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호칭이 좀 그렇네요
위험한 수련이었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머뭇거리다 나중에서야 제대로 대응했던 허직이나 허윤과는 달리, 다른 도사들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몸부림쳤다.
그리고 하나둘 쓰러져 갔다.
“끝났나?”
정광은 검을 갈무리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다치거나 내상을 당한 곤륜 도사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하고 있었다.
“아. 사제.”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구석에 서 있던 백승무가 경기를 일으켰다.
“네? 네?”
“왜 사제는 멀쩡해?”
“제, 제 무공이 너무 약해서 상대할 만한 분이 없어서…….”
“이런. 외로웠겠네. 이리와. 상대해 줄게.”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사형을 상대합니까!”
“걱정하지 마. 딱 맞춰줄 테니까.”
정광은 약속을 지켰다.
딱 백승무의 내공과 초식 운용으로 상대한 것이다.
하지만 정광의 살기를 햇병아리 무인이 견뎌낼 수는 없는 노릇.
그래도 모친인 허여민의 담대함을 물려받은 백승무였기에 나름 저항했지만, 얼마 안 가 장렬히 쓰러졌다.
“이제 치료해야겠네.”
정광이 중얼거리자 운학을 비롯한 운 자 배들이 파리한 얼굴로 일어섰다.
“침을 좀 놔주겠느냐? 어깨가 많이 결리는구나.”
“나는 속이 너무 허하다. 몸을 보하는 단약이 있으면 좀 주거라.”
나이가 있는 만큼 무공도 높기에 빨리 일어설 수 있었고, 역시 나이가 있기에 자신의 몸을 챙길 줄 아는 운 자 배였다.
“잠시만요.”
정광은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부릅뜬 눈으로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많이도 오셨네. 가주님, 부탁 하나 드려도 돼요?”
사람들의 선두에 서 있던 당영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게.”
“금창약이랑 내상약 좀 주실 수 있으세요? 잘 드는 놈들로요.”
“…….”
생각지도 못한 부탁이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영중은 정광을 재평가했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 놈이었군.’
평생 경험해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살기 아니었던가.
살기는 무공은 물론 정신력과 의지가 높을수록 강해진다.
‘무엇보다 타고나는 게 크지.’
그런 엄청난 살기를 약관도 안 된 청년이 발했다?
게다가 그걸 순식간에 가라앉히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약을 요구할 만큼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얼마나 더 위험하게 커버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품어야 해.’
당영중은 마음을 정했다.
“약이라. 얼마나 필요한가?”
“많이요.”
“그렇게 하지. 그런데 그냥 주기는 좀 뭐하군.”
정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좀 싸게 해주세요. 아. 사제! 흥정해야 하거든! 빨리 와봐!”
백승무는 누운 채로 푸들거리기만 할 뿐 일어설 생각조차 못 했다.
정광이 가서 데려오려 하는데 당영중이 제지했다.
“돈을 말하는 게 아니네. 나도 부탁 하나 함세.”
“뭔데요?”
“일단 치료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이럴 게 아니라 다 같이 본가의 처소로 가세나.”
* * *
특별히 심한 상처를 입은 이는 없었기에 곤륜 도사들은 모두 당가의 처소로 향했다.
그 뒤를 구경꾼들이 따랐는데 정광을 흘깃거리며 수군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정광은 인상을 찡그렸다.
‘살성(殺星)? 괴물? 마귀? 내가?’
환생한 뒤로 얼마나 정파답게 살고 있는데 무슨.
아니, 성격 나쁜 놈들만 모인 천마신교에도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 정파에선 사람 몇 명만 죽여도 살성이라 부른댔지.’
천마신교에는 그런 놈들이 차고 넘쳤기에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허구한 날 덤벼드는 그놈들을 때려죽이며 살았던 정광은?
살성 중의 살성, 천살성(天殺星)이라 불려야 마땅하리라.
‘그러고 보니 전생에 어렸을 때 그렇게 부르는 놈들도 있었네.’
정광이 얼굴을 찌푸리는데 허청이 다가와 위로했다.
“신경 쓰지 말거라.”
“네?”
“진짜 너를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렇긴 했다.
진짜 알았다면 살성이 뭔가.
천살성을 넘어 진천마라 불렀겠지.
정광이 피식 웃자 허청이 진지한 목소리로 다독였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넌 따뜻한 아이야.”
사부. 그건 좀.
“……물론 좀 거칠긴 하다만.”
음. 그나마 좀 가까워졌군.
정광이 고개를 끄덕이자 허청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의 말은 흘려들어라. 알겠느냐?”
주위에서 걷던 곤륜 도사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앞으로는 좀 살살 하는 게 어떻겠느냐?”
