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66화 (66/569)

66화

지옥문

정광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날카로워졌던 팽수관의 눈매가 원래의 부리부리한 것으로 돌아왔다.

정광은 속으로 씩 웃었다.

‘이것 봐라?’

그럴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게 꽤 능숙하지 않은가.

남궁 씨와 비교하기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안 돼요?”

“너무 과한 걸 요구하는군.”

“상식적으로 그게 맞지 않나요?”

“그건 인정해. 하지만 그래선 내가 힘을 휘두를 방법이 없지 않나.”

“솔직하시네요.”

“말 돌려봐야 뭐 하겠나? 지룡단은 괜찮아. 하지만 천룡단은 안 돼.”

“본문 제자가 단주가 되어야 대의명분이 서잖아요.”

“그 대의명분을 핑계로 만들려는 조직일세. 원로원의 간섭을 피해 맹주가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 될 거란 말일세.”

수많은 문파와 가문의 대표들로 이루어지는 원로원은 자파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들이 유일하게 뭉칠 때가 있었으니, 맹주를 견제할 때였다.

맹주가 그들을 설득할 방법은 대의명분뿐. 대의명분 앞에서 자유로운 명문정파는 없었다.

마교라는 공동의 적을 막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서 만드는 조직이 천룡단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고수들로 이루어질 것이고 무림맹 최강의 전력이 될 게 분명하건만.

기껏 만들어놓고 그 수장 자리를 곤륜에게 준다?

팽수관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정광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사마련부터 정리를 한 뒤에 천룡단을 청해성으로 보내실 거죠?”

“당연하지. 눈앞의 불부터 꺼야 하지 않는가.”

“그게 될까요?”

“…….”

“사파는 어디에나 있는데 그걸 어떻게 다 정리해요.”

“무얼 말하고 싶은 건가?”

“맹주님은 어차피 천룡단을 청해성으로 보내실 생각이 없잖아요. 사마련을 핑계로 중원에서 쓰실 거면서.”

“하! 거참. 날 뭘로 보고!”

팽수관은 두 눈을 부릅뜨며 열변을 토했다.

“보낼 거야! 근데 그 시기를 좀 늦추려는 것뿐이지!”

“조금요?”

“조금 많이!”

팽수관은 자신이 말해놓고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마냥 끌 생각은 없네. 어느 정도 기반을 쌓을 때까지만이야.”

“맹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움직이시는 건 좀 그런데.”

“그래야 제대로 굴릴 수 있어.”

“어떻게 굴리시려고요?”

팽수관의 눈이 번쩍 빛났다.

“협(俠)! 현실과 타협하되, 최대한 행할 수 있는 협일세.”

“그러셔서 뭘 얻으시는데요?”

“흐흐. 협을 행하는 조직을 내 의지대로 굴린다는 쾌감 정도?”

정광은 이제야 팽수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변태구나.’

표정이 좀 그랬을까?

팽수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얼굴 하지 말게. 힘을 휘두르다 보면 내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 임기인 십 년 동안 어떻게든 버텨볼 걸세.”

그거야 정광이 알 바가 아니고.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였다.

“천룡단, 순환 근무시키실 거죠?”

“그럴 수밖에. 청해성에 한없이 박아놓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누굴 보내고 누굴 불러들이느냐로 문파들을 통제할 수 있으니 반드시 그래야 해.”

“그럼 이렇게 하죠.”

정광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천룡단을 두 개의 대(隊)로 나누는 거예요. 지룡단은 뭐 그럴 필요까진 없고.”

“그래서?”

“한 대는 중원에서 활동하고 한 대는 청해성으로 보내는 거죠. 중원에서 사마련과의 싸움으로 경험을 쌓고 합도 맞추는 겁니다.”

“……그리고 청해성으로 가서 마교의 침공을 대비한다?”

“네. 괜찮은 그림이죠.”

“……멀리 보낼 사람은 먼저 청해성으로 보내야겠군. 가까이 둘 사람은 중원에 두고.”

“그러다 가주께서 자리를 잡으신 후 적절히 교대시키면 되고요.”

“……곤륜에서 단주 자리를 갖고 청해성의 단원들을 이끈다. 내 사람이 부단주 자리에 앉아 중원의 단원들을 관리한다. 흐음. 나쁘지 않은 얘기야.”

꺼림칙한 이들만 따로 골라서 청해성으로 보낼 수 있으니 팽수관에겐 좋은 일이었다.

‘너무 노골적으로는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까진 밀어붙일 수 있어.’

곤륜도 나쁠 게 없었다.

천룡단으로 뽑힐 정도면 무공 실력이 보장된 무인이다. 잘 싸우기만 하면 되지 정치적 성향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팽수관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데 자네. 내게 너무 많은 걸 보여주는 거 아닌가? 어느 정도는 숨겨야지.”

