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상선약수(上善若水) 부유부쟁(夫唯不爭)
운학은 앞에 있는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두터운 내공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 이미 오십 줄을 넘긴 사천당가의 가주 당영중이었다.
당영중의 차가운 얼굴이 아래로 숙여졌다.
“아버님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가주가 고개를 숙였다.
이 이상의 사과가 어디 있겠는가.
운학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께 사과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외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래야지요.”
곤륜 도사들의 머릿속에 당영중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아비를 잘못 만나서 정말 고생이 많구나.’
당영중은 다음 대의 십존(十尊)이라 일컬어지는 십오군(十五君) 중 독군(毒君)으로 꼽힐 만큼 출중한 능력을 지닌 무인이었다.
게다가 차가운 얼굴과 다르게 무수한 협행을 해서 칭송받는 협객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그가 아무리 협행을 해봤자 뭐 하는가?
그의 또 다른 별호는 저두군자(低頭君子)였다. 아비에게 피해를 본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게 일상이라 붙은 것이었다.
강호에서는 둘을 일컬어 견부호자(犬父虎子)라고 칭할 만큼 아비인 독존의 패악은 대단했다.
운학은 생떼를 쓰던 독존을 떠올리며 내심 혀를 찼다.
‘당영중이 협행을 멈추지 않는 건 아비인 독존이 까먹는 가문의 명성을 복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당가의 가주인 당영중이 확답을 했으니 아무리 독존이라 해도 또 찾아오진 못하리라.
“그럼 이만 가보겠소이다. 가주께서는 무림맹 회의에 참석 안 하실 것이오?”
“아버님을 뵙고 난 후에야 가야겠습니다. 조금이나마 배웅해 드릴 테니 가시지요.”
운학이 사양하려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시오! 의복을 보아하니 곤륜의 제자인 것 같은데 함부로 들어오면 아니 되오!”
“무척 급한 일이어서 그렇소이다! 본문의 어르신들은 어디 계시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오?”
“귀 가문의 태상가주님과 본문의 제자 사이에 문제가 생겼소!”
“문제라면?”
“암습이오! 이럴 시간이 없으니 빨리 안내해 주시오!”
방에서 듣고 있던 곤륜 도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암습이라니! 안 된다고 했거늘, 정광 이 녀석이 결국엔 저질렀구나!’
그들과 달리 당영중은 침착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당오군과 청년 도사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말해보게.”
청년 도사 정현은 격앙된 어조로 대답했다.
“독존께서 독으로 본문의 제자 정광을 암습하셨습니다!”
하얗게 질려 있던 곤륜 도사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암습을 한 게 아니라 당했구나!’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정광의 안위에 대한 염려는 뒤늦게 찾아왔다.
‘아무리 정광이라 해도 상대가 독존 아닌가!’
운학이 다급히 물었다.
“정광의 용태는 어떻느냐?”
“일단 방으로 옮겼습니다. 운기조식하는 것까지만 보고 달려와서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독존은?”
“정광 사제에게 계속 손을 쓰려는 걸 사형제들이 막고 있습니다.”
곤륜 도사들은 분노했다.
‘제자가 되기 싫다 하자 손을 썼나 보군. 이런 나잇값도 못하는 작자를 봤나!’
물론 의아한 점도 있었다.
‘아무리 그라 해도 체면이 있지, 까마득한 후인에게 암습을 했다?’
뭐가 어찌 됐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영중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믿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죄송합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운학은 일의 전모를 직접 확인한 후에야 화를 내든 따지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겠소.”
그들은 나는 듯이 달렸다.
도중에 많은 이들을 지나쳤는데 하나같이 독존과 정광의 일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독존이 곤륜 제자를 독으로 암습한 것 아는가?”
“자네 자세히는 모르는군. 독존이 노망이 들어서 곤륜의 어린 제자를 독으로 암습한 뒤 두들겨 팬 걸세.”
“아니지! 독존이 노망이 들어서 벽에 똥칠하는 것을 곤륜의 꼬마 도사가 불쌍해서 구해줬더니, 독존이 똥을 싸며 그 꼬마 도사를 독으로 암습한 뒤 두들겨 패고 묻어버린 거야!”
곤륜 도사들은 소름이 돋았다.
“정현아! 네 말과 저들의 말이 매우 다르구나!”
“헉. 헉. 사조님! 얘기가 와전된 것 같습니다! 저 정도는 아니옵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고 마음만 다급해졌다.
