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61화 (61/569)

61화

딱 봐도 속이 시커먼 놈

정광에겐 의외의 말이었다.

‘더 좋은 길?’

그럴 만한 거라면…….

‘창존을 가문에서 쫓아내기로 한 건가?’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싸움 좀 잘하면 뭐 하는가.

사고 안 치고 약한 게 낫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광을 악형익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허청 도장과 친분이 있는 덕에 자네에 대해서 많은 걸 들었지.”

“어떤 얘기를요?”

“천재 중의 천재요, 고금제일천재에다 진짜 용이라 불릴 만한…….”

허청이 크게 헛기침했다.

“크흠! 흠! 악 대협. 본론을 말하셔야 하지 않소.”

“하하하. 알겠소이다.”

곤란해하는 허청을 눈짓으로 한 번 더 놀린 악형익이 말을 이었다.

“진옥룡 자네가 백부님의 깨달음을 받았으면 좋겠네.”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거였어? 그런데 왜?’

손해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내게 손해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가 이득을 얻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런데 가문의 큰 어른이 얻은 깨달음을 외인보고 받아달라고?

‘무슨 꿍꿍일까.’

정광이 바라보기만 하자 악형익이 손을 들어 보였다.

“의구심 갖지 말게. 어쩔 수 없어서 이러는 거야.”

악형익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창존의 고집을 꺾기는 힘들다. 그럴 바엔 원하는 대로 정광에게 깨달음을 전수하게 하고, 후일 정광에게 가문의 사람에게 전해달라 부탁하는 게 낫다. 이런 말이었다.

“사실 쓸데없는 욕심이지. 백부님 같은 절대고수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무림에 몇이나 되겠는가? 현재 본가의 사람 중에는 없어.”

“그러니 나중에 깨우칠 만한 인재가 있으면 가르쳐 달라 이 말씀이세요?”

“그렇네. 자네 사부에게 듣자니 자네는 무척 잘 가르친다더군.”

“그렇긴 하죠.”

“하하하. 시원시원해서 좋아. 내 할 말은 다했네. 그래, 어떤가?”

“별로 생각 없는데요.”

“역시 그렇군. 혹 원하는 게 있나? 대가라 하긴 뭐하고 성의 표시 삼아 주고 싶네만.”

정광은 산동악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북송(北宋)의 명장 악비(岳飛)의 후예. 그가 모함받아 죽은 뒤 몰락했다가 다시 공을 인정받아 크게 일어났다 했지.’

산동의 대지주이자 표국 사업을 활발히 하는 가문이다. 전장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술이 유명하며 군부에도 많은 고수가 포진해 있다.

누가 봐도 대단한 가문이었지만.

정광에겐 제법 괜찮은 집안이었다.

“특별히 원하는 거 없는데요.”

“하하하. 도사답게 욕심이 없군. 그럼 내가 한번 제안해 보겠네. 운학 진인을 비롯한 다른 분들께도 이미 말씀드렸으니 자네만 승낙하면 되네.”

너털웃음을 터뜨린 악형익이 손가락을 두 개 폈다.

“하나. 이번 맹주 선출에 팽가를 지지하겠네. 팽가에서 맹주 자리를 차지하면 고수들을 뽑아 청해성으로 보내 마교를 견제하기로 했잖나.”

“거기에 힘을 더 실어주시겠다는 말씀이네요.”

“그렇네. 그리고 둘. 본가는 산동과 하북을 위주로 작은 표국 사업을 하고 있지. 이쪽은 고관대작들이 많이 살고 있네. 사치품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이야.”

“서역 교역에 투자하시려고요?”

“하하. 마침 자네 사제가 백가상단 자제더군. 우리와 연계하면 백가상단도 더 커지고 청해성 사람들도 더 많은 중원 물자를 쉽게 받을 수 있게 될 걸세.”

나쁘지 않은 얘기였다.

산동악가도, 곤륜을 포함한 청해성 사람 모두에게.

그런데.

“그거 다 원래 하시려던 거죠.”

“이런. 들켜 버렸군. 더 크게 하겠네.”

“저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허청이 얼굴을 붉히고 악형익은 대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 자네 정말 마음에 드는군. 그래, 사내라면 이렇게 솔직해야지.”

웃음을 멈춘 악형익이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모르겠네. 생각해 보고 답을 주게나.”

나쁘지 않은 얘기였다.

받아낼 건 받아내고 본다.

훗날 악가에서 사람을 보내도 멍청해서 못 알아들으면 있는 그대로 얘기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실 수 있으세요? 가주는 아니신 것 같은데.”

“자네 말대로 가주는 내 형님이시지. 하지만…….”

악형익이 장난스럽게 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은 가문 일에 관심 없으시거든. 내가 다 맡아서 하고 있네. 본가는 무림맹과 가까운데도 내가 대신 오지 않았는가.”

허청이 옆에서 사실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정광은 감탄했다.

“그래도 가문이 돌아가요?”

“나를 갈아 넣어서 돌리고 있지.”

