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하나로 합쳐지는 길
“고맙네. 아주 큰일을 해줬어.”
정광은 살짝 놀랐다.
당영중의 말 때문이 아니라 얼굴 때문에.
‘나무토막이 뒤틀리는 것 같잖아.’
평생 처음 웃는 것처럼 기괴한 모습이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한 얼굴로 돌아갔다.
‘거참. 신기하네.’
정광이 바라보기만 하자 당영중은 이해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나 보군. 내 말이 의외인가?”
“웃으신 게 의외인데요. 지금 기분 좋으신 거 맞죠?”
“……아니라곤 말 못 하겠군. 자네 덕분에 아버님께 잔소리를 할 수 있었거든.”
“그분이 얌전히 들으셨나요?”
“그럴 리가. 어쨌든 제대로 망신을 당하셨으니 당분간은 자중하실 거네.”
과연 웃을 만하지 않은가.
정광은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게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라는 건가.’
전생의 아비를 떠올리지 이가 갈렸다.
그래도 독존 정도면 귀엽지.
그놈의 천륜만 아니었으면 진짜!
“싸우려고 온 게 아니라 했잖나. 주먹의 힘 풀게.”
“아. 잠깐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요. 근데 가주님은 특이하시네요.”
“내가 말인가? 무엇이?”
“가문의 명예 때문에 화내실 줄 알았죠.”
당영중의 얼굴이 다시 변했다.
아까의 미소와는 또 다른, 마치 나무토막이 썩어서 갈라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썩은 미소?’
아니나 다를까.
당영중의 입에서 담담하지만 한이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난 수십 년간 아버님께서 내리시고, 내가 올려왔네. 이번에도 그러면 그만이야.”
“와아. 진짜 고생 많으시네.”
“고생은 자네가 더 많지. 본가 아이들의 독을 품평해 주느라 애 많이 썼다 들었네.”
“그거야 뭐 서로 좋은 일이었죠.”
“앞으로도 그럴 겐가?”
“오면 박대할 생각은 없는데요.”
잠시 침묵하던 당영중이 무겁게 말했다.
“마음이 복잡하군. 독을 다루는 본가에게 있어서 자네 같은 능력을 가진 이는 너무 위험하거든.”
경악할 정도의 내성을 가진 데다 자유자재로 배출하는 정광이었다.
지금이야 나쁘지 않은 관계지만 나중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 당가를 이끄는 당영중으로서는 당연한 염려이리라.
‘대놓고 말하니 좋군.’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받아치면 또 어떻게 나올까?
“저를 죽이시는 게 깔끔하겠네요.”
당영중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자네와 진인들을 직접 보기 전까진 그럴까 생각도 해봤네.”
“크으. 솔직하셔라.”
“아무리 따져봐도 수지타산이 안 나오더군. 앞으로 본가와 친우(親友)로 지내세.”
“친우라…….”
“자네, 아예 무공을 폐하고 환속하는 건 어떤가? 예지와 혼인해서 본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거야.”
“그냥 환속한다 해도 그건 좀.”
“예지도 싫다고 할 걸세.”
“……아니, 그럴 걸 왜 말씀하신 거예요?”
“내가 조금 욱했군. 못 들은 거로 하게나.”
당영중은 어이없어하는 정광에게 고개를 까닥인 뒤 일어섰다.
“이만 가지. 또 보세.”
“근데 정말 왜 오신 거죠?”
“고맙단 말도 전하고, 자네가 궁금하기도 해서.”
“궁금증은 좀 풀리셨어요?”
당영중은 정광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 * *
당영중이 당가의 숙소로 돌아오자 당기황이 달라붙었다.
“그놈이 뭐래? 내 말이 맞지? 누명이라니까.”
“아버님께서 탐내실 만하더군요.”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그만 들어가겠습니다.”
“아, 이놈이 진짜. 그놈을 어쩔 생각이냐?”
“손을 쓰기엔 곤륜이라는 이름이 너무 무겁지요.”
“곤륜을 걷어내면?”
당영중은 정광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껏 들었던 소문도.
결론은 아까와 같았다.
“모르겠습니다.”
“너도 끌어들이고 싶지? 정 안되면 제대로 연이라도 맺고 싶고.”
“…….”
“나도 그놈이 진짜 인재라 탐을 낸 거다. 알아서 할 테니 구경이나 해.”
“또 소란을 일으키시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흥. 어쩔 건데?”
“가주의 권위를 우습게 보시는군요.”
당영중의 눈에 한기가 어렸다.
당기황은 찔끔하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놈 봐라? 잘하면 한 대 치겠다?”
“한 대뿐이겠습니까?”
