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55화 (55/569)

55화

고금제일기재(古今第一奇才)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말을 안 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먼저니, 그걸 누가 정한 거니 싸우더니 이제는 서로 미루는 꼴이라니.

“악가야. 네가 말해라.”

“자네가 하게. 내 양보하지.”

“멍석을 깔아주니까 못하냐?”

“자네야말로 갑자기 왜 이러는가? 혹 거절당할까 봐 겁이 난 건가?”

걸존이 발끈했다.

“겁은 무슨! 어린 도사야. 땅꾼 녀석이 널 제자로 삼고 싶다고 했지?”

“땅꾼이 누구예요?”

“왜 그 당가의 노독물(老毒物) 있잖느냐.”

“아, 그분. 네.”

“네가 거절했다 들었다.”

“그랬죠.”

“왜 그랬냐?”

“사부는 한 명으로 충분하니까요.”

의외의 대답이었을까.

걸존이 이마를 좁히며 중얼거렸다.

“사부라면…… 허청이었나? 괜찮은 도사라 듣긴 했는데.”

“맞아요.”

“그래도 땅꾼 녀석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잖아.”

부족?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성격도 생긴 것도 사부가 훨씬 낫구먼, 무슨.’

물론 무공이야 독존이 한참 높지만 전생에 천하제일인이었던 정광의 성에 안 차는 건 마찬가지였다.

“사부가 나으신데요.”

“……오호라. 이제야 알겠군.”

걸존이 기분 나쁘게 피식거렸다.

“하긴. 제 사부를 위하는 게 당연하지. 자존심도 있을 테고.”

아니, 그게 아니라.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십존이라는 이름의 무거움을 네 녀석이 모르는 게야.”

뭐가 얼마나 무겁길래?

정광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려는 듯 걸존이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십존이 왜 십존인지 보여주지.”

그는 허리춤에 끼고 있던 타구봉(打狗棒)을 뽑았다.

“그걸로 저 때리려고요?”

“……설마 그러겠냐? 본방 무공의 정수를 펼쳐주마. 네가 무엇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하군.”

개방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방도(幇徒)의 수만큼, 무공 또한 많다 못해 난잡할 정도였다.

그것들 중 정수라 칭할 정도의 무공이라 하면……?

“하아압! 삼십육초 타구봉법(打狗棒法)!”

누가 정파 아니랄까 봐 초식 수까지 친절히 알려주는 걸존이었다.

정광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아. 그거?’

개방하면 떠오르는 무공 중 하나 아닌가.

방주가 되어야 익힐 수 있는 절기라 들었는데 그걸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저 비루먹은 몸으로 제대로 펼칠 수 있나?’

정광은 그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힘내세요.”

“……시끄럽다!”

걸존은 높이 들어 올렸던 타구봉을 다짜고짜 내려쳤다.

“견두봉갈(犬頭棒喝)!”

개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는 법, 바로 머리를 때려 꾸짖고 시작하겠다는 염치없는 기수식(起手式)!

정광은 탄성을 질렀다.

“이야! 시원시원하네요!”

“……!”

타구봉을 움켜쥔 걸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타앗! 발구조천(發狗朝天)!”

아침 하늘을 향해 개를 날려 버리는 웅장한 일격!

“오오! 좋아요! 좋아!”

정광은 탄성을 지르다 못해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겸양을 떨다가 쓱 하고 찔러 넣는 다른 정파들에 비해 이 얼마나 솔직한 무공인가!

‘역시 거지답게 염치가 없구나.’

정광은 진지하게 걸존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낀 걸존은 더욱더 힘차게 타구봉을 휘둘렀다.

‘위력으로만 때리는 건 아니네. 초식이 꽤 잘 짜여 있는데?’

타구봉법은 개를 때려잡는다는 이름과는 다르게 신묘한 봉법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개’는 불의를 저지르는 ‘악인’을 말하는 것. 그것도 ‘무공이 높은 악인’이다.

타구봉법은 그런 놈들을 쥐어패는 상승 무공 중의 상승 무공인 것이다.

한편, 몇 초식만 펼치고 정광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물어보려 했던 걸존은 흥에 겨워 마지막 초식까지 펼쳐내고 있었다.

“으하앗! 천하무구(天下無狗)!”

타구봉법의 최후 절초 천하무구!

천하에 개가 없다! 천하의 모든 악인을 때려잡는다는 초식이 펼쳐지자 정광은 참지 못하고 손뼉을 쳤다.

“대단해요! 정말 대단해요!”

“헉. 헉. 그, 그렇지?”

“네. 이런 무공은 처음이네요.”

“후후. 그럴 것이다. 타구봉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응? 지금 뭐 하는 거냐?”

걸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광이 느닷없이 검집을 휘두르는 것 아닌가.

황금색 검집이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걸존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검박하던 곤륜파가 저러고 다니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검은 물론이요, 도복과 도관까지 아주 번쩍번쩍했다.