정광은 겸양 없이 자신을 내세우는 악형익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하죠. 뭐가 좋을지는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 * *

다음 날.

걸존과 창존이 정광에게 깨달음을 전수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무림맹을 휘돌았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독존, 걸존, 창존의 공동전인이다.

무공에 미친 무인들에게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어디 있겠는가.

덕분에 무림맹주가 되고자 위풍당당하게 무림맹에 도착한 남궁세가주와 하북팽가주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남궁세가주 남궁화인의 추상과 같은 꾸짖음에 무림맹에 있던 남궁세가 식솔들은 숨을 죽였다.

“맹주 선출 얘기는 어디 가고 왜 곤륜파의 어린 녀석에 대해서만 떠들고 있는 것이야! 신건! 대답해 봐라!”

남궁세가 무인들을 이끌고 무림맹에 먼저 와 있었던 남궁신건이 식은땀을 흘렸다.

“잠깐의 화젯거리일 뿐입니다. 가주께서 맹주 위에 오르시는 데 문제가 없도록 각 문파의 확답을 받았으니 걱정 안 하셔도…….”

“확답? 진심으로 말하는 겐가? 무림 일에 확답이 어딨어!”

“…….”

“진정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게냐? 말해보아라!”

다들 몸을 사리자 아들인 남궁력이 나섰다.

“아버님. 고정하시고…….”

“고정? 나보고 지금 고정하라고?”

“그, 그게…….”

“오면서 다 들었다! 네 별호가 검룡이 아니라 변룡이 되었다고! 똥싸개 말이다!”

“…….”

남궁화인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아들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에잉.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

도대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보다 어린놈에게 망신을 당하질 않나, 설욕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안 보이질 않나.

남궁세가 최고의 후기지수란 놈이 이게 무슨 꼴인가.

‘체면이고 뭐고 빨리 올 것을.’

이번 맹주 자리를 노리는 건 남궁세가의 남궁화인과 하북팽가의 팽수관이었다.

서로 체면을 차리느라 늦게 출발했고, 근방에 이르러서도 눈치를 보며 발걸음을 조절했다.

그래서 동시에 도착했건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곤륜이 팽가에 손을 들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일. 다른 이들의 마음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궁화인은 작은 변수 거리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맹주 자리는 그의 것이었기에.

그것만 보고 달려온 삶이었으니까.

‘후우우. 상황을 주도해야 해.’

남궁화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궁신건을 쏘아봤다.

아까는 호통쳤지만 남궁신건은 능력 있는 아우였다. 그래서 이곳에 미리 보냈던 것이고 일도 제대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했다.

“신건. 이제부턴 내가 직접 일을 진행하겠다.”

“……네. 가주.”

대체 뭘 하려는 건지 다들 힐끔거리자 남궁화인이 외쳤다.

“연회를 열어라! 본가의 위엄을 모든 이가 똑똑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게!”

한편, 하북팽가주 팽수관은 남궁세가주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거참.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아우는 어찌 생각하나?”

팽수원이 답했다.

“허청 그 친구가 말하길 악가는 본가를 지지하기로 했답니다. 개방은 모르겠으나 당가도 마음이 있는 것 같고요. 이 기회에 한번 다 같이 만나보시지요.”

“어차피 선출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다들 보긴 해야지. 그리고 진옥룡이라는 그 친구. 아우나 강휘가 칭찬할 땐 반신반의했는데 진짜 인물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반드시 친우로 지내야 할 아이입니다.”

팽수관의 시선이 첫째 아들 팽강웅에게 향했다.

“너도 만나봤지? 사귈 만한 아이더냐? 무공이 아닌 됨됨이를 묻는 것이다.”

팽강웅은 잠시 고민했다.

되도록 낮추고 싶었지만…….

그의 아비는 현명했고, 거짓을 싫어하는 이였다.

“다소 거칠고 경박한 면이 있으나 나쁜 심성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소문도 그렇고 직접 대한 너희들도 그리 말하니 나도 한번 만나봐야겠군.”

팽수관이 팽수원에게 일렀다.

“자리를 만들어보게. 되도록 빨리.”

“네. 가주. 그렇게 하겠습니다.”

호기심을 느끼는 아비.

호감을 드러내는 숙부.

팽강웅은 그들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 *

정광은 무척 바빠서 외부인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악가의 숙소에 온 그는 노인들의 시끄러운 말싸움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자야! 이런 떨거지들에게 뭘 배우겠다는 것이냐! 내 깨달음부터 마저 깨쳐야지!”

“흥! 땅꾼 주제에 뭘 가르쳐? 뱀 잡아서 약 달이는 거? 제자야. 저놈은 신경 쓰지 말고 시작하자꾸나.”

“저기요. 걸존 어르신.”

“사부!”

“저는 어르신께 배우기로 한 적 없는데요.”

옆에 있던 창존이 근엄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허어. 걸존, 자네. 당사자의 승낙도 없이 가르치러 온 건가? 이 무슨 무례하다 못해 정신 나간 짓인가?”

