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한번 해보죠
“다들 한 잔씩 받으시죠.”
일반 무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술 때문이 아닌, 다른 열망 때문이었다.
‘드디어…….’
그냥 얻어먹을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었다.
정광과 말이라도 섞다 보면 운 좋게 작은 가르침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온 것이었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선 그들은 두 손을 모아 예를 취했다.
어느샌가 반점에서 뛰쳐나온 더벅머리 청년도 함께였다.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자. 받으세요.”
정광은 수십 명의 무인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라준 뒤, 찻잔을 높이 들었다.
물론 그의 찻잔에는 차 대신 미리 따라놓은 술이 들어 있었다.
“마시고 죽죠!”
“……!”
“아. 너무 속된 말이었나?”
그럴 리가 있나.
일반 무인들은 열광했다.
“우와!”
“마시고 죽자!”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그들은 앞다퉈 정광에게 다가왔다.
“제가 차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다음은 접니다!”
정광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차를 수십 잔 마셔야 할 판 아닌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닥치니…….
‘그냥 술로 달라고 해?’
그러기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마신 뒤,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할 수도 없는 일.
결국 정광은 차를 수십 잔 마시게 되었다.
“아. 배 터지겠네.”
정광의 말에 모두 크게 웃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명문의 제자들과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이리도 소탈할 줄이야.
“그만 앉아서 드시죠.”
정광은 그들 틈에 끼어 앉아서 얘기를 나눴다.
잠깐 주저하던 무인들은 조금씩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자 너 나 할 것 없이 즐겁게 떠들게 되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정광은 분위기가 무르익자 운을 떼었다.
“청해성에만 있다가 중원에 오니까 참 복잡하네요.”
“하하. 아무래도 그러시겠지요.”
“무림맹은 더하고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요.”
무인들은 신이 나서 나섰다.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든지 물으시지요.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는 게 있어야 묻죠.”
사람들의 눈이 빛났다.
그들의 입에서 많은 얘기가 흘러나왔다.
정광은 꽤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들이 대다수였지만.
“아아. 재밌네요. 혹시 맹주 선출과 관계된 일들도 아시나요? 관계돼 있는 문파와 가문의 동향이라든지.”
무인들은 흠칫했다.
‘대놓고 맹주 선출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혹시라도 내가 말했다는 소문이 돌면…….’
‘당사자인 이들에게 찍힌다. 말할 이유가 없어.’
장내가 조용해졌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정광은 그들에게 말할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재밌는 얘기들을 들려주시는데 받아먹고 입 닦을 순 없죠. 답례로 몇 수 알려 드릴게요.”
“……!”
정광이 누구던가.
구파일방 중 하나인 곤륜의 제자.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귀가 솔깃한데 구룡사봉을 뛰어넘는 무재요, 십존 중 셋의 공동전인이다.
기회였다.
그들이 원하던 것이 바로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말씀들이 없으시네. 없나 봐요.”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불타올랐다.
그들의 입에서 수없이 많은 얘기가 흘러나왔다.
정광은 아주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들이 아닌 중요한 것들이었다.
‘괜찮네.’
꽤 도움이 될 만한 얘기들이었다.
옆에서 듣던 백승무가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을 정도로.
정광이 흡족한 미소를 짓자 더벅머리 청년 장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어떤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십니까?”
“기초수련법이랑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초식 몇 개요.”
쓸 만한 초식 한두 개만 건져도 만족할 판인데 기초수련법까지?
장이를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물론 약관을 넘긴 이가 대다수라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초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 곤륜의 것은 아니겠지만 그 유명한 진옥룡이 알려주는 기초수련법 아닌가.
조금이나마 더 강해질 수 있는 기반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와아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 장이는 조금 더 욕심을 내봤다.
평생 이런 기회는 또 없을 게 분명했기에.
“……구명절초(求命絶招)를 알려주시는 겁니까?”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무, 묻는 게 아니라 요구잖아!’
‘장이 저 새끼! 잘 돌아가는 판에 초를 쳐버려?’
정광이 화를 내며 없던 일로 하자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다들 바짝 긴장한 채 정광의 입술을 바라봤다.
“구명절초 같은 거 모르는데요. 알아도 알려 드릴 마음도 없고요.”