‘……뭐 저 녀석한테는 더없이 잘 어울리긴 한다만…… 어?’

뭘 하는지 모를 정도로 마구잡이로 움직이던 정광의 검집이 일정한 법도에 따라 휘돌기 시작했다.

“타, 타구봉법!”

정광은 걸존이 펼쳤던 타구봉법의 초식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훌륭한 자질이로다!”

걸존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초식을 흉내 내는 것뿐이었으나 그 움직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었기에.

다시 한번 탄성을 터뜨리려는데 창존의 전음이 들려왔다.

-대단하긴 한데 천하제일기재까지는 모르겠군.

-……하긴. 그렇긴 하지.

당장 구룡사봉 중 상위의 아이들만 해도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녀석들은 성격도 더 낫지 않나?

-거참. 부정할 수가 없구먼.

그래도 정광처럼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을 터.

걸존의 눈에 탐욕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가 죽어버렸다.

“이거 좋네요. 당하는 입장에선 개 취급당하면서 두들겨 맞는 거잖아요. 몇 대만 맞으면 제정신으론 못 버티겠는데요?”

“…….”

개방의 비전무공을 이딴 식으로 표현하는 놈이 있다니…….

“그런데 이거.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

정광의 자세가 낮아졌다.

자연히 검집을 휘두르는 방향도 아래를 향하게 되었다.

대체 뭘 하나 싶어 유심히 지켜보던 걸존과 창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저, 저건!”

“이, 이럴 수가!”

정광의 검집이 눈부신 변화를 일으키며 움직였다.

헌데 그 앞에 적이 서 있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이는 것 아닌가!

그 적은 바로 개!

“화, 황구?”

“배, 백구?”

뭐가 됐든 개는 개!

정광은 그 개를 찰지게 팼다!

타구봉법의 초식으로!

“겉핥기가 아니잖아!”

“반(絆), 벽(劈), 전(纏), 착(捉), 도(挑), 인(引), 봉(封), 전(轉)의 여덟 가지 구결이 오롯이 담겨 있구나!”

개방의 비전무공, 타구봉법!

그것으로 개를 패는 광경이라니!

경악하는 그들과 달리 정광은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인다, 보여.’

언뜻언뜻 스치듯 보이던 타구봉법의 무리(武理)가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래. 상대를 개 취급하면서 나는 천하제일의 개장수라고 믿어야 해.’

내가 못 잡을 개는 천하에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펼쳐야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는 것이리라.

‘상대가 미친개라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필요하겠지.’

이런 경우는 두들겨 패서 정신 차리게 해준다.

‘완전히 미친개는 어쩔 수 없고.’

무량수불. 찰지게 패서 육질을 연하게 만들 수밖에.

‘그다음은…….’

진흙을 묻혀서 구워 먹든 솥에 넣어 삶아 먹든 취향에 따라 행하면 될 일.

‘과연 개방다운 무공이구나.’

마음이 무공의 진의와 통하니 모든 초식이 막힘없이 풀려 나왔다.

정광의 자세는 더 낮아졌고 초식의 움직임도 작아졌다.

그리고 결국 최후의 절초가 펼쳐졌다.

우우우우웅-

진기를 머금은 검집이 용트림했다.

그 용은 팔방을 휩쓸며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그야말로 천하무구(天下無狗)!

세상의 개를 다 때려잡아서 한 마리도 남아나지 않는 듯한 환상이 펼쳐진 것이다!

정광은 그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야. 진짜 개 잡기 딱인데.”

방주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라는 게 납득이 갔다.

아무리 거지라 해도 방주까지 구걸하는 건 모양새가 좀 그렇지 않은가?

이것만 제대로 익히면 구걸을 안 해도 먹고 살기 충분하리라.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움직였더니 다시 배고프네.’

달아났던 식욕이 돌아왔다.

“저기요. 저 이제 가도 되죠?”

“…….”

“…….”

“그럼 또 봬요.”

두 노인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잠깐!”

“아직이다!”

“또 왜요?”

걸존이 부들부들 떨며 더듬거렸다.

“네, 네가 타구봉법을 잘못 알고 있다! 그, 그건 개 잡는 무공이 아니야! 마두를 처단하는 무공이다!”

“아닌데.”

“……뭐?”

정광은 머리를 긁적였다.

‘곤륜도 그렇더니 개방도 이 모양인가.’

알려줄 의무는 없지만, 덕분에 개를 때려잡는 재밌는 무공을 알게 되었기에 말해주기로 했다.

“직접 만드신 거 아니죠?”

“다, 당연하지.”

“개방의 개파조사…… 방파니까 개방조사인가? 어쨌든 그분이 만드셨을 거잖아요. 당연히 거지셨을 거고.”

“물론이다.”

“그럼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야죠.”

“……뭐?”

“개를 때려잡는 김에 겸사겸사 악인도 잡으려고 만든 걸 후인이 보기 좋게 변형시켰을 거란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

“그래서 움직임이 너무 커졌어요. 더 낮고 작게. 그렇게 해보세요.”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아!”

