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출사표(出師表)
걸존과 창존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시끄러워?’
‘……다른 데 가서 싸우라고?’
서로의 눈빛을 보니 제대로 들은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감히 누구한테 그런 말을!’
‘먼저 버릇부터 고쳐야겠구나!’
하지만 당장 그럴 수는 없었다.
둘의 살기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기에 먼저 물리는 쪽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판이었다.
-악가야. 싸울 때가 아니다.
-그런 것 같군.
-살기를 거둬.
-자네가 먼저 하게나.
-이놈이 진짜! 나를 못 믿냐?
-자네라면 자네를 믿겠나?
-이 쫓겨난 영감탱이가!
-외톨이 거지, 방금 뭐라 했는가?
살기를 거두긴 개뿔. 오히려 서로를 향한 살기가 더 짙어졌다.
무려 십존 중 둘이 발하는 살기!
그것을 옆에서 뒤집어쓴 정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지.’
전생에 적들의 살기를 햇볕처럼 쬐며 살았던 정광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다시 쬐니 치열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정광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는데…….
사람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두 절대고수(絶代高手)의 살기가 주변 사람들의 잠을 깨운 것이다.
‘이런. 이러다 고기 못 먹겠다.’
정광은 두 노인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
“……!”
그리고 운룡잠행(雲龍潛行)을 펼쳐서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뒤, 무림맹 식당에 도착한 그는 주방으로 은밀히 스며들었다.
고기를 뜯는데 맛은 뭐 그냥저냥.
‘칠대세가 애들 밥상은 화려했는데.’
새벽에 번(番)을 서는 일반 무인들이 먹는 것이기에 그러리라.
‘그래도 너무 차이 나잖아.’
사실상 무림맹이 구파일방과 칠대세가의 것이라 해도 그 밑을 받치는 건 수많은 군소 문파들이다.
그리고 거기에 속하지도 못할 정도로 한미한 출신이지만, 명성을 높이거나 협을 위해 몰려온 일반 무인들이 무림맹의 잡다한 일을 맡는다.
‘게다가 문사들도 있지.’
그런 그들을 이렇게 대접해서야 어디 제대로 일할 마음이 나겠는가.
뭐, 정광이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배가 차니 잠이 솔솔 오네.’
정광은 입가심으로 술을 한 잔 마신 뒤 주방을 빠져나갔다.
돌아가서 한잠 자고 일어나 백승무나 굴려볼까 하는데…….
‘어라?’
곤륜파 숙소 앞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그 중앙에는 걸존과 십존이 대치하고 있었다.
‘아직도 저러고 있어? 설마 진짜 싸우려나?’
아니었다.
그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십존 중 두 분의 싸움이라. 내 눈이 호강하는구먼.”
“자네만 그렇겠나? 지금 본문의 제자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네. 금방 달려올 게야.”
“그렇지. 언제 또 이런 배움의 기회가 있을까. 나도 사람을 보내서 아이들을 불러와야겠네.”
모이는 사람에 소식을 전하러 가는 사람에 그야말로 난장판인 상황.
걸존과 창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판국에 ‘우리 사실 싸울 생각 없었거든’ 하면서 어찌 물러나겠는가.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느 분이 이기실 것 같나?”
“그래도 창존께 조금 더 점수를 드리고 싶군.”
“소문대로라면 반수 높으시겠지. 그래도 난 걸존께 걸겠네.”
“호오. 어째서?”
“창존께선 창을 쓰시질 않나? 걸존께선 근접전의 달인이시네. 창존께서 애먹으실 것이야.”
“글쎄. 아닐 것 같네만.”
“이 친구가 진짜. 내기하겠나?”
“얼마든지!”
구경꾼들이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자연히 걸존과 창존의 자존심에도 불이 붙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싸우는 건 부담스러운 일. 지는 쪽은 앞으로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을 게 뻔했다.
‘흐음.’
정광은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꼴을 보니 저러다 끝나겠네.’
더 볼 것도 없어서 방에 들어가려 하는데 운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또 언제 나왔느냐?”
돌아보니 운학뿐만 아니라 곤륜 제자들 전부가 나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아까요.”
“헌데 왜 다시 들어가지?”
“대치만 하다 끝날 게 뻔한데 뭐 하러 더 봐요.”
이 말이 주위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 걸리는군.”
“설마 이대로 끝?”
“에이. 두 분 체면이 있지, 그럴 리가 없네.”
“아니. 이거 느낌이 영 싸한데.”
여기저기서 의혹에 찬 목소리와 불신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 정광이 한마디 더 던졌다.
“다들 그만 들어가시죠. 두 분 모두 자신이 없으신 것 같네요.”
뭔 놈의 목소리가 이렇게 티 없이 맑은 데다 잘 들리기까지 하는지.
걸존과 창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빨리 곁눈질로 사람들을 훑는데.
‘망할!’
‘이런!’
대부분의 이들이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 아닌가.
