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7화 (57/569)

57화

살기

백승무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도망가 버렸다.

평상시에는 죽어라 해도 제대로 안 되던 비룡축전(飛龍逐電)을 펼쳐서.

‘이 녀석 봐라?’

정광은 살짝 놀랐다.

번개를 쫓는 걸 넘어, 추월해 버릴 기세로 달리는 모습이라니.

‘실전 체질이었구나.’

계속 실전에 내던져서 가르치면?

최소한 어디 가서 맞아 죽을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정광은 내심 혀를 찼다.

‘내가 정파 물이 너무 들었구나.’

곤륜에서 환생해 근 이십 년을 도사로 살아온 탓일까.

전생과 비교과 안 될 정도로 물러진 정광이었다.

자고로 무공이란 생사를 오가는 위기 속에서 꽃을 피우기 마련.

실전만큼 효율적인 수련은 없건만,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원.

지금이라도 백승무를 비롯한 곤륜 도사들의 수련 방식을 새롭게 짜야 했다.

‘뭐가 있더라…….’

천마신교에서 보고 겪었던 수많은 효율적인 방법들이 떠올랐다.

그중 제일 확실한 건…….

‘매주 생사대전(生死對戰)을 열자.’

죽기 싫어서라도 미친 듯이 수련할 수밖에 없으리라.

‘잠깐. 매주?’

조금 빡빡할지도.

역시 적응 기간을 줘야 할 터.

대충 그림이 나왔다.

‘매달 한 번씩 열다가 서서히 자주 여는 쪽으로 가면 되겠네.’

진짜 죽고 죽이는 싸움판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최소한 그런 긴장감 속에서 수련하는 토양을 마련해 주려는 것이었다.

‘약이 꽤 많이 필요하겠는데. 아. 당가가 있지.’

직접 만들었던 금창약과 내상약은 진짜 생사가 오갈 때 써야 할 것들이다.

수련 중에 당하는 부상 정도야 당가의 것이면 치료하기 충분할 터.

‘먼저 당 가주를 만나야…… 음?’

생각을 정리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광을 본 적 있는 이는 감탄을, 처음 보는 이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담벼락에 매달려서 뭐 하세요?”

“…….”

“다른 문파의 거처를 엿보면 안 되죠. 실례잖아요.”

“……!”

사람들의 얼굴이 벌게졌다.

백승무의 황당한 외침 때문에 들여다본 것이었다곤 하나, 확실히 무례한 행동 아닌가.

정광이 한마디 더 했다.

“싸움 다시 하셔야죠. 구경도 하시고. 그럼 수고하세요.”

사람들은 숙소로 사라지는 정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의 승부 때문에 잔뜩 초췌해진 걸존과 창존이 보였다.

두 절대고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 * *

무림맹이 놀라운 소문으로 들썩였다.

‘걸존과 창존이 싸웠다!’

직접 구경한 이들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놀라운 승부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으니.

신진 고수의 출현이었다.

‘곤륜파에 옥룡이 있다!’

그냥 옥룡도 아니고 진옥룡이란다.

정광이라는 도호의 청년 도사로 눈부시게 잘생긴 얼굴이라 했다.

“권봉 언의진이 대놓고 호감을 드러낼 정도라더군.”

그녀가 질색하며 절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권봉을 연모하던 수많은 청년이 도전했는데, 하나도 남김없이 침상에 드러눕게 됐다지 아마?”

여기까지면 대단한 청년 고수가 등장했구나, 하고 끝나련만.

“독봉 당예지가 평생을 연구해 온 독을 날름 삼킨 것 아는가? 독에도 조예가 깊다고!”

독봉이 정광을 지음이라 칭했고 이를 질투한 검룡이 도전했다가 똥싸개가 되어버렸다는 얘기가 그 뒤를 이었다.

“허어. 그런 대단한 청년 고수가 있다니. 못 믿겠구먼.”

“그런데 걸존 어르신과 창존 어르신은 왜 곤륜파 숙소 앞에서 싸우신 거야?”

“잠깐. 이거 얘기가 좀 맞춰지는 것 같은데…….”

그리고 퍼진 소문이 있었으니.

“두 분이 노망이 들었다더군!’

“주책맞게 권봉과 독봉을 연모하다가 진옥룡에게 시비를 걸러 간 것이라네!”

“서로 먼저 손을 보겠다고 다투다가 싸우게 된 것이로구나!”

대부분의 사람은 믿지 않았지만 재밌는 안줏거리였다.

소문은 목격자의 증언이 모이며 점차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그래서 나온 결론은 이랬다.

‘걸존과 창존이 곤륜의 진옥룡에게 깨달음을 전하려다 다툰 것이다!’

‘독존이 진옥룡을 암습했던 것도 사실 시험을 해본 것이었다!’

‘십존 중 셋이 진옥룡을 탐내고 있다!’

소문은 눈부신 속도로 퍼졌다.

숙소에 연금되어 있던 독존 당기황의 귀에도 들어갈 정도로.