역시나.
사람들의 얼굴에 깊은 실망과 분노가 떠올랐다.
모두 날카로운 눈빛으로 장이를 쏘아보는데…….
“강호가 얼마나 험한데 살아남을 생각만 하나요?”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그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상대를 죽여야죠. 살명절초(殺命絶招)를 알려 드릴게요.”
* * *
항상 일찍 일어나는 장이였지만 오늘만큼은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으나 그의 눈동자는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좋아. 가자.”
침상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딛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크윽. 이럴 줄 알았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일각 정도 움직이자 통증이 익숙해지고 걷는 데도 무리가 없어졌다.
세안하고 의복을 갖춰 입은 그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시리도록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로 밀려들어 오며 정신을 일깨웠다.
“아들. 벌써 가는 거니?”
뒤를 돌아보니 피곤한 기색의 어미가 보였다.
“왜 일어나셨어요. 더 주무세요.”
“엄마는 괜찮아. 아들이야말로 자면서 끙끙 앓던데…….”
장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미의 말대로 그의 온몸은 아직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가 알려준 기초수련법 중 첫 번째 것만 했을 뿐인데도 이 모양이라니.’
하지만 그는 씩 웃으며 어미를 달랬다.
“하하. 기대돼서 잠을 설친 거예요. 이러다 늦겠네. 그만 가볼게요.”
“그래. 조심히 다녀오렴.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장이의 가슴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엄마야말로 무리하고 있잖아요.’
어제 하루가 아니라 매일 그랬다.
밥시간이 되면 일을 도울 사람들이 오지만, 결국 요리를 책임지는 건 그의 어미였다.
그가 고수가 되겠다는 허황된 꿈을 내려놓고 일을 도우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이번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더 해보고 다시 생각해 보자.’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고수가 되고 싶었다.
“아, 아들? 왜 이래?”
“잠시만요, 엄마.”
장이는 어미를 꼭 안았다.
보기보다 더 작고 서늘한 몸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장이는 이를 악물었다.
‘오늘 확인해 보고 안 되면…….’
잠시 뒤, 그는 어미를 안았던 팔을 풀고 과장스럽게 웃었다.
“다녀올게요!”
“아차. 내 정신 좀 봐. 진옥룡이라고 하셨지? 백 소협이랑. 이것 좀 전해 드리렴.”
어미의 손에는 작은 보퉁이가 들려 있었다.
“이게 뭔데요?”
“주먹밥이야. 넣은 건 별로 없지만 빈속은 채우실 수 있을 거다.”
“……그냥 더 주무시지.”
“금방 만들었어. 네 것도 넣었으니 가면서 먹으렴.”
장이는 어미를 한 번 더 안은 뒤 길을 떠났다.
무림맹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주먹밥을 씹으며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결국 무림맹에 도착한 그는 곤륜파가 쓰고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직 아무도 안 왔네.’
정광에게 가르침을 받기로 한 일반 무인들 중 그가 제일 빨랐다.
‘어? 안에 사람이 있나?’
담 너머로 인기척이 있는 것 같아 귀를 기울이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우와아아아!”
우렁찬 환호성과 함께 화려한 도복을 입은 노도사들이 담을 넘어 활활 날았다.
‘저, 저건!’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곤륜파 의 도복 아닌가!
콰앙!
연무장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중년 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찌나 빠른지 땅 위를 날아가는 듯한 신법이었다.
‘대, 대체 뭐야?’
열린 문 사이로 들여다보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청년 도사들이 보였다.
유일하게 서 있는 건 정광, 단 한 명뿐이었다.
“어? 왔어요?”
정광의 말에 장이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수련 중이셨군요. 죄송합니다.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아뇨. 끝났는데요, 뭘. 잠시만요.”
정광은 청년 도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더 하시려고 누워 계신 건 아니죠?”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청년 도사들이 이형환위(移形換位)를 펼친 것처럼 빠르게 일어섰다.
“헉. 헉. 사제, 무슨 그런 말을.”
“태상노군께서 섭섭해하실 거다. 도경을 읽을 시간 아니더냐.”
“그럼 이만…… 크흑.”
