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명색이 무림맹인데
사람들이 일어나 두 손을 모으며 예를 취했다.
남궁화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으며 사람들에게 일일이 포권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단상 위에 올랐다.
‘흐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좋군.’
다른 이들보다 조금 높은 곳에 섰을 뿐인데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역시 그에게 어울리는 곳은 이런 높은 곳이었다.
남궁화인은 그의 밑에 서 있는 이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꽤 익숙한 얼굴들, 난생처음 보는 얼굴들, 그리고…….
난생처음 보다 못해 믿지 못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
‘……저놈인가?’
곤륜파의 자리에 있다.
소문대로 잘난 얼굴이다.
그러니 진옥룡이 확실하리라.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놈이군.’
소문대로인 건 얼굴만이 아니었다.
성품에 하자가 있다더니 눈빛부터 글러먹지 않았는가.
‘짜증? 귀찮음? 무시?’
순간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지만 억지로 내리눌렀다.
어차피 그의 밑에 있는 존재.
앞으로는 더 밑에 있게 될 보잘것없는 녀석이었다.
남궁화인은 마음을 다스린 뒤 내공을 끌어 올려 말했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준비했습니다만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아주 좋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남궁화인은 빙그레 웃어 보인 뒤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피땀을 흘리시며 무림을 지켜오신 선배들이 계시지요. 제 연배가 낮지 않지만, 저절로 몸가짐을 조심하게 됩니다.”
나이가 있는 이는 뿌듯한 표정을, 적은 이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확인하여 바르게 했다.
“선배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배들을 본받아 무림을 위해 나서신 강호제현(江湖諸賢)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련한 자리이니 마음 편히 즐겨주십시오.”
짧지만 의미 있는 연설을 한 남궁화인은 단상 밑의 사람들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사람들도 답례하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간혹 남궁화인의 이름을 연호하는 이도 있었는데 그걸 들은 그는 애써 무심한 척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남궁세가의 자리로 가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호감을 표하는 얼굴, 경계의 빛을 띠는 얼굴, 둘 다 마음에 들었다.
그의 강함과 위대함 때문에 그런 것이었으니까.
‘근데 저놈은…….’
정광만큼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이었다.
* * *
정광은 남궁화인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인정했다.
‘바보는 아니네.’
사람을 모아놓고 말 많이 하는 건 바보 중의 바보짓이다.
말이 길어질수록 제 자랑이나 잔소리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러 온 사람들이 그걸 좋아할 리가 있나.’
전생의 정광이 천마신교에서 연회를 열 때는 항상 이랬다.
불만 있는 놈은 나와.
없어?
그럼 먹고 마시다 죽어라.
깔끔하지 않은가?
그에 비해 남궁화인은 잡설이 길었는데…….
‘정파치곤 아주 짧은 거지.’
내용도 정파다웠다.
쓸데없는 겸양과 가식적인 말로 호감을 샀다. 예의를 지키고 부담도 더는 말을 해서 좋은 인상을 줬다.
‘제법 사람을 다룰 줄 아네.’
그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아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뭐 원래 싫어하는 이는 어쩔 수 없지만.’
저 멀리 있는 팽가의 사람들이 그랬다.
그중 장대한 체구에 험악한 인상의 중년인이 그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하북팽가의 가주가 왔다더니 저자인가.’
한가락 하게 생긴 걸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정광이 바라보기만 하자 중년인은 손을 더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웃어?’
더러운 인상이 더 더러워 보였다.
지금 당장 천마신교에 던져놔도 전혀 위화감 없이 섞일 얼굴이었다.
“팽 가주로구나. 네가 마음에 드는가 보다. 너는 어떻게 느끼느냐?”
허청의 말에 정광이 대답했다.
“사람 많이 죽인 얼굴이네요.”
“푸흡. 위, 위맹한 인상이긴 하지.”
찻물을 뿜은 허청은 입가를 소매로 훔친 뒤 전음을 보냈다.
-이번 맹주 선출은 배분 교체라는 큰 의미가 있다. 남궁 가주와 팽 가주처럼 나와 같은 배분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지.
-일을 많이 벌이려 하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런데 저 두 사람은 성향이 판이하다. 누가 맹주가 되느냐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많이 바뀔 게야.