열심히 발을 놀린 그들은 얼마 안 가 곤륜파의 숙소가 보이는 곳까지 이르렀다.
“저, 저건!”
전각 앞에서 정 자 배 제자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는 것 아닌가.
바로 독존이었다.
다급히 달려온 그들을 환영하듯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놈들이 정말! 안 비켜?”
“무량수불. 진정하십시오! 저희 같은 말학들에게 왜 이러십니까?”
“네놈들이 날 막으니까 그렇지! 당장 비켜라!”
“안 됩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오호라. 피를 봐야 말을 듣겠다 이거냐?”
독존이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자 당영중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고뭉치 아비 때문에 극도로 단련된 그로서도 더는 참기 힘들었다.
“하압!”
당영중은 즉시 몸을 날려서 아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양손에서 기이한 색으로 번들거리는 아미자(峨嵋刺)가 회전했다.
* * *
“정광아! 괜찮느냐?”
문이 벌컥 열리며 운학과 도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침상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는 정광을 보자 입을 뻐끔거렸다.
“……너, 너…….”
“오셨어요?”
설마.
아니겠지.
그들은 정광에게 달라붙어서 몸을 살피고 진맥을 하는 둥 부산을 떨었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쌩쌩하잖아!’
‘독존이 암습을 했는데 이렇다고? 이 녀석,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운학이 모두를 대표해서 엄포를 놓았다.
“어찌 된 일인지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거라.”
“별일은 아니고요. 실은…….”
얼마 안 가 곤륜 도사들은 머리를 감싸 쥐게 되었다.
“……좀 더 참지 그랬느냐?”
“많이 참았죠. 근데 끝이 없을 것 같더라고요. 사조님께서도 독존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에게 누명을 씌운 건 잘못된 일이다.”
“누명이라뇨?”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정광을 보며 운학도 눈을 부릅떴다.
“아니냐?”
“저는 ‘도, 독을……’이라고만 했지 그가 암습했다곤 안 했는데요.”
“……그러니까 그냥 혼잣말로 중얼거렸는데 사람들이 오해한 거다?”
“그렇죠.”
“……독존의 평소 행실이 잘못되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지레짐작한 것이다, 이 말이냐?”
“역시 사조님은 얘기가 통해서 좋아요.”
“……난 그다지 좋지 않구나. 이렇게 네 마음을 이해하는 내가 두렵다.”
정광은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삼라만상(森羅萬象)엔 제각각의 이치가 있으니, 이는…….”
“됐고. 네 얘기를 정리하면…….”
운학은 스스로도 기가 차다는 듯 허탈하게 말했다.
“모든 건 그의 업보 때문이구나.”
정광이 감탄했다.
“와. 사숙조님, 어떻게 아셨어요? 도가 많이 느셨네요.”
* * *
독존이 아무리 제멋대로라 해도 사람이었다.
아들인 당영중이 살기 어린 공세를 쏟아붓자 당황해서 손발이 어지러워지더니 도망가 버렸다.
당영중은 그 뒤를 쫓았고 구경꾼들도 사라졌다.
이렇게 밖의 소란은 진정되었는데.
안의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겠는가.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보게.”
운학의 말에 운 자 배와 허 자 배 도사들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하필이면 상대가 악명 높은 독존이구나.’
‘정광의 말대로라면 모두 그의 업보 때문…… 하아아. 이건 일단 넘어가고.’
‘어쨌든 둘 다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긴 한데.’
‘독존이 억울하다고 날뛰겠지.’
‘사실 그의 말을 믿을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아들인 가주조차 그럴 게야.’
‘아니지. 아무리 아비를 미워한다 해도 어느 정도는 믿지 않을까?’
‘게다가 독존이 또 찾아와서 시비를 걸 텐데 이를 대체 어쩐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오직 허직만이 뭔가 떠오른 듯 손을 들었다.
“제자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운학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정광이 오해를 일으킨 건 사실이니 당가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키자, 이런 말을 하려는가?”
“그렇습니다. 역시 사숙의 혜안은 놀랍…….”
“기각. 다른 의견들을 말해보게.”
“하지만 사숙. 정도대로라면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습니까?”
“후우우. 자네가 융통성 없는 거야 익히 알고 있었네만 너무 심하군. 자네 말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나?”
“우리가 함께 가서 사과할 건 하고 따질 건 따지면 당가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당가의 명예도 지킬 수 있게 되겠지요.”