“그러고 있어요. 가주님은요?”

“큭큭. 나 역시 그렇네.”

팽수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보게 진옥룡. 자네는 명예욕이 없는가?”

“네.”

“왜?”

“필요 없으니까요.”

“……남이 알아줄 필요가 없단 말이군.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정광은 이미 충분히 대단했다.

팽수관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강휘 말대로군.’

곤륜에 가서 정광을 만난 뒤 무공도 성품도 달라진 둘째 아들이었다.

틈만 나면 정광의 칭찬을 하길래 너무 과하다 생각했건만, 오히려 모자란 감이 있지 않은가.

‘도사이면서 도사가 아니고, 은자(隱者)도 영웅도 될 수 있을 아이라더니, 과연.’

팽수관은 뛰어난 인재를 시기하는 바보들과는 격이 다른 이였다.

오히려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더 띄울 정도로, 그래서 곁에 묶어둘 만큼 그릇이 큰 자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정광은 일이 잘 풀리자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팽수관의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되었다.

“천룡단 단주는 곤륜이 갖게. 그리고 자네는 지룡단을 가지게나.”

* * *

당연히 정광은 펄쩍 뛰었지만 소용없었다.

팽수관의 고집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하아. 일단 어르신들께 말씀드리러 가시죠.”

“흐흐. 그래야지.”

그들은 운학과 허청을 비롯한 곤륜 도사들에게 아까의 얘기들을 말했다.

운학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도사가 된 이로서 그런 지위에는 관심이 없으나, 천룡단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그러는 게 낫겠소이다.”

다른 도사들도 모두 동의하자 팽수관은 지룡단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진옥룡이 지룡단을 안 맡는다면 저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정광이라고 양보할 리가 만무한 일.

그래도 계속 밀어붙이던 팽수관은 허청의 말에 생각을 다시 했다.

“가주. 계속 그러시면 이 녀석 이대로 도망갈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러고도 남을 정광 아닌가.

“으음. 무슨 말씀인지 알겠군요. 일단 이 일은 보류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팽가와 곤륜의 합의가 이뤄졌고,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놀라운 소문이 무림맹을 강타했다.

‘하북팽가가 나서서 원하는 이들에게 무공을 전수하기로 했다!’

‘맹도들이 흘릴 피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참여자들이 서로의 무공 증진을 도모하는 수련회가 될 것이다!’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둘만 모여도 하북팽가의 행사에 대해 떠들어댔다.

“무공을 전수한다고? 허허. 어지간히도 맹주가 되고 싶은가 보군.”

“그래도 그게 어딘가? 지금껏 누가 그런 일을 해왔다고.”

“제대로 된 무공을 가르쳐 줄 리가 있나. 생색이나 내고 끝내겠지.”

“하긴. 교두가 진옥룡이라더군. 그가 가르친 일반 무인이 석가장의 자제를 이겼다지만 운이 좋았던 거지.”

“내 말이. 일반 무인이라면 모를까, 그 외의 후기지수나 배분 높은 사람은 가기가 영 뭐하지 않나.”

“더는 신경 쓰지 마세.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는구먼.”

이렇게 부정적인 의견이 대다수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공은 무인에게 있어 생명보다 소중한 것, 누가 그걸 남에게 대가 없이 뿌리겠는가.

그리고 시간이 흘러 팽가에서 수련회를 열었을 때, 부정적으로 떠들던 사람들 중 적잖은 수가 참가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흠. 흠. 자네는 어쩐 일인가?”

“……그냥 지나가다 들렸네. 그러는 자네는?”

“……소일거리 삼아 나와봤지.”

이렇게 멋쩍어하는 이가 대다수였지만 솔직히 말하는 이도 있었다.

“괜찮은 걸 알려줄지도 모르지 않나. 손해 볼 건 없으니 오늘만 해 볼 생각이네.”

수련회가 열린 곳은 남궁세가가 연회를 열었던 대연무장이었다.

팽수관은 단상에 올라가 정중하지만 힘 있게 포권했다.

“이 팽 모는 곤륜 진옥룡의 선행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소이다! 우리는 강호의 안녕을 위해 모인 존재! 지금부터 팽가는 모두를 위해 무공을 나누고자 하오!”

정광의 공을 추켜세워 자신의 그릇을 드러냈다.

대의명분에 따라 힘을 쏟겠다고 세상에 천명했다.

그야말로 짧고 굵은 연설.

웅혼한 내력이 담긴 그의 외침은 긴가민가하던 사람들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우와아아!”

“진옥룡 만세!”

“팽 가주 만세!”

일반 무인들은 열광했다.

세를 떨치는 곳에 소속된 이들은 환호성을 지르진 않았지만, 팽수관의 그릇과 수단에 감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탐하러 왔던 남궁세가와 관계된 이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팽수관은 그들을 둘러보며 속으로 크게 웃었다.