걸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사부였던 전전대 방주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제자야. 너 어깨에 힘이 과하게 들어간 것 같다.’

‘노망났수? 힘은 무슨, 억!’

‘말본새하곤. 이놈아, 네가 거지지 무슨 대협이냐? 왜 그리 거들먹거려!’

‘아 진짜.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네놈이 타구봉법 펼치는 꼴을 봐라! 아주 멋을 부리다 못해 금칠을 하잖느냐!’

‘방주에게만 이어지는 절기를 신중하게 펼치는 게 뭐가 잘못됐다고! 아악!’

‘쯧쯧. 너는 거지다, 거지. 거지답게 펼쳐라. 악인을 처단하는 대협이 아니라 개를 잡는 거지의 마음으로 하란 말이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고…….’

‘낮은 마음으로 임해야 욕심 없이 협을 행할 수 있거늘…….’

장탄식하던 사부는 자조 섞인 얼굴로 중얼거렸었다.

‘하긴. 나도 똑같은 말을 들었었지. 허허. 이제야 그걸 깨닫다니.’

사부의 임종을 지키던 걸존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 제대로 좀 말해봐요.’

‘되었다. 난 갈 테니 알아서 해.’

‘네? 사부? 사부! 어라? 이 영감 진짜 죽은 거야? 유언은!’

하도 기가 차서 지웠던 기억이었건만.

‘낮은 곳에서 작게…….’

걸존은 신중한 얼굴로 타구봉을 휘둘렀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자세는 낮아졌고 움직임 역시 작아졌다.

정광이 펼쳤던, 진짜 개를 때려잡는 타구봉법이었다.

‘아! 더 낮게, 더 작게 펼치면 적을 더 가까이서 상대할 수 있지! 겉멋에 빠져 이런 간단한 이치를 잊고 있었다니!’

근접전은 위험을 동반하지만, 의혈(義血)로 무장한 개방도는 죽거나 다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에게 큰 위협을 줄 수 있기에 즐기는 편이었다.

게다가 개방도가 풍기는 악취는 상대의 호흡을 어렵게 했으니, 개방 무공 대부분이 근접전을 지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부. 나도 이제야 알 게 되었소…….’

걸존은 깨달음에 잠긴 채 개방 무공들을 펼쳤다.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창존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 녀석. 운이 좋군.’

조금이나마 아래로 봤건만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걸존을 그렇게 만든 정광을 바라보자 탐욕이 솟아올랐다.

‘천하제일기재(天下第一奇才)라 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신강에 웅크려 있다가 죽었는데도 천하를 떨어 울렸던 진천마가 이 정도였을까!

‘고금제일기재(古今第一奇才)가 틀림없다! 반드시 내가 가진다!’

곤륜의 제자여서 뺏을 순 없다.

그렇다면 깨달음만이라도 전해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리라!

창존의 입에서 인자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광 자네, 혹시 개방 무공이 마음에 든 건 아니겠지?”

“들었는데요.”

“……취향이 독특하구먼. 설마 저 친구에게 무공을 배울 생각인가?”

“이렇게 재밌는 거면 나쁘진 않을 것 같기도 한데…….”

창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자네에게 호의를 품고 있으니 하나 알려주지. 저 녀석은 안 되네.”

“왜요?”

“아무도 안 놀아줘서 혼자 밥 빌어먹고 다니는 녀석이랑 어울릴 건가?”

“……외톨이?”

“더 심하지. 자유로운 영혼이라 홀로 다닌다고 하는데 순 거짓말…….”

“악가 너 이 새끼!”

“응? 자네 깨달음에 빠져 있지 않았나?”

“금방 지나갔다! 이 망할 놈아!”

“다시 한번 더듬어보게.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게야.”

걸존은 새롭게 깨달은 타구봉법으로 창존을 두들겨 패려다 먼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건 바로 고자질!

“정광아! 악가 저놈! 며느리들이 합심해서 쫓아냈단다!”

“무슨 그런 유언비어를!”

“저 싸움에 미친놈이 무공전수를 핑계로 손자들을 두들겨 팼어! 그래서 며느리들한테 쫓겨난 거야!”

“쫓겨나다니! 손자들의 무공을 열정적으로 봐줬더니 너무 감사하다고, 잠깐 쉬고 오라 해서 유람을 나온 것뿐일세!”

걸존이 콧방귀를 뀌었다.

“쫓겨난 영감탱이!”

“외톨이 거지!”

“거지는 원래 혼자야!”

“나도 내 발로 나왔네!”

“……네 녀석.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마찬가지일세. 말 나온 김에 오늘 해결하는 게 좋겠군.”

십존의 두 명이 살기를 발산했다.

그야말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가 벌어지려는 순간!

정광이 입을 열었다.

“시끄러운데 다른 데 가셔서 싸우시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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