청년 도사들은 절뚝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서 있는 장이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급히 시선을 맞추며 마주 인사하던 장이는 의아한 점을 느꼈다.
‘저 눈빛은…… 동정심?’
생각을 더 이어가려는데 정광이 그를 불렀다.
“일찍 오셨으니 먼저 시작하죠. 어? 사제. 일어나. 왜 누워 있어?”
연무장 바닥과 하나가 되어 있던 백승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사, 사형…… 도저히 일어나지 못 하겠…….”
“아직도 체력이 부족할 리가 없는데. 사제도 이분이랑 같이 수련해야겠구나.”
“하압! 이미 일어났습니다!”
“거봐. 괜찮잖아.”
“……그, 그러게 말입니다.”
지켜보던 장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어제 기초수련이라며 알려줬던 것들만 해도 기함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더 심할 것 같은 분위기가 팍팍 풍기지 않는가.
“이리 오세요.”
“……네, 네!”
장이가 절뚝거리며 다가가자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 드린 거 열심히 하셨네요.”
“그,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보이니까요. 근데 그건 뭐예요?”
“아! 어머니가 두 분 요깃거리라도 하시라고…….”
“오오. 뭐 이런 걸 다.”
정광은 보퉁이를 냉큼 받은 뒤, 장이의 손목을 잡았다.
그 손짓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빠른 속도도 아니었는데 피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공 진짜 빈약하시네.”
“…….”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팠다.
“뭐 차라리 이게 낫지. 한번 해보죠.”
“……!”
무슨 의미인진 몰랐지만 가슴이 설렜다.
“아. 근육부터 풀어야지.”
정광이 검을 뽑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조차 얼려 버릴 정도로 시린 예기(銳氣)를 발산하는 검날이 드러났다.
‘서, 설마 날 베려고?’
그럴 리가 있나.
정광은 검면으로 장이의 전신을 두들겼다.
퍽! 뻑! 뻐억!
“억! 컥! 크윽!”
장이는 항의할 생각도 못 하고 계속 두들겨 맞았다.
‘이, 이러다 죽는…… 어?’
어느샌가 구타가 끝나 있었다.
정광은 그를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몸이 가뿐해졌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됐다.
‘근육통이 거의 사라졌어!’
오히려 검면으로 얻어맞은 통증이 더 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장이는 눈을 부릅뜨고 더듬거렸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추궁과혈(追宮過穴) 했으니까 당연하죠.”
“……!”
검으로 두들겨 패놓고 추궁과혈이었단다.
‘그건 손으로 진기를 불어넣으면서 안마하는 거 아니었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정광은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몸 스스로 회복되어야 하는데, 자꾸 이러면 회복력이 약해지거든요.”
“…….”
“다른 분들도 오시네. 어제 알려 드렸던 체조법 있죠. 그거 좀 하고 계세요.”
“아, 알겠습니다!”
장이는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온몸을 움직였다.
무슨 대단한 신공절학이 아닌 단순한 체조법이었지만, 행하면 행할수록 몸이 편해지고 마음도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장이는 계속 움직이며 정광과 그 앞에 늘어선 일반 무인들을 보았다.
정광은 정말 귀신같았다.
잠깐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수련을 했는지 안 했는지, 했다면 얼마나 했는지 아는 것 같았다.
“알려 드린 거 하나도 안 하셨네.”
“아,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가세요. 제대로 하고 내일 다시 오시면 받아드릴게요.”
“저, 저는…… 히익!”
단지 쏘아봤을 뿐인데.
청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미친 듯이 달아났다.
정광은 계속 사람들을 가려냈다.
“열심히는 아닌데 조금은 하셨네. 어떡할까.”
“하,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죠. 저기 장이 소협 옆에 가서 체조법 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조금이라도 늦게 온 이는 칼같이 돌려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었건만.
결국, 남은 건 장이를 포함해서 일곱 명밖에 안 되었다.
정광은 그들을 둘러보며 손뼉을 쳤다.
“자. 자. 이제 시작해 보죠.”
“네!”
“사제. 이리와.”
“네?”
백승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옆에 서자 정광이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여러분의 무공 교두가 될 백승무예요. 훗날 금권검협(金權劍俠)이라고 불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