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상극
“제자야! 어딜 가는 것이냐!”
“다 배웠잖아요.”
“인지천삼재는 내 깨달음의 일부일 뿐이야! 더 대단한 게 있다니까!”
“진짜요?”
“……아암! 당연하지!”
“별로 내키지 않는데요.”
“원하는 걸 말해봐라! 뭐든지 들어주마!”
“그럼 생각해 볼게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반드시 들어주마.”
“네. 그럼 이만.”
정광은 달라붙는 당기황을 겨우 떼어낸 뒤 식당으로 향했다.
‘흐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지천삼재가 다일 것 같은데.’
남은 것이 별것 아니라 해도, 그걸 배우는 대신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괜찮은 거래일 것이다.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느새 식당에 도착한 정광은 주방에 몰래 스며들었다.
매의 눈으로 내부를 살펴보던 그는 나직이 탄식했다.
‘텄구나.’
너무 일찍 온 걸까.
수많은 숙수가 구슬땀을 흘리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들 모르게 훔치는 거야 일도 아니었지만, 그럴 마음 자체가 들지 않았다.
자고로 개도 먹을 땐 안 건드리는 법인데, 숙수가 요리할 때 훔치면 그게 어디 사람이겠는가.
‘어떡하지?’
주린 배를 잡고 고민하던 정광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무림맹 밖으로 나가면 되지.’
주방을 벗어난 정광은 정문으로 향하다가 멈칫했다.
‘밖에서 고기를 먹으려면 도복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뿐이랴. 방립도 써야 한다.
배 좀 채우려는 것일 뿐인데 귀찮은 일이 한가득이다.
‘그냥 풀이나 씹어?’
오랜만에 도사다운 생각을 하던 정광이 눈을 빛냈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 아니, 두 거지를 봐서였다.
그중 크고 멋진 거지 유정풍이 어색한 얼굴로 인사했다.
“하하. 아우. 잘 있었나?”
“그냥 그렇죠. 무슨 일이세요?”
“으음. 사부께서 자네를 만나보고 싶다 하셔서 모셔왔네.”
“어? 정 소협이 후개니까 사부 되시는 분은 방주?”
“그렇네. 강호에서는 비천의개(飛天義丐)라 불리시지.”
정광은 감탄했다.
하늘을 나는 의로운 거지!
이 얼마나 멋스러우면서도 없어 보이는 별호란 말인가!
조용히 있던 작고 더러운 중늙은이 거지가 입을 열었다.
듣기만 해도 깐깐한 성품이 짐작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반갑다. 나는 양회라고 한다.”
“안녕하세요.”
“흐음. 소문보다 예의가 바르군.”
“네.”
“……소문이 맞는 부분도 있고.”
“근데 무슨 일이세요?”
양회는 턱을 긁다가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너는 내 사부의 심득을 잇고 싶은 게냐?”
“사부? 아. 입 걸은 분. 아뇨.”
양회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진심이냐?”
“네.”
“……왜?”
원하는 답을 받았으니 그냥 되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이유를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십존의 깨달음을 거부하는 이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긴 이유 때문에 물었지만 정광의 대답은 간결했다.
“필요 없어서요.”
“……!”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되죠?”
“……말해봐라.”
“근처에 맛있는 거 파는 데가 있나요? 독방이나 후원 있는 곳으로요.”
좋은 요리를 파는 곳을 찾으려면 거지에게 물으란 말이 있다.
이는 거지들이 반점, 객잔, 주루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구걸하러 다녀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요리의 맛뿐만 아니라 위생상태, 재료의 신선함, 숙수와 점소이의 성품과 인심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하물며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은 개방의 총타(總舵)가 있는 곳. 한마디로 앞마당과 마찬가지였다.
양회의 머릿속에 괜찮은 곳들의 이름이 주르륵 떠올랐다.
“흠. 네가 말한 조건대로라면…… 일미반점(一味飯店), 연화객잔(蓮花客棧), 만향루(萬香樓), 뭐 그 정도가 괜찮지.”
“연화객잔은 묵어봤고, 만향루는 아직 문 안 열었을 거고. 일미반점 가야겠네.”
혼잣말한 정광이 또 물었다.
“혹시 배고프세요?”
양회는 거지였다.
그것도 거지 중의 거지,
거지들의 왕, 개방 방주!
“거지는 항상 배고프지.”
“역시 딱이네. 가시죠.”
“어딜?”
“일미반점요.”
당장 걸존에게 달려가 정광이 거절했으니 포기하라고 말하는 게 순리이건만.
거지에겐 사주는 음식을 마다치 않는 게 진짜 순리였다.
“좋다. 가자.”