“이런 미친 새끼들을 봤나!”

콰아앙!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값비싼 탁자가 산산조각이 나서 비산했다.

“감히 이렇게 나와?”

소맷바람으로 그 파편을 밀어낸 당영중이 무심한 어조로 지적했다.

“이 탁자는 본가의 것이 아니라 무림맹의 재산입니다.”

“……내 돈으로 갚으면 되잖아!”

“그러시지요.”

“이이익!”

아들을 노려보던 당기황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씩씩거렸다.

“빌어먹을 거지새끼! 음흉한 악가 놈! 감히 내 제자를 뺏으려 해?”

“진옥룡이 왜 아버님의 제자입니까?”

“내가 먼저 찍었잖아!”

“당사자는 별로 마음이 없어 보였습니다만.”

“그래도 내가 그놈들보단 낫지!”

“흐음. 글쎄요.”

“……아들. 지금 뭐라 했냐?”

“가주입니다.”

“……가주. 지금 뭐라 했냐?”

당영중은 그의 아비 당기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솔직히 두 분과 아버님의 경지는 큰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거든.”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당기황이 노려보든 말든 당영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려고?”

“가주는 바쁩니다.”

“……흥. 바빠서 좋겠구나. 그보다 좀 나갔다 오마. 정광 녀석을 만나서 빨리 확답을 받아야겠어.”

“안 됩니다.”

“뭐?”

“당분간 조용히 계십시오.”

“조용히 갔다 오마. 그러니까, 응?”

“안 됩니다.”

“……네 말대로 하마!”

당영중이 방문을 열고 나가는데 당기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 선출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

“출마하는 이들이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조금씩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유력하지?”

“아무래도 남궁세가 쪽이지요.”

“신중히 생각하거라. 사사로운 마음으로 정해선 안 돼.”

당영중은 서서히 몸을 돌려 아비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 가문의 일에 관심을 가지십니까?”

“원래 있었어!”

“지난 수십 년간 그랬듯, 제가 판단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 저!”

당영중은 문을 닫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머릿속은 꽤 복잡했다.

‘걸존과 창존까지 그 녀석을 탐내는구나. 이러다 십존 전원이 달려들지도 모르겠군.’

많은 사람의 시기를 받게 되리라.

아니, 이미 받고 있을 터.

특히 개방과 산동악가의 사람들은 길길이 날뛰고 있을 게 뻔했다.

사문과 가문의 큰 어른이 후인들을 제쳐두고 다른 이에게 깨달음을 전하려 한다.

누가 그걸 좋아하겠는가?

걸존과 창존의 평소 행실 때문에 거리를 두던 후인들이었지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두 분이 포기할 리는 없을 테고.’

마음먹은 건 반드시 해치우는 사람들이다.

이미 후인들과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곤륜은 어떤 상황일까?’

구경꾼들이 꽤 몰려갔을 터.

현재 무림맹 화제의 중심은 단연 정광이었다.

무림맹주 선출에 관한 얘기가 뒤로 밀릴 정도로.

‘한번 가봐야겠군.’

당영중은 길을 나섰다.

곤륜파의 숙소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도착한 당영중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렇게 많아?’

하급 무사부터 명숙까지. 수많은 사람으로 바글바글한 모습이라니.

당영중의 눈이 깊어졌다.

정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훗날의 무림이 보이는 듯했다.

‘역시 연을 만들어야 해.’

허구한 날 적을 만드는 아비 때문에 소가주 때부터 생고생했던 당영중이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까지 그런 고난을 안겨주긴 싫었다.

아니,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정광을 잡아야 했다.

‘일단 얘기를 해봐야겠군.’

사람들을 헤치며 숙소로 들어가려 하는데.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다 어디 간 거야?”

“그러게 말일세.”

“설마 맹 밖으로 나간 건 아닐 테지?”

“난들 알겠는가.”

당영중은 발걸음을 멈췄다.

얘기를 들어보자니 곤륜 제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것 같은데.

그럼 대체 어디에?

‘……!’

순간 무림맹에서 느껴져선 안 되는 기운이 느껴졌다.

놀랄 정도로 강렬한 살기였다.

‘감히 어떤 자가!’

그는 살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뒤늦게 그것을 느낀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연무장이었다.

‘대체 누가?’

의문에 답해주듯 담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제대로 갈게요!”

맑고 영롱한 목소리.

정광의 것이었다.

‘뭐 하는 거지? 대련인가?’

그런데 이런 살기라니.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당영중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조는 평온했으나 거기에 실린 살기는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힘 조절이 좀 안 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 * *

정광은 운학을 채근해서 곤륜 제자들을 연무장으로 끌고 왔다.

“오늘부터는 좀 다르게 할게요.”

“…….”

“어? 어떻게 할지 안 궁금하세요?”

도사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 미리 알아봐야 속만 타는 경험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자. 일대일 대련입니다. 적당한 상대와 마주 서세요.”