“이해는 가지만 좀 그렇구먼.”
“세월 앞에 장사 있나. 그만 가세.”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걸존은 기합을 지르며 타구봉을 휘둘렀다.
“이야앗! 타구봉법!”
창존도 웅장한 고함과 함께 창을 내질렀다.
“하아압! 백랑창(伯狼槍)!”
수많은 정파 무인들의 정점, 십존!
그들 중 걸존과 창존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싸움이 시작됐다.
* * *
중원은 넓고 무인은 많다.
하지만 고수라 불릴 만한 이들의 숫자는 얼마 안 된다.
그런 고수들에게도 십존은 구름 위의 선인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니 그들의 싸움을 보게 된 무인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정광만 빼고 모두 열광했다!
하지만.
‘거참. 뭐가 보여야 알아먹지.’
‘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이게 현실이었다.
십존이 괜히 십존이겠는가? 엄청나게 빠른 건 기본이니까 십존이지.
그들의 움직임을 알아볼 실력이 없는 자들에겐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알아보거나 제법 많은 걸 느끼는 자도 있었으나…….
넉넉하게 쳐봐야 한 줌이나 될까.
그 한 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만 제대로 못 보나 싶어 주위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내 경지를 가늠하는 건가!’
‘얕잡아 보이면 안 돼!’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감탄을 터뜨렸다.
“허어! 정말 대단하군!”
“내 오늘 크게 개안을 하는구나!”
여기저기서 허세가 작렬했고.
이 허세는 역병처럼 퍼졌다.
얼마 안 가 장내는 걸존과 창존의 무공을 찬양하는 외침으로 가득 찼다.
“과연 걸존이시군! 취팔선보를 펼치시는 것 보게! 환상적이지 않나!”
취팔선보(醉八仙步)는 무슨.
취리건곤보(醉里乾坤步)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펼치고 있던 걸존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역시 창존이시도다! 백랑창이 저렇게 화려한 창법이었다니! 창술의 끝이로구나!”
백랑창(伯狼槍)이 아니라 낭아비격창(狼牙飛擊槍)이건만.
게다가 화려함은 개뿔, 묵직한 일격을 찔러 넣고 있던 창존이 이를 악물었다.
두 절대고수는 같은 심정이었다.
‘저따위 놈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다니!’
‘빨리 끝내고 저놈들도 손을 봐주리라!’
하지만 둘의 실력은 그야말로 난형난제(難兄難弟)!
어느 한쪽도 밀리지 않는 팽팽한 접전이 계속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을 목 놓아 칭송하던 외침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결국엔.
‘뭐가 이리 오래 걸려?’
‘이거 오늘 끝나긴 하는 거야?’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지겨워지기까지 했다.
“하아암.”
하품하며 눈물을 찔끔거리던 정광이 백승무를 잡아끌었다.
“그만 가자.”
“사형. 이런 용호상박(龍虎相搏)의 대결을 두고 어딜 갑니까?”
정광은 황당했다.
‘용호는 무슨. 거지와 덩치지.’
그런데 요놈 봐라?
내 앞에서 허세를 부려?
“사제. 뭐가 보이긴 해?”
“……그렇진 않습니다만.”
“만?”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서…….”
추억?
추어어억?
새파랗게 어린놈이 추억은 무슨!
정광은 백승무의 귀를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으악! 사, 사형! 귀 떨어집니다!”
“제대로 따라와. 그럼 안 아파.”
“아! 그렇군요.”
정광은 백승무를 끌고 곤륜파의 숙소 후원으로 향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무공이나 수련해.”
“……네.”
“표정 봐라. 강해지기 싫어?”
“아닙니다!”
“그럼 시작해.”
“네!”
백승무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걸존과 창존의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 아직도 허세를 부리는 구경꾼들의 외침이 점점 멀어졌다.
‘좋아.’
눈을 뜬 백승무는 검법을 펼쳤다.
소청검(少淸劍).
곤륜파에 입문하면 바로 배우게 되는 기본검법이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초식들이 그의 검에서 풀려 나왔다.
지켜보던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인 허청이 끼고 사는 시간이 늘더니 늘긴 했다.
아주아주 미세하게.
‘이래서야 끝이 없겠는걸.’
백승무가 잠도 줄여가며 무공수련을 하는 건 잘 안다.
모자란 자질을 노력으로 보충하는 게 가상하긴 하다만.
‘그걸로 되면 세상에 고수 아닌 자가 없지. 역시 그걸 가르쳐야 하나.’
자질이 모자란 자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것.
스스로 깨닫길 바랐건만 백승무는 그럴 성격이 못 되었다.
‘알려줘도 못 하면 어쩔 수 없고.’
마침 소청검을 다 풀어낸 백승무가 검을 갈무리한 뒤 물었다.
“사형. 어땠습니까?”
“그럭저럭.”
“아!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야망이 없어. 훌륭하다는 말 정도는 듣고 기뻐해야지.”