정광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건 안 되죠. 그런 식으로 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상대를 살리기도 쉬워지는데요.”
맞는 말이긴 한데.
훈훈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곤륜 도사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당영중은 정광이 곤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재밌는 관계군.’
운 자 배와 허 자 배 도사들이 정광을 아끼는 건 명확했다.
헌데 까마득하게 아래인 정광에게 꽉 잡혀 사는 듯한 모습 아닌가.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구나. 시간을 두고 조금씩 알아봐야겠어.’
당영중은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당가 무인들에게 명했다.
“진인들과 도장들께서 다치셨다. 약을 아끼지 말고 치료해 드려라.”
“네. 가주님.”
당오군과 당예지를 포함한 당가 무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숙련된 솜씨로 곤륜 도사들을 치료해 나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당영중은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제 내 부탁을 말해도 되겠나?
-네. 말씀하세요.
-자네, 환속하게나. 무공을 폐하지 않고 환속했으면 좋겠군.
정광은 어이가 없어 입을 살짝 벌렸다.
‘무공을 폐하지 않고 환속시키는 이해심 깊은 문파가 어디 있어?’
사문의 무공을 회수한답시고 단전을 폐하는 건 기본이요, 사지 근맥을 자르는 건 선택이거늘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아니. 그건 그거고.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환속해서 당 소저와 혼인하라고요? 당 소저가 싫다고 할 거라 하시지 않았었나요?
-내 한번 설득해 봄세.
뭐?
설득해 봄세?
나는 언제 좋다고 했어?
정광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당영중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무리였나 보군.
-많이 무리였는데요.
-할 수 없지. 가세나.
당영중은 정광을 이끌고 처소 외곽에 있는 독채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황당한 표정의 당기황이 있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정광이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저기요, 가주님. 여기 왜 데려오신 거예요?”
“일단 앉지. 아버님도 앉으십시오.”
모두 자리에 앉자 당영중이 정광에게 청했다.
“아버님의 깨달음을 자네가 받아서 이어주게.”
“네?”
“무어라?”
당영중은 눈을 부릅뜨는 아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정광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내 부탁일세. 되겠는가?”
“이거 좀 이상하네. 뭐 더 있죠?”
“별것 아니네. 자네가 아버님의 깨달음을 이었다는 걸 강호동도들에게 알릴 걸세.”
“흐으음.”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가 독존의 심득(心得)을 얻었다는 걸 굳이 천하에 알리려 한다?
왜?
‘당 가주는 독존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 독존을 위한 건 아닐 테고. 당가를 위한 것이겠네.’
생각해 보니 능력을 많이 보이긴 했다. 죽이긴 곤란하니 단단한 끈을 이으려는 것이리라.
‘사승 관계는 아니더라도 깨달음을 주고받은 관계라면 특별하긴 하지.’
무인에게 무공이란 그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다. 그것을 주고받는다는 건 보통 밀접한 관계가 아니란 얘기였다.
“가주님. 자제분들을 위해 그러시는 거예요?”
“부정하지 않겠네.”
“당오군 소협도 그렇고 당예지 소저도 그렇고. 또래 중엔 발군이던데 그럴 필요 있나요?”
당영중의 얼굴에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떠올랐다.
“나는 적을 많이 만드시는 아버님 덕분에 많은 고생을 해왔네. 그래서 내 자식들에겐 강한 적이 아니라 강한 친우를 만들어주려는 걸세.”
“아아. 이해했어요.”
“어떤가? 승낙하겠는가?”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태상가주님이 깨달으셨다는 거요. 가주님은 받을 생각 없으세요?”
“전혀.”
“왜요?”
“나는 지금껏 스스로 깨달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네.”
낮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
그 속에 담긴 굳은 의지와 자신감!
정광은 슬며시 두 팔을 긁었다.
‘나무토막 같은 얼굴로 잘도 그런 말을 하네.’
이거 혹시 얼굴만 이렇지 그런 류 아니야?
살짝 의심하는데 당영중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갑자기 좀 간지러워서요.”
“그렇군. 자네의 대답은?”
“으음. 배우는 거야 그렇다 쳐도 잔소리 많은 건 질색인데.”
떨떠름한 얼굴로 듣고 있던 당기황이 다급히 나섰다.
“나는 원래 과묵한 사람이란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더 싫은데요.”
“……잔소리 안 하도록 노력하마.”
“근데 그 깨달음이라는 거. 재밌는 거예요?”
당기황의 눈이 자랑스럽게 반짝였다.
“당연하지! 아주 재밌을 거다!”
정광은 마음이 움직였다.
‘이렇게 자신하는 걸 보면 제법 괜찮은 건가 본데.’