당기황도 합세해서 걸존을 비난했다. 두 절세고수의 합공에 쩔쩔매던 걸존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정광은 네놈들 것도 배우기 싫은데 억지로 배우는 거잖아!”

“그건 그렇죠.”

정광이 인정하자 난리가 났다.

“제자야!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잘 몰라서 그런다. 내게 배워보면 세상이 달라지는 걸 느낄 게야.”

“흥. 다 같은 처지에 날 괄시해? 꼴좋구나.”

정광은 세 노인이 드잡이질하는 모습을 보며 결심했다.

‘빨리 끝내자.’

당기황의 것을 이틀 만에 해치웠으니 창존의 것도 그 정도면 되리라.

그런데 걸존은?

‘뭐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정광은 당기황과 걸존을 쫓아낸 뒤 창존의 깨달음을 배웠다.

그리고 이틀 만에 깨달았다.

“괜찮네요. 기회 되면 꽤 유용하게 쓸 수 있겠는데요.”

“……이, 이렇게 빨리?”

경악하는 창존을 정광이 위로했다.

“어차피 지금은 펼치지 못하는데요, 뭐.”

“……지금 그게 문제냐?”

“아. 밥 먹어야지. 안녕히 계세요.”

정광은 멍한 표정을 짓는 창존에게 인사한 뒤 신법을 펼쳤다.

‘일미반점에 한 번 더 갈까? 사제를 데려가야겠네.’

곤륜파의 숙소에 도착한 그는 백승무부터 찾았다.

“아. 사형. 오셨습니까.”

“사제. 나가서 밥 먹자.”

“……옷 갈아입고 방립 쓰기가 귀찮아서 저를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무슨 그런 말을. 매일 무공수련에 정진하는 사제가 기특해서 그러지.”

백승무는 정광을 알기에 전혀 믿지 않았다.

“하아. 말씀만 감사히 받지요. 어차피 지금은 안 됩니다.”

“왜?”

“남궁세가에서 연회를 열었습니다. 어르신들과 사형들도 모두 가볼 채비를 하고 계시고요.”

“연회? 왜 미리 말 안 했어?”

“사형은 악가의 처소에서 수련 중이셨잖습니까. 어르신들께서 방해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흠. 상관없는데.”

“그래도 아니지요. 팽가에서도 손님이 오셨으나 사정을 설명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아. 그건 잘했네.”

백승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데 정광이 또 물었다.

“연회는 어떨 것 같아?”

“한참 화제입니다. 갑자기 여는 것도 그렇지만 남궁세가에서 돈을 쏟아붓고 있다더군요.”

“흐음.”

정광이 알기로 남궁세가는 안휘성(安徽省)의 패자, 제법 사는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여는 잔치라면 제법 먹을 만한 것이 많을 게 분명했다.

“가보자 그럼.”

정광은 운학을 비롯한 도사들에게 돌아왔다고 인사를 했다.

“……이번에도 이틀 만에 끝낸 것이냐?”

“네.”

“……허허. 그래. 수고했다. 가보자꾸나.”

운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앞장섰다. 그 뒤를 곤륜 제자들이 따랐다.

연회는 무림맹에서 제일 넓은 공간인 대연무장에서 열렸다.

그곳에 도착한 곤륜 도사들은 눈을 크게 떴다.

그 넓은 공간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수많은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산해진미가 수없이 깔려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었다.

“허어. 남궁세가가 신경을 많이 썼군.”

운학이 감탄하자 허청도 혀를 내둘렀다.

“갑자기 준비했다던데 이 정도라니 대단하군요.”

남궁세가의 무인 한 명이 다가와 곤륜 도사들을 안내했다.

각 문파나 가문마다 배정된 자리가 있었는데, 곤륜파는 구파일방에 속한 문파답게 꽤 넓은 자리가 배정되어 있었다.

곤륜 도사들은 탁자 위에 놓인 요리들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오오. 대단하군!”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다!”

정광은 아니었다.

‘풀밖에 없잖아! 이거 혹시?’

다른 문파와 가문이 있는 곳을 둘러봤다.

탁자가 부러지도록 고기와 술이 놓여 있는 것 아닌가!

정광은 분노했다.

‘남궁 놈들, 속인(俗人)인 주제에 이렇게 융통성이 없을 수 있나.’

도사라고 풀만 먹어야 하는가?

허구한 날 창궁무애(蒼穹無涯), 의기천추(義氣千秋) 같은 헛소리나 지껄이는 놈들이다 보니 머리가 굳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냥 확 가버려?’

운학과 허청이 잔소리할 게 뻔하니 그럴 수도 없고.

‘맛만 보고 나가서 먹어야겠다.’

마음을 정리하고 젓가락을 들려는데.

꽤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누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기운을 드러내는 거야?’

고개를 돌려보니 날카로운 검 같은 기세를 발하는 중늙은이가 대연무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딱 봐도 속이 시커먼 놈이네.’

그때, 누군가가 큰 소리로 중늙은이를 소개했다.

“이번 연회를 주최하신 남궁세가의 가주, 창천일검(蒼天一劍) 남궁화인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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