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대의명분
수련 시간은 하루 한 시진이었다.
수련치곤 무척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광이 가르치는 것은 수련자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오히려 한 시진도 많다 할까?
그 증거로 일곱 명의 청년은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정광은 수련 종료를 알렸다.
“모두 수고했어요.”
청년들은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사제는 거기서 뭐 해? 교두가 그래서야 쓰겠어?”
백승무 역시 쓰러져 있었지만 말할 기력은 남아 있었다.
“……죽을 것 같습니다. 교두 안 하면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되지. 일어나. 씻고 사제 수련 봐줄게.”
백승무가 겨우 일어나자 정광은 쓰러져 있는 청년들에게 포권했다.
“안녕히 가세요. 내일 봐요.”
정광과 백승무가 떠나자 청년들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으으. 진짜 죽겠네.”
“이렇게 힘들 줄이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지만 계속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은 곤륜파가 사용하는 연무장.
자리를 빨리 비워야 했다.
장이가 먼저 일어서서 동료들을 다독였다.
“가세나. 밥도 먹고 운기행공도 해야지. 그래야 내일도 수련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후우. 그러세.”
청년들은 비척비척 일어섰다.
그중 눈이 유난히 퀭한 청년이 헛웃음을 흘렸다.
“거참. 백 소협, 그렇게 안 봤는데 대단하더군.”
장이는 백승무를 떠올렸다.
정광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벌벌 떠는 그들과 달리, 눈도 깜빡 안 하고 달려들던 그 모습을.
‘곱상한 부잣집 도련님으로만 봤는데…….’
정광은 살기를 뿜으며 백승무와 그들에게 덤비라 했었다.
유일하게, 끝없이 달려든 건 백승무 단 한 명이었다.
결국엔 늘씬 얻어터진 뒤 쓰러졌지만, 그 용기와 투지는 청년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때 정광은 이렇게 말했다.
‘사제 같은 마음가짐으로 펼쳐야 해요. 아니면 배워봤자 아무 소용 없을걸요.’
그제야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정광이 가르쳐 주는 몇 개의 초식을 이를 악물고 반복했다.
그리고 정광에게 달려들었다.
수없이 얻어맞아 나뒹굴면서.
‘골병 안 든 게 신기하군.’
정광이 손속에 사정을 둬서 그런 것이었지만 그들에겐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내일도 이러려나?’
몸을 부르르 떤 그들은 천천히 걸어서 연무장을 나갔다.
지나다니던 이들에 의해 소문이 돌았는지, 꽤 많은 이들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못 본 척 외면하며 지나가려 하는데 시비를 거는 목소리가 있었다.
“쯧쯧. 진옥룡은 왜 저런 친구들한테 시간 낭비를 하는지 원.”
고개를 돌려보니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 알다 못해 일반 무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이였다.
장이는 내심 탄식했다.
‘하필이면 저 개차반 같은 녀석한테 걸리다니.’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의 바로 아래.
육방칠단삼장(六幇七團三莊) 중 삼장에 속한 명문가.
태원(太原) 석가장(石家莊)의 막내 공자 석용천이었다.
“어? 아는 얼굴도 있었네. 이보시오, 장 무사. 모르는 척할 거요?”
“……석 공자시군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할 리가 있나. 아니, 본가의 일을 도와야 할 분이 여기서 뭐 하시는 게요?”
장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보직이 석가장 숙소 인근을 지키며 지원하는 것이었는데 석용천은 마치 하인으로 부리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비번입니다만.”
“허어. 이거 실례했군. 아주 큰 실례를 했어.”
과장되게 혼잣말을 한 석용천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래, 그 유명한 진옥룡에게 배우니까 어떻소? 이해는 가시오?”
“……그저 열심히 따를 뿐입니다.”
“흐음. 되려나? 힘들 텐데.”
고개를 갸웃하던 그가 한 손을 들어 손짓했다.
“어디 한번 봅시다. 와보시오.”
“……!”
“왜 그리 다리를 떠시오? 설마 무인이 겁을 먹은 건 아닐 테고.”
아까의 치열한 수련 때문에 그런 것이었지만 구경하는 이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 그들의 눈에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휴우. 안 됐구먼.’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겠는걸.’
석용천이 글러먹은 성품으로 명성이 높긴 하나 명문가의 자제다.
출신에 맞는 최소한의 무공은 지닌 무인인 것이다.
장이 같은 일반 무인이라면 맞서기는커녕 당장 용서부터 비는 게 현명한 길이었으나…….
장이는 어제의 장이가 아니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어.’
석용천은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육방칠단삼장(六幇七團三莊) 중, 눈에 띄게 남궁세가 편을 들고 있는 석가장의 막내 공자였다.
석가장으로서는 하북팽가를 지지하는 곤륜파가 눈에 거슬리는 게 당연한 일. 그렇다고 곤륜파에게 뭔가 해볼 만큼 간이 부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아무 뒤탈 없는 일반 무사인 장이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석용천의 독단으로.