“사형이 그런 칭찬을 하실 분은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했다.
‘뭐 그건 그거고.’
정광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로 강해지고 싶은 거지?”
“물론입니다!”
“그러려면 세 가지가 필요해.”
“……혹시 열심히 하고, 잘해야 하며, 운이 좋아야 한다. 이 말씀이십니까?”
“어라? 어떻게 알았어?”
“다른 사형들께 들었습니다. 곤륜의 전설로 남을 거라 하시더군요.”
“뭘 또 전설씩이나. 어쨌든 사제가 운이 좋은 거 알지?”
“……무량수불.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제는 이것들만으론 안 돼. 자질이 너무 떨어지거든.”
“크윽.”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 하나만 더 추가하면 되니까.”
아픈 표정을 짓던 백승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무엇입니까? 제발 알려주십시오!”
“그러고 있잖아. 그런데 확언은 못 해. 사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거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정광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거야, 이거.”
“……?”
“가슴에 달렸다는 말이지.”
“……어떤 말씀이신지…….”
“가슴 몰라?”
고민하던 백승무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협의 기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낯간지럽게 왜 그래.”
“아.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넓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아. 사형은 그런 분이 아니시니 당연히 아니겠군요.”
“그렇긴 한데 어째 기분이 좀 그렇다?”
“기, 기분 탓이실 겁니다.”
“네 기분도 좀 나빠져 볼래?”
백승무는 납작 엎드렸다.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의미입니까? 제발 알려주십시오!”
“취하면 돼.”
“……네?”
“사제 자신한테 취하라고.”
“……네에?”
정광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어서 봐.”
백승무가 황당한 얼굴로 일어서자 정광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사제는 여기가 바닥이야.”
“…….”
“무공을 펼친 뒤엔 맨날 어땠느냐고 묻기나 하고.”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혼날까 봐 무서운 얼굴로 묻잖아. 물을 거면 당당하게 물어야지.”
“……당당하게요?”
“그래. 완벽하지 않습니까?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죠. 이렇게.”
백승무가 입을 떡 벌렸다.
“어, 어떻게 그럽니까?”
“못하겠어? 그럼 최소한 나 잘했죠? 최고죠? 이렇게 해봐.”
“저는 그럴 실력이…….”
정광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사제. 어제보다 나아졌지?”
“그, 그런 것 같습니다.”
“내일은?”
“조금이나마 더 나아지겠지요.”
정광이 손뼉을 짝 쳤다.
“거기서 조금만 더 취해. 자신감을 가져. 지적당한 부분은 ‘오라. 다음은 네놈이냐? 너 역시 가져주마!’ 하면서 덤비라고.”
“자신감…….”
“그래야 재미가 붙고 성취감도 커져. 그럼 당연히 빨리 늘 수밖에.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해.”
“……꼭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정광은 주먹을 불끈 쥔 백승무에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지금부터 해봐. 세상에 출사표(出師表)를 던지는 거야.”
“……?”
“날 따라서 외쳐. 내가 바로 천하제이인(天下第二人) 백승무다! 응? 표정이 왜 그래?”
“……천하제일인은 사형이십니까?”
“다른 사람이 있나?”
“……괜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해봐. 아 어서. 이것도 못하면 손 놓는다.”
백승무는 속으로 다른 말을 외쳤다.
‘사형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때, 정광이 피식 웃었다.
“못 믿겠으면 말고.”
“……!”
백승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형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 아니지. 사기, 폭행, 공갈, 협박, 갈취를 즐기지만 무공에서만큼은 믿을 만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실력을 끌어 올린 것도 모두 정광 덕분이었다.
그런 그를 믿지 않고 어찌 앞으로 나아가겠는가!
백승무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부끄러움은 순간일 뿐. 나는 더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막상 외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이만.”
백승무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내가 바로 천하제이인 백승무다!”
“좋았어. 다음은 내가 바로 금권검마(金權劍魔) 백승무다.”
“내가 바로 금권검마…… 마?”
“아. 실수. 내가 바로 금권검협(金權劍俠) 백승무다.”
금권검협이라니!
앞의 두 글자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뒤의 두 글자가 백승무의 가슴을 울렸다.
그 울림은 그의 목을 타고 올라와 세상에 울려 퍼졌다.
“내가 바로 금권검협(金權劍俠) 백승무다아아아!”
“거봐. 하면 되잖아. 기분이 어때?”
백승무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진동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좋군요.”
“그래. 앞으로도 그 자세로 하는 거다.”
“……알겠습니다! 사형!”
백승무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온몸이 짜릿한 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아닌가.
“천하제이인 백승무?”
“금권검협? 처음 듣는데?”
백승무의 뜨거웠던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설마?’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담벼락에 매달린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광오(狂傲)한 외침 때문에 하도 어이가 없어 싸움을 멈추게 된 걸존과 창존.
그리고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던 수많은 무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