“이, 이놈이 진짜!”
당영중은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던 당기황은 한숨을 쉬었다.
“망할 녀석 같으니. 아비가 늙었다고 괄시나 하고 말이야.”
까마득하게 어린것에게 망신을 당하질 않나, 자식놈한테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하질 않나.
마음이 울적해지자 술이 생각난 그는 후원 정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크으. 쓰다, 써.”
아무도 없는 깜깜한 밤, 지금의 그처럼 잔뜩 기운 달을 바라보니 기분이 더 싱숭생숭해지는 것 아닌가.
연거푸 술을 마시던 그는 어둠 속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뭐 해? 이놈들아. 구경났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작달막한 키에 때 묻은 몽둥이를 허리춤에 찔러 넣은 거지 노인과 장창을 세 개나 등에 멘 당당한 풍채의 노인이었다.
“청승 떠는 꼴하곤. 그러게 늙으면 죽어야지.”
“너무 그러지 말게. 안 그래도 울적해 보이거늘, 두 번 죽일 셈인가?”
당기황은 눈썹을 치켜뜨며 삿대질했다.
“거지 네놈은 안 늙었냐? 그리고 악가(岳家), 너. 네놈이 더 열받아. 맨날 배배 꼬고 말이야.”
“엣헴. 내가 그래도 땅꾼 너보단 한 살 어리지.”
“꼰다니?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왜 흥분하는가?”
“오호라. 한번 해보자는 거지? 둘 다 덤벼. 내 오늘 살풀이 좀 하마.”
당기황이 내공을 끌어 올리자 거지 노인이 이죽거렸다.
“낮에 아들내미랑 한판 했다며? 힘이 남아 있냐?”
다음은 악가 노인이었다.
“어허. 따뜻하게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 남의 아픈 가정사를 찌르는가? 미안하네, 독존. 내가 대신 사과하지.”
“……악가 네놈부터 와라!”
“허어. 괜찮겠는가?”
“당연한 소리를!”
“그럼 내 사양 않겠네.”
악가 노인은 근엄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혀로 핥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당기황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됐다. 너희 같은 놈들과 투덕거려서 뭐할까.”
그는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거지 노인과 악가 노인이 몇 마디 더 떠들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노인들은 당기황 앞에 앉아 술을 뺏어 먹기 시작했다.
“거지야 그렇다 치고 악가 네놈도 훔쳐 먹냐?”
“자네의 시름을 나누려는 걸세.”
“나뉘는 게 아니라 늘어나잖아.”
“자네가 곤륜의 어린 제자를 암습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그거, 헛소문이지?”
“당연한 소리를.”
거지 노인이 더러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끼어들었다.
“진옥룡이라는 그 녀석. 전부터 소문이 꽤 들리더니 제법이네. 땅꾼을 물 먹이고 말이야.”
“거지야. 네 녀석이 좀 아는가 보구나. 그놈에 대해 말 좀 해다오.”
“공짜로?”
“지금 네 목구멍에 들어가고 있는 술은 누구 것이냐?”
“쩝. 딱 술값만큼만 얘기해 주지.”
말은 그랬지만 거지 노인은 후했다. 정광이 청해성에서부터 해온 일들이 그의 입에서 풀려 나왔다.
듣고 있던 악가 노인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허어. 믿기 힘들군.”
“악가야. 네가 지금 본방의 정보를 불신하는 거냐?”
“그럴 리가 있나. 너무 놀라운 얘기들이라서 그러네.”
“뭐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이 얘기들을 전해온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겼거든. 개소리하지 말라고.”
어깨를 으쓱한 거지 노인은 당기황이 묵묵히 있자 코웃음 쳤다.
“땅꾼 너도 안 믿는 거냐?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럴 만하지.”
“……뭐?”
“그 녀석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기황의 눈에 탐욕의 빛이 어렸다.
‘역시 내 진전을 물려받을 놈은 그 녀석밖에 없어.’
아들인 당영중도 천재라 불릴 만한 인재였다.
허나 그러면 뭐 하는가. 잡고 가르치려 해도 무시하는 것을.
마음만 답답하던 판국에 진짜 천재가 나타났으니 그의 가슴이 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라? 이놈 눈빛 좀 보소.”
당기황을 살펴보던 거지 노인이 피식거렸다.
“영락없이 독사를 발견한 땅꾼이구먼. 놈을 곤륜에게서 뺏을 셈이냐?”
“그건 힘들어.”
“……네 녀석이 힘들단 말도 할 줄 알았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 녀석을 보면 알 수 있거든.”
“어떻길래?”
당기황은 정광을 떠올렸다.