시작부터 크게 한 방 먹인 기분이었기에.

“이제 무공 교두를 소개하겠소이다! 곤륜의 진옥룡이오!”

정광은 환호성을 받으며 단상 위에 올라갔다.

한 바퀴 둘러보니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하루 전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흘러갔다.

‘미리 준비하길 잘했지.’

정광은 교두가 되기로 했지만 홀로 가르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일반 무인들과 밥을 먹으면서 들었던 푸념 중 제일 컸던 게 제대로 된 무공에 대한 갈증이었다.

그런데 팽가에서 나서서 대대적으로 수련회를 연다.

일반 무인들만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이가 오겠는가.

‘사람이 필요해.’

잠시 발품을 판 그는 교관이 되어줄 만한 이들을 구할 수 있었다.

‘유 소협. 같이 하죠. 개방 비전무공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들과 꼼수만 가르치시면 돼요.’

‘아우. 그건 좀 곤란…….’

‘주에 한 번 일미반점요.’

‘……꿀꺽. 그래도 사부님께서 허락하실 리가…….’

‘방주님도 같이 모실게요.’

‘사해(四海)가 형제이거늘, 형제를 위하는 일에 내 어찌 나서지 않겠는가! 가세나!’

어차피 고기와 술을 즐기려면 누군가 데려가야 하는 정광이었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유정풍과 양회야말로 적임자였기에, 정광으로선 아무런 손해 없는 거래였다.

정광은 사천당문의 당오군과 당예지 남매도 꼬셨다.

‘당 소협, 당 소저. 같이해요.’

‘미안하군. 그러고 싶긴 하나 아우가 알려준 삼보쇄혼(三步碎魂)의 개량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다네.’

‘저도 정광 소협의 말대로 진합다향(塵合多響)을 다시 배합하느라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아. 그래서 그래요? 벌써 여러 종류 만드셨죠? 괜찮은 것도 별로인 것도.’

남매가 그렇다고 하자 정광이 중얼거렸다.

‘제가 먹고 품평해 드리면 더 빨리하실 수 있을 텐데.’

‘……!’

오래전부터 부탁하고 싶었지만 정광이 너무 바빠 말도 못 꺼내고 있던 남매였다.

당연히 바로 넘어갈 수밖에.

그들은 독을 개량시킬 수 있고, 정광은 독을 얻을 수 있었으니 모두에게 좋은 장사였다.

‘저기요.’

마침 남매와 함께 있던 권봉 언의진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뭘 가르치려고 그렇게 사람을 모으는 거죠?’

기대하지도 않았던 물고기가 미끼를 물다니.

정광은 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참여하시면 알 거예요. 당연히 하실 거죠?’

‘그, 그럴게요.’

그 기세에 놀란 언의진은 얼떨결에 대답했고.

기분이 좋아진 정광이 한마디 보탰다.

‘지난번엔 내가 무례했네요. 언 소저는 얼굴도 아름다우시고 주먹에 굳은살도 예쁘게 박혔어요. 무공을 위해 손을 희생한 훌륭한 무인이시란 말이죠.’

마치 서책을 읽으며 말하는 듯한 말투에 언의진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누가 그걸 칭찬이라고 알려줬나요?’

도사보다 더 도사다운 숫총각, 백승무였다.

하여튼 수련회의 교관 자리는 이렇게 대단한 이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구룡사봉 중 셋. 그에 준하는 무재가 하나.

이 정도면 일반 무인은 물론이요, 명문의 젊은 제자들을 가르치기에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정광은 머릿속에서 어제의 일을 지운 뒤 군중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와아아아!”

“그럼 시작하죠.”

“우와아아…… 엉?”

잠시 뒤.

지옥문이 열렸다.

지옥문이되, 겪고 나면 모두가 다시 뛰어들길 원하는 지옥문이었다.

* * *

남궁세가의 숙소.

차를 마시고 있던 남궁화인은 귀를 어지럽히는 발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체통 없는 짓을.’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건 그의 아우 남궁신건이었다.

“가, 가주!”

“지금 뭐 하는 건가? 자네쯤 되는 이가 그래서야 되겠는가?”

“죄송합니다. 무척 급한 일이기에 이리 달려왔습니다.”

“설마 팽가에서 연 수련회 얘기는 아니겠지? 뭐 볼 게 있다고.”

“마, 맞습니다.”

“……무어라? 대체 어떻길래?”

남궁신건이 마른침을 삼킨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 수련회를 비웃던 이들도…….”

“……이들도?”

“……차, 참가하겠다며 줄을 지어 나서고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콰직!

남궁화인이 쥐고 있던 술잔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대체 왜!”

“그, 그것이…….”

“됐다!”

남궁화인은 장포를 펄럭이며 일어섰다.

“내가 직접 확인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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