꼬장꼬장한 건지 머리가 청순한 건지. 운학은 순간 ‘자네 누이가 자네를 왜 그리 싫어하는지 알겠네’라고 말할 뻔했다.
“자네는 나중에 나랑 따로 얘기 좀 하세. 다른 의견 없나?”
풀이 죽은 허직을 제외한 도사들은 맹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다들 한숨만 푹푹 쉬는 그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시네요. 떼쓰는 노인은 떼어냈을 뿐인데요.”
“……넌 또 언제 들어왔느냐?”
“지금요.”
운학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뒤 정광을 노려봤다.
“우린 지금 현실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 거 다 따지면 도를 따라 행동할 수 없는데. 으음. 제가 때가 덜 묻었나 보네요.”
“……그럼 네 도를 말해보아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두 가지 방법이 있죠.”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정광이 손가락 하나를 꼽았다.
“첫째, 제가 암습을 당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도 몰라요. 우리 빼고.”
“……그러니 가만히 있자?”
“네. 상선약수(上善若水)면 부유부쟁(夫唯不爭)이라. 최고의 선은 물과 같으니, 자연스럽게 지나가면 어떠한 다툼도 없죠.”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이냐?”
정광이 손가락 하나를 더 꼽았다.
“아까 것은 도를 따라가는 거고, 이번 것은 도를 몸에 새겨주는 거예요.”
“……독존을 패겠다?”
“요약하면 그렇죠.”
“……가능은 한 것이냐?”
“사숙조님들이 계신 데 누가 두렵겠어요.”
“……나는 두렵구나. 네가.”
운학이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정광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독존이잖아요. 잘잘못을 떠나서 무고한 이가 오해를 사게 했다면 할 말이 없으나 제 마음에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훌륭하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런데 말이다.”
운학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는 말로 너를 핍박했을 뿐인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 네가 심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모두 정광이 외통수에 걸렸다고 생각했지만 정광은 정광이었다.
그의 입에서 당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독존은 저를 치려고 했는데요.”
“……그걸 어떻게 알지?”
전생에 마교라는 복마전에서 백 년 넘게 굴렀던 정광이었다. 상대가 손을 쓰려는 순간의 기세쯤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느낌이죠.”
사실을 말했건만 운학은 ‘그렇구나’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십존이 공격하려는 기세를 약관도 안 된 청년이 알아챘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수긍하겠는가!
모두 운학과 같은 마음이었다.
단 한 명만 빼고.
“그런 거였군.”
허청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정광이 싱긋 웃었다.
“역시 사부님은 믿으시는군요.”
“아무렴. 내가 네 말을 안 믿고 세상 그 무엇을 믿겠느냐?”
지켜보던 이들은 한숨을 쉬었다. 제자를 맹목적으로 믿는 허청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다들 답답한 마음에 창밖을 바라봤다. 완전히 깜깜한 것이 그들의 마음을 비추는 것 같았다.
“머리가 복잡하군. 내일 다시 얘기하세.”
운학은 그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런데 그때.
독군 당영중이 찾아왔다.
“정광이라는 청년과 독대를 청합니다.”
“그건 곤란하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을 당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러시오?”
당영중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할 말이 있습니다.”
* * *
운학에게 전음으로 단단히 주의를 받은 정광은 당영중과 마주 앉았다.
‘나무토막 같네.’
그의 감상대로 당영중은 표정도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십존(十尊) 밑의 십오군(十五君)이라 했지? 제법 하는 것 같은데.’
제법 하는 당영중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떼었다.
“아버님께 대충 들었네.”
“뭐라고 하셨는데요?”
“자네가 누명을 씌웠다 하시더군.”
“믿으세요?”
당영중의 눈이 깊어졌다.
마치 과거를 더듬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버님은 항상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셨지.”
그나마 나이가 든 뒤로 좀 얌전해진 게 이랬다.
“하지만 내게 거짓말만큼은 안 하셨다네. 물론 지금도 그럴 것이고.”
정광은 내심 혀를 찼다.
‘텄네.’
상선약수 부유부쟁은 개뿔.
남은 방법은 싸우는 것인데.
‘살기가 없잖아. 뭐 하러 온 거야?’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당영중이 중얼거렸다.
“아이들에게 들은 대로군. 참 특이해.”
“저요?”
“그럼 누가 있겠는가? 내 자네에게 꼭 할 말이 있어서 왔네.”
“뭔데요?”
당영중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것은.
무척 어색한 미소였다.
“고맙네. 아주 큰일을 해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