‘내가 숙일까 보냐.’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에서 대놓고 걸어온 시비였다.
‘여기서 물러나면 끝이야.’
정광 덕분에 겨우 다잡은 마음이었다. 그걸 반나절 만에 접으면 앞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정광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용기. 그리고 투지다!’
장이의 입이 열리며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
“보잘것없는 실력이나 감히 석 공자의 가르침을 받아보지요.”
그 뒤로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장이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뭐라고 계속 소리치던 석용천이 날카로운 살기를 쏘아냈고, 동시에 강력한 일권을 질러냈다.
그때, 장이의 몸은 이미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그의 필사적인 의지가 그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정광의 가르침 그대로.
‘단 일초! 근력도 내공도 모든 걸 쏟아붓는다!’
정광의 살기를 경험해서 그럴까.
석용천의 살기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장이의 두 발은 석용천을 향해 직선으로 움직였고,
동시에 허리는 부러질 듯 옆으로 틀어졌다.
석용천의 주먹이 가슴을 스쳐 지나갈 때쯤엔, 장이는 틀었던 허리를 그 반동으로 다시 돌리며 팔꿈치를 내지르고 있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신묘하고, 신묘한 걸 깨닫기 전에 끝나 버리는 일초!
정광에게 ‘눈곱만큼 비슷하네요’라고 칭찬받았던, 단 한 번만 해낼 수 있었던 그 순간만큼 제대로 된 초식!
‘역류이상(逆流而上)!’
콰직!
“끄아악!”
내심 방심하고 있던 석용천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장이는 풀썩 무릎을 꿇으며 자책했다.
‘빌어먹을!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못 먹이다니!’
분명 전중혈(膻中穴)을 노렸건만, 엉뚱하게도 그 아래쪽의 갈비뼈를 부숴 버렸다.
덕분에 죽이지 않고 일을 끝낼 수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제대로 해내지 못한 아쉬움만이 가득했다.
‘……잠깐. 내가 정말 이긴 건가?’
튕겨 나갔던 석용천은 기절한 채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열광했다.
“와아아아아!”
“일반 무인이 석가장의 막내 공자를 이겼다!”
엄청난 환호성이 터졌으나 모든 걸 쏟아낸 장이는 들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연무장 바닥에 누워 있었다.
눈을 떠보니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한 채 주먹밥을 먹고 있는 정광의 얼굴이 보였다.
장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이, 이겼습니다.”
“네.”
“……제, 제가 석가장의 막내 공자를 이겼습니다.”
“잘했어요.”
칭찬을 들었으나 장이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상대가 방심해서였고 운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장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제가 강해질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는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하시기 나름이겠죠. 뭐 운은 좋으신 편이니 다행이긴 한데.”
운이 좋다?
장이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정광을 만났고 또 배웠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러고 싶었다.
“그만 가세요. 우리도 수련해야 하거든요.”
장이도 그러고 싶었지만 모든 걸 쏟아냈기에 그럴 수가…….
‘억!’
장이는 경악했다.
혹시나 해서 움직여 보니 몸이 놀랄 정도로 멀쩡한 것 아닌가!
‘아! 이 느낌은!’
정광에게 검면으로 얻어맞았을 때와 비슷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정광식 추궁과혈의 흔적이었다.
‘몸은 그렇다 치고 내공은 왜?’
한 줌도 안 되는 내공이었지만 모두 쏟아냈었거늘.
대부분이 다시 채워져 있었다.
이 또한 정광이 한 일이리라.
‘그냥 고수가 아니구나. 말로만 듣던 선인이 아닐까?’
장이는 생각에 잠긴 채 집으로 향했다.
작은 반점, 그곳이 그의 집이었다.
잠시 쉬고 있던 어미가 깜짝 놀라 뛰어왔다.
“아이고! 아들! 몸이 왜 이래? 무슨 일 있었니?”
어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장이의 몸을 살펴봤다.
“에구머니나! 성한 데가 없잖아! 안 되겠다, 빨리 누우렴. 엄마가 의원을…….”
“엄마. 죄송해요.”
“뭐? 무, 무슨 일 있니?”
“……나. 더 해야 할 것 같아.”
무인의 길을 더 걷겠다는 말.
무슨 일인가 싶어 안절부절못하던 어미는 안심한 표정으로 아들을 껴안았다.
“난 또 뭐라고. 정 못하겠다 싶을 때까지 계속하렴.”
“……정말 그래도 될까?”
“당연하지. 엄마는 그게 좋아.”
“……크흑.”
이날, 장이는 어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꽤 오랫동안.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정광은 장이를 흠씬 두들겨 팬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소문이 제대로 퍼졌구나.’
어제는 단 일곱 명이었지만, 오늘은 함께 먹고 마셨었던 모든 일반 무인들이 찾아왔다.