정광은 여기저기서 들었던 두 사람의 성품을 떠올렸다.
‘팽 씨는 호한인데 야망이 크다 했지.’
생긴 건 마두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그럴 것 같다.
‘남궁 씨는 의기가 있고 겸손하다 했는데…….’
생긴 건 그럴듯했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정반대였다.
한마디로 위군자.
전생에 정파에 대해 가졌던 편견과 정확히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남궁 가주보단 차라리 사부님이 맹주가 되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높게 봐줘서 고맙다. 그런데 그 ‘차라리’라는 말이 마음에 좀 걸리는구나.
정광이 씩 웃자 허청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그리고 남궁화인과 팽수관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남궁 가주가 먼저 일을 벌였으니 팽 가주도 뭔가 하겠지. 이런, 요리가 다 식겠구나. 어서 먹거라.”
“네.”
곤륜 도사들은 맛있게 많이, 정광은 깨작깨작 조금 먹었다.
‘아차. 사제.’
나가서 먹으려면 지금 배를 채우면 안 되건만.
백승무는 배가 무척 고팠는지 열심히 먹고 있었다.
‘할 수 없지. 너는 같이 가서 냄새만 맡아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기에 슬슬 일어설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데.
하북팽가주 팽수관이 팽수원, 팽강웅과 함께 다가왔다.
“팽가의 팽수관이 곤륜의 진인들을 뵙습니다.”
‘진인’이란 말을 부정했다가 여러 번 오해를 산 운학은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반갑소. 곤륜의 운학이오.”
사람이 많았기에 인사하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정광의 앞에 서게 된 팽수관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진옥룡이군. 반갑네.”
“안녕하세요.”
“하하. 강휘에게 얘기 많이 들었지. 이번엔 일이 있어 못 오게 되었는데 안부를 전해달라더군. 자네가 본가에 한번 오기로 했다지? 무척 기다리고 있다네.”
기다린다고?
팽강휘가 와달라 한 건 맞지만.
정광이 가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뭐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대충 지나가려는데 팽수관이 계속 말을 걸었다.
“자네, 본가의 숙소에 잠깐 들러줄 수 있나? 내 좀 할 말이…… 음?”
팽수관이 서서히 뒤돌았다.
눈앞에 당기황, 걸존, 창존이 서 있었다.
“십존 어르신들이셨군요. 강녕하셨습니까.”
그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인사하자 당기황이 대표로 말했다.
“덕분에 잘 있었소, 팽 가주.”
“하하.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찾아뵙고 인사드리려 했는데 이렇게 먼저 와주시니 면목 없습니다.”
“괜찮소. 헌데, 혹 팽가에서도 내 제자를 노리는 것이오?”
“……네?”
당기황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정광 저 녀석 말이오.”
“아!”
정광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십존 중 셋이 공동전인으로 삼았다 했지.’
팽가도 끼어들까 봐 다급히 달려온 것이리라.
팽수관은 두 손을 살짝 들고 엄살을 부렸다.
“하하. 십존께서 깨달음을 내리시는데 제가 어찌 끼어들겠습니까? 진옥룡 이 친구가 제 둘째와 연이 있어 얘기 중이었을 뿐입니다.”
그제야 당기황을 비롯한 노인들은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풀었다.
“가주의 말은 무겁기로 이름 높으니 믿겠소이다.”
“오오. 칭찬해 주시니 기분 좋군요. 그런데 어째 전보다 더 정정해지신 것 같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팽수관의 넉살은 대단했다. 당기황, 걸존, 창존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정광은 내심 감탄했다.
‘곰보다 너구리 같더라니, 과연.’
잠시 후, 사천당가주 당영중이 당가 식솔들을 끌고 왔고 악가의 수장인 악형익도 몇몇 이들과 함께 와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방 방주인 양회와 후개인 유정풍이 거지들과 함께 합세했으며, 별다른 안면이 없던 문파의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정광과 한두 마디를 나눈 뒤 곤륜 도사들과 어울렸다.
삽시간에 사람이 모여 북적북적해졌다.
‘이건 또 뭐야?’