“내 살다 살다 그렇게 제멋대로인 녀석은 처음 봤지. 그런데 곤륜 같이 엄격한 도문에 남아 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할까?”
“사문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깊다는 거겠지.”
“그래. 그런데 강제로 뺏는다? 그 녀석이 얼마나 날뛸지 상상도 못 하겠군.”
고개를 주억거리던 거지 노인이 덧붙였다.
“게다가 곤륜이잖아. 그들이 최근에 벌인 일들을 따져보자고. 그게 어디 예전의 골골대던 곤륜인가?”
“…….”
“그러니 포기해. 싫다고 했다며? 가문에 똘똘한 애들 많잖아. 걔들이나 가르치라고.”
“이보게 독존. 내 생각도 같네. 헛심 쓰지 말고 가까운 데서 찾게나.”
악가 노인까지 거들었지만 당기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녀석이어야 해.”
“거참 고집하고는.”
“이유가 뭔가?”
“천하제일기재거든.”
거지 노인과 악가 노인이 동시에 야유했다.
“허풍하고는!”
“그래. 막상 가르쳐 보면 거기까진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냐? 이대로 가지고 무덤에 들어가긴 싫다.”
“하긴…….”
“우리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됐지.”
두 노인이 공감하자 당기황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아들놈은 싫다 하지, 손자 손녀는 아직 멀었지. 너희들은 그래도 깨달음을 물려줄 후인이 있잖아! 하아. 나만 이게 뭔 꼴인지.”
“…….”
“……”
두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당기황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아예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뺏어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만 전해준다 해도 싫다 하니 원. 이를 어쩐다. 분명히 방법이 있을 텐데…….”
거지 노인과 악가 노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 오만한 놈이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원하는 인재라?’
‘정말 천하제일기재라면…….’
거지 노인이 슬쩍 하늘을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벌써 해가 뜨려 하는구먼. 에구구, 삭신이야. 요즘은 자도 자도 피곤하다니까.”
악가 노인이 그 뒤를 따랐다.
“그만 들어들 가세. 점심에 만나서 밥이나 같이 먹지.”
당기황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거지 노인과 악가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잘 가라.”
“이따 보세.”
그렇게 그들은 저마다의 길로 흩어졌다.
그런데 그 길은, 결국엔 하나로 합쳐지는 길이었다.
* * *
“너 이 새끼! 악가가 머무는 숙소로 간다며!”
“자네야말로 개방의 숙소로 간다더니 왜 여기 있는가? 누가 거지 아니랄까 봐 숙소도 길바닥인가?”
“이놈이 진짜!”
“말해주게. 궁금하구먼.”
고기를 훔쳐 먹으려고 숙소에서 막 나왔던 정광은 눈살을 찌푸렸다.
웬 거지 늙은이와 힘깨나 쓸 법한 늙은이가 나타나더니 아웅다웅하는 것 아닌가.
‘이건 또 뭐야?’
정파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이름 십존(十尊)!
그들은 그중 걸존(乞尊)과 창존(槍尊)이었다.
하지만 정광이 그걸 알 리가 있나.
관심도 없었다.
그저 고기를 먹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동이 틀 무렵 몰래 나왔건만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내가 먼저야, 인마!”
체구가 너무 작아 더 불쌍해 보이는 거지 노인이었다.
행색이 어찌나 더러운지 보기만 해도 식욕이 뚝 떨어졌다.
“그건 누가 정한 건가? 저승 먼저 가는 거야 양보해 주겠네만 이건 좀 그런데.”
좋은 풍채와는 반대로 말투가 얄미운 노인이었다.
그 말투를 듣자 떨어지던 식욕이 완전히 죽어버렸다.
‘잠이나 더 자자.’
괜히 나왔다 싶어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데 두 노인이 물었다.
“네가 정광이냐?”
“자네가 진옥룡인가?”
물음은 두 개였지만 내용은 하나.
“그런데요.”
“흐흐. 듣던 대로 잘생겼구나.”
“과연. 명불허전이로다.”
정광은 눈살을 찡그렸다.
두 노인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여서였다.
“근데 누구세요?”
거지 노인이 끈적끈적한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가슴을 폈다.
“개방(丐幇)의 태상방주, 걸존 윤희구가 바로 나다.”
풍채 좋은 노인이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산동악가(山東岳家)의 악만춘이라 하네. 강호동도들은 창존이라 부르지.”
“아.”
걸존과 창존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
무(武)의 길을 걷는 이가 십존을 만나 뵙는 기연을 얻었는데 이런 반응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제대로 들은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그, 그래. 안녕?”
“……만나서 반갑네.”
“혹시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
정광의 말에 걸존과 창존이 서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