* * *
일미반점은 큰 반점이 아니었다.
그래도 명성이 대단했는데, 이는 맛있는 요리와 점소이들의 훌륭한 접객 태도 덕분이었다.
거지가 둘이나 왔는데도 그럴 정도로.
“어서 오십시오, 일미반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점소이가 공손히 인사하자 정광은 은자부터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독방으로 해주세요.”
“소신선께서 세속에 들려주셨군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나 소신선 아닌데요?”
“소인 눈엔 그렇게 보이십니다.”
훌륭한 접객 태도가 더 훌륭해졌다.
소신선과 두 거지는 아늑한 독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방주님. 여기 뭐 맛있어요? 아니다. 그냥 원하시는 거 다 시키세요.”
“정말 네가 다 사는 것이냐?”
“물론이죠.
“남아일언(男兒一言)?”
“중천금(重千金)요.”
양회는 평소의 카랑카랑한 것이 아닌, 다소 신이 난 듯한 목소리로 수많은 요리를 읊었다.
유정풍도 거들었다.
“아우. 술이 없으면 요리들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그렇게 하세요.”
“역시 아우는 협의가 있다니까!”
길었던 주문이 끝나자 점소이가 나갔다.
세 사람은 더는 할 말이 없어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이 쓸데없는 긴장감을 무너뜨리고자 유정풍이 나섰다.
“아우. 독존께서 심득을 전수해 주시고 있다 들었네. 대단한 기연이야. 축하하네.”
“기연요?”
“당연하지. 당금 무림에 누가 그런 기연을 또 얻었는가?”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가?”
“하하. 쑥스러운가 보군. 이해하네. 그래, 힘에 부치진 않고?”
“끝났는데요.”
“……지금 뭐라 그랬나?”
“다 배웠다고요.”
유정풍이 눈을 크게 떴다.
양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독존의 심득을 겨우 이틀 만에 깨우쳤단다.
누가 그걸 믿겠는가?
맛있는 요리를 먹게 되어 기분이 좋아졌던 양회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허풍이 심한 놈일 줄은 몰랐군. 사부는 왜 이런 녀석을 탐내는 거지?’
듣던 대로 무공은 강할 것이다.
대단한 자질을 갖고 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살기까지 지녔다 한다.
하지만…….
허풍이 센 놈치고 대성하는 놈은 없다. 능력 밖의 일을 떠들어대는 건 절대 도달하지 못할 걸 알기에 입으로나마 그러는 것이니까.
‘사부가 노망이 났나 보군. 아니, 이미 나 있었지.’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건 기본이요, 협행을 한답시고 쓸데없는 일에 방의 제자들을 동원하여 골병이 들 게 하는 건 다반사다.
개방이 아무리 의(義)를 숭상한다 해도 이러다간 남아날 제자가 없을 판국이었다.
태상방주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진 그를 방의 제자들이 대놓고 피해 다니는 것도 당연했다.
걸존을 떠올린 양회가 눈살을 찌푸리자 유정풍이 전음을 보냈다.
-사부. 아우가 거짓을 말한 건 아닐 겁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조금 예의가 없다 하나 흰소리를 하는 녀석은 아닙니다. 천천히 들어보시지요.
-흐음.
양회가 무언으로 승낙하자 유정풍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아우. 내 자네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너무 놀라운 일이군. 자세히 들려줄 수 있겠나?”
그때, 점소이가 술과 요리를 가지고 들어와 탁자 위에 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고마워요.”
점소이가 나가자 유정풍이 한 번 더 청했다.
“어서 말해보게. 궁금하단 말일세.”
“으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뭔가?”
“이거 비밀 지켜야 하는 거거든요. 유 소협 사부님, 입 무거운 분이세요?”
“……!”
당사자를 앞에 앉혀두고 그 제자에게 입이 무겁냐 묻다니.
양회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유정풍이 다급하게 나섰다.
“물론이지. 비천의개 아니신가.”
“정말 무거우면 못 나는데.”
“……몸만 가벼우실 뿐, 입은 태산보다 무거우시다네.”
정광의 시선이 양회에게 향했다.
“방주님. 믿어도 될까요?”
양회는 타구봉으로 정광을 두들겨 패려다 간신히 참았다.
정말 중요한 얘기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누구에게도 말 안 할 테니 말해봐라.”
“남아일언?”
“후우우…… 중천금.”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광이 빙긋 웃었다.
“그럼 드시죠.”
“……뭐?”
정광은 요리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세심한 점소이가 도사인 정광 앞에 깔아놓은 풀 쪼가리가 아니었다.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 요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수작인가 싶어 지켜보던 양회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조했거늘, 왜 말을 안 하느냐?”