도사들은 금세 짝을 이뤄 섰다. 서로 간의 경지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막힘이 없었다.

“이제 실전처럼 상대를 죽이겠다는 각오로 치는 겁니다. 시작!”

“……뭐?”

“……죽일 각오?”

놀라는 도사들에게 정광이 손을 내저었다.

“아. 진짜 죽이진 마시고요. 동문끼리 그래서 되겠어요?”

“…….”

그거야 당연하긴 한데.

대체 뭘 어쩌란 건지.

정광이 답을 들려줬다.

“적을 죽일 각오로 싸우되 죽일 지경이 되면 냉정하게 선택을 하는 거죠. 뭐 제대로 된 살기와 맞서는 경험도 하고요.”

살기를 담아야 제대로 싸울 수 있다.

살기를 제때 죽여야 상대를 살릴 수 있다.

살기를 경험해 봐야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있다.

정광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일리가 있군.”

“오히려 꼭 필요한 수련입니다.”

운학을 비롯한 도사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그걸 제시한 이가 정광이라는 것이었다.

도사들의 의구심에 가득 찬 시선을 받은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눈빛들이 왜 그래요. 언제 제 얘기 들어서 손해 본 적 있으세요?”

있다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도사들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무공에 있어서만큼은 아니지.’

‘이번에도 믿고 따라야겠구나.’

도사들은 상대에게 예를 취한 뒤 병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의 평생을 함께해 온 사형제들에게 살기를 발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조금 더 강하게 찌르고 베는 게 전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지켜보던 정광이 검을 뽑았다.

“역시 안 되네. 그럼 갑니다.”

뭘?

정광의 몸이 사라지더니 잔상이 나타났다.

검을 휘두르며.

“어억!”

챙!

간신히 막아낸 허직이 노호성을 뱉었다.

“네 이 녀석! 사숙을 죽일 셈이냐!”

“설마요.”

“헌데 대체 무슨…… 허억!”

허직은 허리를 부러져라 젖혀서 정광의 검을 피해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이…… 이익!”

수십 년간 닦아온 도를 밀어내며 가슴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바로 분노!

“해도 해도 너무 과하구나! 내 오늘 네 버릇을…… 응?”

정광은 허직과 상대하고 있던 허윤을 찔러가고 있었다.

대경실색한 허윤이 재빨리 검을 들어 막았으나 이어지는 일격에 엉덩이를 얻어맞고 말았다.

짜악!

“크흑!”

정광이 검날이 아니라 검면으로 후려갈겼기에 찰진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나는 왜?”

“왜라뇨. 난전인데.”

난전?

그런 말 없었잖아!

정광은 아예 허직과 허윤을 번갈아 공격했다.

그들은 막아내랴 피하랴 정신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가 솟구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살기까진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경지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정광아! 이거나 먹어라!”

“얌전히 먹고 누워!”

그래도 도사라고 죽인다, 죽어라, 이런 말들은 안 뱉었지만 정말로 열이 받은 상태.

그들의 분노에 찬 공세가 정광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정광은.

그들의 뒤로 숨어 다니며 서로가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어억! 사, 사제! 괜찮나?”

“허억! 사형! 소제를 죽일 생각이십니까!”

“내가 그럴 리가 있나? 다 저 녀석 때문에, 어억!”

정광이 요리조리 움직이며 공세를 쏟아내자 셋은 얽히고설켜 돌아가기 시작했다.

허직과 허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다치지 않기 위해, 상대를 해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 것이다.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에서 하면 되려나.’

그간 수많은 수련을 견뎌온 허직과 허윤이었다.

이 정도는 능히 견뎌내고 투지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

뭐. 아니면 치료해 주면 되고.

“갑니다!”

정광은 말과 동시에 살기를 개방했다.

날카로운 살기가 소나기처럼 두 도사에게 꽂혔다.

“크으윽!”

“으아악!”

그들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가, 갑자기 뭐야!’

‘이런 살기라니!’

정광은 곤륜에서 했었던 수련에서도 살기를 담은 공격을 펼치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격이 아예 다르지 않은가!

‘이익! 지지 않겠다!’

‘크윽! 물러서지 않아!’

거역할 수 없는,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싶은 살기였으나 그간 겪어왔던 수련이 그들을 지탱해 줬다.

아니, 일으켜 세웠다.

“무량수불!”

“원시천존이시여!”

그들은 도사다운 외침을 뱉으며 살기를 폭발시켰다.

정광의 막대한 살기와 그들의 어설픈 살기가 부딪혔다.

콰아아앙!

“커헉!”

“크흑!”

두 도사가 비틀거렸으나 정광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제대로 갈게요!”

제대로?

평상시라면 안색이 노래졌겠지만 허직과 허윤의 얼굴은 투지로 불타올랐다.

“힘 조절이 좀 안 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뭐?

“잠까아안!”

“그, 그걸 어떻게 이해…….”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연무장을 넘어 울려 퍼졌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