그것도 정광이 알려준 기초수련을 제대로 해낸 뒤에.
당연히 그들은 장이와 함께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사제인 백승무 또한 마찬가지였다.
‘석가장 멍청이 때문에 남궁 씨가 화 좀 났겠네.’
자신을 지지하는 주요 가문의 자제가 일반 무인에게 무참히 패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더 웃기는 건, 그 멍청이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그 꼴이 났기에 따질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일반 무인에게 무공을 가르치면 누군가 아니꼬워서 나설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그걸 또 이겨 버렸다.
많은 이들이 정광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났으리라.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안달이 난 이가 있을 것이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이 기회를 놓칠 정도로 멍청하면 맹주 자리는 꿈도 꾸지 않는 게 낫지.’
다행히 팽수관은 그렇게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광을 찾아온 그는 독대를 청했다.
“으하하하! 자네, 한 건 했더군.”
“장 소협이 한 거죠.”
“흐흐. 그랬지. 그게 더 훌륭해.”
팽수관은 능글맞게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자네가 가르치는 일반 무인들 말일세. 무척 열심히 수련하는군.”
“아직 멀었죠.”
“그래, 그래. 자네 눈엔 안 차겠지. 그런데 어쩌나? 어제 일을 들은 다른 일반 무인들도 몸이 달아 어쩔 줄을 몰라 하던데. 그들도 다 가르칠 생각이 있는가?”
“아뇨. 십존 어르신들이 아까도 오셔서 한바탕 하셨어요. 남한테 가르칠 시간이 어딨냐고요.”
“역시 그렇군. 흐음…….”
밤송이처럼 삐죽삐죽한 수염을 쓰다듬던 그가 빙그레 웃었다.
“내 솔직히 말하지. 요즘 밥이 잘 안 넘어가고 있었네. 남궁세가 쪽에서 화려한 연회를 열었는데, 우리는 뭘 해야 더 인상적일까 고민이 많았거든. 그런데…….”
말끝을 흐리던 그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자네 덕분에 좋은 생각이 났네.”
정광은 내심 미소 지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문 것이다.
“밥 대신 무공을 먹이시려고요?”
“크하하! 먹인다? 그래. 아주 마음에 드는 표현이군.”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이나 중얼거리던 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이보게, 진옥룡. 자네가 차린 밥상에 숟갈 좀 얹어도 되겠는가?”
“말씀하세요.”
“본가의 이름으로 원하는 이들에게 잡다한 걸 가르쳐 볼까 하네.”
“그것으론 표를 못 모을 텐데요.”
무림 맹주 선출에 대한 의결권을 가지고 있는 건 구파일방과 칠대세가, 그리고 육방칠단삼장이었다.
나름 내세울 만한 무공을 지닌 그들이 그런 것에 혹해 표를 던질 리는 없었다.
팽수관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거렸다.
“하하하. 무림맹은 하나다, 우리의 적은 사마련과 마교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헛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모두의 무공 증진을 도모하자. 이런 대의명분을 표하려 하는 것일세. 다 알면서 왜 이러는가?”
정광도 피식 웃었다.
‘정파는 이런 점이 참 재밌다니까.’
힘이 모든 걸 지배하고, 그게 부족하면 대가로 꼬시는 천마신교와는 천년만년 동떨어진 사고방식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가 참여해야 사람들이 제대로 모일 걸세. 내가 뭘 해주면 되겠는가?”
팽수관의 진지한 물음에 정광은 가볍게 되물었다.
“맹주가 되시면 청해성으로 고수들을 보내기로 하셨죠?”
“그랬지. 두 개의 단(團)을 만들어서 보낼까 생각 중일세. 중견 고수들로 이루어진 단 하나와 자네 같은 후기지수들과 일반 무인들로 이루어진 단 하나.”
팽수관은 잠시 말을 끊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름도 미리 정했다네. 천룡단(天龍團)과 지룡단(地龍團)! 어떤가?”
“…….”
“음? 설마 마음에 안 드나?”
“뭐 이름은 별 상관없고요. 단주 자리를 주세요.”
팽수관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정광을 살펴봤다.
“……무척 의외군. 그런 자리에는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벅벅 긁던 그는 화통하게 승낙했다.
“좋아! 자네를 지룡단주(地龍團主)로 밀지! 이제 되었는가?”
“아뇨.”
“……무어라?”
“천룡단주(天龍團主) 자리를 주세요.”
팽수관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안 돼. 자네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나 연배가 있지, 누가 승복하겠는가?”
“제가 하려는 게 아닌데.”
“……그럼?”
“제 사부님이 하셔야죠.”
“……!”
“음. 그러고 보니 안 어울릴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러면 사숙님들 중 아무 분한테나 주세요.”
팽수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반드시 곤륜이 그 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정광의 눈매는 여전했다.
“당연하죠. 그래야 곤륜을 위해, 청해성을 위해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