“이게 비밀인데요.”
“……?”
정광은 술도 한 잔 따라 마셨다.
“제가 고기 먹고 술 마시는 거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
양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겨우 이따위 걸 가지고!’
한창 화제인 정광이었기에 대단한 비밀인 줄 알았건만 고작 육식과 음주?
유정풍조차 어이가 없어 물었다.
“아우. 나와 처음 만났을 때는 서슴없이 먹고 마시더니 오늘은 왜 그러는가?”
“방주님은 연세가 있으셔서 꽉 막혀…… 보수적이실 것 같아서요.”
“…….”
유정풍은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 양회를 봤다.
볼살을 푸들거리는 게 보통 화난 모습이 아니었다.
-사부님. 아우가 좀 예의 없는 편이지만 악의는 없…….
-악의 있게 지껄였으면 나는 벌써 피를 토하고 죽었겠구나!
양회는 정말 열이 뻗친 상태였다.
개방의 방주인 그를 누가 이딴 식으로 대했겠는가?
‘내 살다 살다 이따위 망종을 보게 될 줄이야. 어찌 이런 놈이 곤륜 같은 명문정파에…… 응? 잠깐.’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니야. 있지. 있어!’
그는 사부인 걸존을 떠올렸다.
‘망나니 꼬마와 노망난 노친네라.’
망나니 꼬마는 노망난 노친네의 깨달음에 관심이 없다 했다.
노망난 노친네는 망나니 꼬마에게 깨달음을 전해주고 싶어 했다.
‘둘을 붙여 버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버릇없이 대드는 꼬마와 열이 뻗쳐 부들거리는 노친네가 보인 것이다!
세상에 이런 상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사부는 고집을 꺾지 않을 거다. 방주의 권위로 누르면 다른 사고를 칠 게 뻔해.’
그럴 바엔 아예 생색내면서 그러라 해버리는 거다.
‘저 꼬마가 독존 얘기를 했던 것처럼 사부의 깨달음을 이틀 만에 깨쳤다고 떠벌리고 다니면…….’
울화통에 몸져누울지도 모르는 일.
한동안이라도 개방과 양회의 마음은 평안해지리라.
‘둘 다 고생 좀 해봐라.’
양회는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으음. 맛있군. 정풍아. 너도 어서 먹거라.”
“아, 알겠습니다.”
두 거지는 허겁지겁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정광은 그런 양회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이것 봐라. 무슨 꿍꿍이가 있군.’
아까의 눈빛이나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정광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게 분명했다.
‘걸존과 관계된 것일 텐데. 뭐지?’
정광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떤가. 시비를 걸어오면 박살 내주면 되지.
‘잠깐. 저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양회를 바라보던 정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주님! 소매에서 개털 떨어져요! 요리에 다 묻겠네.”
“뭐, 뭐?”
“타구봉법으로 때려잡으셨죠? 그거 개 잡기 딱이던데.”
* * *
배를 잔뜩 채운 정광은 좋은 기분으로 곤륜파의 숙소에 도착했다.
사제 백승무가 반가운 게 아니라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사형. 어디 다녀오시는 겁니까?”
“당가 숙소에 있다 왔는데. 왜?”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당가 숙소에 가셨었다는데 사형께선 이미 떠난 상태였다고 하셔서요.”
이런 눈치 없는 손님을 봤나.
쓸데없는 얘기를 왜 해?
그래도 캐묻지 않는 걸 보면 어디 구경이나 하다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누군데?”
백승무가 답하기 전에 허청의 방문이 열렸다.
“정광아. 이리 오거라.”
“네. 사부.”
방에 들어가자 허청과 호리호리한 체격의 중년인이 있었다.
옆에 장창을 세 개나 내려놓은 걸 보니 산동악가 사람인 게 분명했다.
“인사드려라. 산동악가의 쾌심섬창(快心閃槍) 악 대협이시다.”
“안녕하세요.”
“대협은 무슨. 악형익이라고 하네. 진옥룡을 만나 영광일세. 하하하.”
별호처럼 무척 유쾌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연화객잔에 묵을 때 한 번 찾아와서 사부와 식사했던 사람이구나.’
얘기는 안 나눴었지만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이 양반은 창존 때문에 온 건가?’
아니나 다를까.
악형익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솔직히 말하지. 백부께서 하도 닦달을 하셔서 진옥룡 자네를 보러 왔네.”
“창존 그분요?”
“그렇네. 자네에게 당신의 깨달음을 전해주겠다고 떼를 쓰고 계셔. 원래는 자네에게 거절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지.”
“지금은 아니신가 봐요?”
악형익이 씩 웃었다.
“더 좋은 길이 떠올랐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