차가운 기운이 느껴져 돌아보니 남궁화인이 정광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 가득 떠올린 인자한 웃음과는 반대로 무척 차가운 눈빛이었다.
‘이쪽에 사람이 많이 모여서 불편한가.’
남궁화인은 곧 시선을 돌려 주위에 있는 이들과 웃음꽃을 피웠다.
화산, 종남 등 꽤 많은 문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 숫자로 보면 아직도 저쪽이 더 많네.’
남궁화인에게도, 팽수관에게도 다가가지 않고 자신들의 자리에서 묵묵히 식사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저들을 많이 끌어들이는 쪽이 맹주 자리에 오르게 되리라.
‘그건 그거고.’
다들 무척 할 말들이 많아 보였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정도로.
‘슬슬 떠야지.’
정광이 말하는 것보단 대사형인 정우가 나서는 게 모양새가 나았다.
-대사형.
-응? 갑자기 웬 전음이냐?
-어르신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데 우리 먼저 가죠.
-으음. 그게 좋겠군. 알겠다.
정우가 허청에게 다가가 정 자 배는 이만 돌아가겠다 말했다.
헌데 허청이 빙그레 웃는 것 아닌가.
“강호에 나왔는데 비슷한 연배의 이들과 어울려 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
“넌 정 자 배의 대사형이다. 그 무게를 알아야 해. 네가 앞장서거라.”
머나먼 청해성에서 언제 또 중원에 오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이 기회에 사제들을 이끌고 다른 문파의 청년들과 친분을 쌓으라는 충고였다.
‘대사형으로서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이건만…….’
정우는 소극적으로 대처해 온 자신을 책망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사백.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우와 작은 친분이 있던 유정풍이 호탕하게 웃으며 나섰다.
“하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가시지요.”
별다른 친분이 없던 당오군과 당예지도 거들었다.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정우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른 정 자 배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맙습니다. 신세 지겠습니다.”
하지만 정광은 아니었다.
‘애들이랑 놀라고? 그것도 떼로?’
각 문파의 혈기왕성한 녀석들이 모여서 어울리다 보면 귀찮은 일이 터질지도 몰랐다.
거기에 발을 담글 마음은 추호도 없는 정광이었다.
-사부님. 저는 따로 움직일게요.
난데없는 전음에 허청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좋은 일요.
-흐음. 말해봐라. 타당한 것이면 허락하마.
-사실…….
나가서 고기 먹으려는 건데.
이렇게 말했다간 답이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인 상황.
하지만 정광이 누군가.
수많은 사선을 헤치고 살아남아 결국에는 진천마라 불리며 경배받았던 존재 아닌가.
‘그냥 튀어?’
다행히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마침 대연무장 문밖에서 부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일반 무인들이 보인 것이다.
정광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차별이 너무 심해서요. 일반 무사들도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눈짓으로 밖에 있는 일반 무인들을 가리키자 허청이 한숨을 쉬었다.
-허어. 내 미처 생각을 못 했구나. 명색이 무림맹인데 힘 있는 자들만 챙기다니…….
정광을 대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허청은 얼마 안 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네.
-무량수불. 원시천존이시여. 이걸 믿어야 하나이까?
-사부님. 그걸 굳이 전음으로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허청이 피식 웃었다.
-사부인 내가 널 안 믿으면 누가 믿겠느냐?
-그럼 지금 갈게요.
-대신 약조해 다오. 그 누구와도 싸우면 안 된다. 아니, 일방적으로 때려서도 안 돼.
-믿으신다면서요.
-그나마 믿으니까 이러는 게다.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게요.
-그래. 그럼 다녀오너라.
허청에게 허리를 굽힌 정광은 시선을 돌려 백승무를 찾았다.
‘어? 이놈 봐라?’
백승무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잽싸게 정우 옆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딴청을 부렸다.
-사제. 요즘 수련이 너무 편했어?
-……사형. 제가 모시겠습니다.
정광은 정우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백승무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유정풍, 당오군, 당예지가 함께 가자고 권했으나 선약이 있다고 말하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정광은 대연무장 문을 나가서 일반 무사들에게 물었다.
“배고프시죠?”
“……네?”
당황하는 그들을 보며 정광이 싱긋 웃었다.
“같이 가요. 제가 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