다.

짊어지고 있던 항아리를 내려놓은 그는 나가서 다시 문을 닫았다.

청해가 의아한 눈빛으로 묻자 남궁신건이 전음을 보냈다.

-도문에 계신 분들에게 마땅히 선물해 드릴 게 없어 벽곡단(辟穀丹)을 준비했소.

-……벽곡단?

-그렇소이다. 무척 좋은 것이니 수양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오.

청해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이자가 장난을 치는 건가?’

겨우 벽곡단 따위로 무슨 부탁을 한단 말인가.

본디 벽곡단이란 화식(火食)을 안 하는 도사들이 몸을 보하기 위해 지어먹던 단환이었다.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 송홧가루, 대추, 밤 등을 넣고 꿀로 뭉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무인들이 개량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세에는 문파마다 특색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내게 되었는데, 주로 폐관수련에 들거나 강호를 주유할 때 먹는 비상식량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별것 아니란 얘기.

자연히 청해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농을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 아니오?

-농이 아니외다.

-……?

-이건 특. 별. 한. 벽곡단이오.

한 자씩 끊는 전음에 청해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며 남궁신건이 덧붙였다.

-무공을 높여주는 것도 있고, 문파 살림에 도움이 되는 것도 섞여 있소이다. 드셔보시면 이해하실 것이오.

-……!

이쯤이면 바보가 아닌 이상 이해할 수 있는 일.

청해의 눈에 탐욕의 빛이 떠올랐다.

‘벽곡단 속에 영약과 재물이 들어 있단 말이렷다?’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어차피 남궁세가를 밀려 했던 것. 굳이 바꿀 필요는 없지.’

팽수관이 대의명분을 꺼내 들었으나 남궁세가라고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없다 해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그보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벽곡단 효능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구려. 양이 꽤 되는 것 같긴 한데…….

-효능은 보장하겠습니다. 양도 풍족하니 걱정 마십시오.

-그렇소? 흐음. 그보다 본산에 가져가기 전에 내 시험 삼아 먹어봐야 할 듯한데…….

-당연한 말씀을. 그러시지요. 진인께서 먼저 얼마나 드시든 누가 알고 뭐라 하겠습니까?

청해의 눈이 빛났다.

원하던 대답이 나온 것이다.

‘쓸 만한 것부터 챙겨야겠군.’

청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빈도(貧道)는 창천일검(蒼天一劍)으로 추앙받는 남궁가주를 항상 흠모하고 있었소이다. 답이 되겠소이까?”

남궁신건은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미소 지었다.

“물론이오. 고맙소, 진인. 이만 가보겠소이다.”

“허허. 내 문 앞까지라도 배웅해 드리리다.”

청해는 남궁신건을 숙소 문 앞까지 배웅했다.

어차피 남궁신건은 잠행술을 펼쳐서 떠나야 했기에 쓸데없는 배웅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청해는 문을 닫은 뒤 벽곡단 항아리를 움켜쥐었다.

덮개를 열자 구수한 향이 풍기는 벽곡단들이 보였다.

청해는 그것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치 그 속에 있는 것들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어디 볼까.’

그의 손이 벽곡단을 헤치며 들어갔다.

이리저리 휘휘 저으며 진짜 선물을 찾는데…….

‘어라?’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없잖아!’

항아리를 뒤집어 벽곡단을 쏟았다.

손톱만 한 벽곡단들만 쏟아질 뿐, 항아리를 탈탈 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청해는 속으로 살기 어린 외침을 뱉었다.

‘남궁신건 이 새끼가 감히!’

* * *

청성파의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전각의 지붕.

정광은 손에 든 것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야. 꽤 쏠쏠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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