그렇다면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 뭐라도 조금 더 받아내야지.’
정광은 시선을 당영중에게 돌렸다.
“앞으로 당가에서 본문 제자들은 무상치료해주는 거로 하죠.”
“맹 내에서는 그렇게 하세.”
“밖에서도 해주셔야죠. 강호에서 만나봐야 얼마나 만난다고. 본문이 있는 청해성에서 당가가 있는 사천성까지 몇 번이나 가겠어요.”
“어떡하길 원하는가?”
“차라리 당가의 의원들을 본문으로 보내서 의술을 펼치게 해주세요.”
“흐으음. 네 명이 오 년일세. 대신 곤륜산맥의 약초와 독초를 채집하는 걸 허락해 주게.”
“그럼 차라리…… 어라? 얘기가 이렇게 되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데요. 사숙조님과 사부님께 여쭤봐야 해요.”
“그럼 가세나. 어차피 아버님이 자네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나.”
“그러고 보니 허락해 주시려나.”
걱정과 달리 운학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문만이 품기엔 너는 너무 크다. 많은 걸 배워서 그 속을 채우거라.”
허청은 조금 달랐다.
-내 사랑스러운 제자야. 훌륭한 분께 배우게 된 걸 축하한다. 다만 네 사부는 나뿐이라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물론이죠. 근데 왜 전음으로 말씀하세요?
-흠. 흠. 독존께서는 성품이 좀 그렇지 않느냐?
정광은 바로 납득했다.
그 후, 당가의 의원이 곤륜에 상주하는 얘기가 나오자 운학을 비롯한 곤륜 제자들은 반색했다.
“허허허. 청해성 민초들에게 큰 힘이 되겠구나. 가주, 고맙소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헌데 인원과 기한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치열한 설전이 시작됐다.
곤륜에서는 허청이 나섰는데 진옥룡의 사부답게 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용맹스럽게 맞섰다.
결국, 네 명이 십 년 동안 의술을 펼치고 곤륜은 약초와 독초를 채집하는 데 편의를 봐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자 입도 뻥긋 안 하고 초조해하던 당기황이 신이 나서 외쳤다.
“반갑다 제자야!”
“호칭이 좀 그렇네요.”
“금방 익숙해질 게다! 천하제일의 절기를 알려주마! 어서 가자!”
* * *
소문은 금방 퍼졌다.
조금 과장되게.
‘독존이 진옥룡에게 평생의 심득을 전달하기로 했다!’
‘당가와 곤륜이 십년지약(十年之約)을 맺었다! 두 거대세력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당가와 곤륜의 처소에 몰려가 사실 여부를 물었다.
곤륜은 굳이 숨길 일도 아니었기에 사실대로 말했지만.
당가는 조금 달랐다.
사실보다 많이 과장된 소문을 모호하게 인정한 것이다.
사람들은 곤륜의 말보다 당가의 말을 더 신뢰했고 향후의 무림 정세에 대해 갑론을박을 해댔다.
이런 얘기들을 전해 들은 걸존과 창존이 분기탱천한 건 당연한 일.
그들은 정광이 잠시 머물고 있는 당가의 처소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리고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맞이하는 당기황을 만나게 됐다.
“오오. 자네들 왔는가?”
“……!”
“……!”
평소엔 거지 너 이 새끼, 악가 네 이놈 하며 욕설을 섞어 부르더니 자네들?
걸존과 창존이 입을 떡 벌리자 당기황이 유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왜들 그러는가?”
“……땅꾼아. 뭐 잘못 먹었냐?”
“……원래 정상이 아니었지만 더 그렇군. 무척 걱정되네.”
걸존과 창존이 내공까지 끌어 올리며 도발하는데.
후원 쪽에서 정광의 외침이 들려왔다.
“태상가주님! 이다음은 뭐예요?”
당기황이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걸존과 창존의 귀에 가득 들어가도록 내공을 실어서!
“허어. 녀석. 태상가주라니. 아직도 사부님이란 말이 익숙하지 않은가 보군.”
“…….”
“…….”
“아. 자네들 아직 있었나? 만나서 반가웠네. 나는 이만 가야겠어. 제자를 가르쳐야 해서 말이야. 제자 말일세, 제자!”
“…….”
“…….”
“잘들 가게나.”
독존이 사라지고 나서야 걸존은 볼살을 푸들거리며 분노했다.
“제자? 제에에자?”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고 있던 창존이 그 뒤를 이었다.
“이런 모욕은 오랜만이군. 아주 인상적이야.”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악가야. 할 거냐?”
“물론이지. 자네도?”
두 사람을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중에 보자.”
“그러세. 이곳에서.”
그리고 잠시 뒤.
개방과 산동악가의 처소가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