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암습
‘이 영감 왜 이래?’
정광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당기황을 살펴봤다.
이름은 몰랐지만 독존이라는 별호는 알고 있었다.
정파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으로 꼽히는 십존(十尊) 중 하나 아니던가.
‘그런데…….’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라빠진 몸, 쭈글쭈글한 얼굴, 푸르딩딩한 안색까지.
어느 하나 존(尊)이라는 별호와 어울리는 구석이 없는 노인네였다.
‘아니, 외모는 둘째 문제지.’
만약에 누군가가 천마신교에서 그딴 오만한 별호를 쓴다?
정광이 나설 것도 없었다.
감히 어디서 건방을 떠냐며 수하들이 몰매를 놓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
그런데 저 나이가 되도록 이렇게 살아서 돌아다니는 걸 보면…….
‘중원 애들은 착하구나. 여기서 태어나다니 운이 좋은 늙은이네.’
그 마음을 읽은 것일까?
당기황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아이야. 네 표정이 마음에 안 드는구나.”
“어떻길래요?”
“마치 나를 동정…… 후우. 설마 그럴 리가. 아니다, 됐다.”
“그럼 이만.”
“잠깐!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을 수가 있나. 네가 그러고도 명문정파인 곤륜의 제자가 맞느냐?”
“네.”
확실히 그렇긴 했다.
“후우우. 후우우.”
당기황은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말을 이었다.
“주위를 둘러보거라. 어떤 생각이 드느냐?”
당기황을 알아본 사람들이 극진한 자세로 포권을 하고 있었다.
“아. 이렇게요?”
정광이 그들을 따라 하자 당기황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인데. 너는 평소에도 이리 예의가 없느냐? 존장들이 뭐라 하진 않고?”
“글쎄요. 사조님도 별말씀 안 하시던데요.”
“사조?”
당기황은 머릿속에 담겨 있는 정광에 대한 소문을 뒤졌다.
‘이놈의 사조가…… 아! 덕성(德聖) 운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 뛰어난 성품 때문에 흠모하던 이 아닌가.
‘명불허전이라더니 과연!’
덕성으로 불릴 정도의 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진작에 패 죽였을 터.
‘덕으로 악인을 감화시킬 정도로 대단한 이라 들었건만…….’
그런 운후조차 이 망종을 감화시키진 못했나 보다.
당기황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진인이라 불릴 만한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이거늘. 어찌 너 같은 사손을 만나서…….”
“제가 어떤데요?”
“……되었다. 그의 단전이 파괴되었다 들었는데 건강은 어떻느냐?”
“훨훨 날아다니시죠.”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훨훨…… 훠얼훨?”
당기황의 눈이 커졌다.
“설마 우화등선했다는 말이냐?”
“아뇨. 곤륜산에서 날아다니세요.”
“……!”
단전이 깨진 이가 날아?
“……그런 소문은 못 들었는데?”
“얼마 안 됐어요.”
“설마 단전을 회복했다는 말이냐?”
“네.”
“어떻게?”
“제가 치료해 드렸는데요.”
“무어라!?”
당기황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내려다 멈췄다.
정광이 무늬만 곤륜 제자라 하더라도 사조에 대한 일을 거짓으로 말하는 죄를 범할 리가 없어서였다.
그렇다면 정말 그럴 만한 의술까지 가지고 있다는 말인데.
‘듣도 보도 못 한 기사로다.’
위대한 사천당문의 태상가주(太上家主)인 당기황으로서도 불가능한 일 아닌가.
그는 정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재능이 넘치는 녀석이구나.’
가만히 보니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다.
‘누가 지었는진 모르지만 진옥룡이라는 별호가 딱 맞는군.’
하나가 괜찮게 보이기 시작하니 모든 게 좋게 보이고 있었다.
‘사내라면 저 정도 까칠함은 있어야지. 능력 있는 사람치고 기인 아닌 자가 어디 있는가.’
심지어 정광의 버릇없는 성격까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결정했다.’
당기황의 입에서 그 자신도 놀랄 만큼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야.”
“갑자기 목소리가 왜 그래요?”
“……원래 이렇단다. 내 너에게 천하에서 제일가는 선물을 주마.”
“뭔데요?”
당기황은 부처처럼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결과.
푸르딩딩해서 더 흉악해 보이는 아수라의 얼굴이 되었다.
“내 제자가 되거라.”
* * *
당기황은 발을 바쁘게 놀려 정광을 따라갔다.
“어딜 가는 것이냐!”
“숙소요.”
“먼저 제자가 되겠다는 대답을 해야지!”
“아. 그거요?”
“녀석, 쑥스러워서 그랬구나.”
“싫은데요.”
“……뭐?”
“저 곤륜 제자예요.”
“누가 그걸 모르느냐? 다 방법이 있느니라.”
당기황은 정광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걸으며 감언이설로 꼬드겼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대답이나 하거라. 딱 이십 년이다. 내게 배우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어.”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진짜 천하제일고수였던 그에게 뭘 가르칠 수 있다고 이러는지 원.
게다가 이십 년은 무슨.
“근데요.”
“그래. 마음이 동하느냐? 무엇이든 물어보거라.”
“그때까지 살아계실 수는 있어요?”
“……좀 더 치열하게 수련해서 십오 년 안에 해보자.”
“십 년도 간당간당하실 것 같은데.”
“네 이놈! 오냐오냐하니까 감히!”
“손목 주세요. 진맥 좀 해볼게요.”
당기황은 언제 화냈냐는 듯 호기심 어린 얼굴로 손목을 내줬다.
손목의 맥문(脈門)은 제압당했다간 반신이 마비되는 요혈이었지만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만만한 무인이었다.
정광 역시 대수롭지 않게 그의 손목을 잡은 뒤 진맥을 했다.
“어떠냐?”
“흐으음.”
“오십 년은 더 살 것 같지?”
정광은 그의 손목을 놓은 뒤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
“뒷정리 잘하시고 힘내세요.”
“……그, 그게 무슨 뜻이냐!”
“결국엔 모두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 크게 미련 갖지 마시고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니까!”
그들은 어느새 곤륜파가 머무는 전각 앞에 도착했다.
마침 그 앞에서 보법을 수련 중이던 백승무가 반갑게 맞이했다.
“사형. 이제 오십니까? 그런데 이 분은…….”
“독존이시래.”
“그렇군요. 독존…… 네? 독존!”
“껄껄껄. 그래. 노부가 바로 독존이니라.”
당기황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게 그를 봤을 때의 제대로 된 반응 아닌가?
“사제. 어르신들은 돌아오셨어?”
“……네, 네! 조금 전에…….”
백승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각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곤륜 도사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을 바라보던 당기황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어라? 이것 봐라?’
아는 얼굴은 없었으나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곤륜의 소식이 가끔 들리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
당기황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제멋대로인 것으로 악명 높은 그였지만, 곤륜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인사드리겠소이다. 당기황이오.”
“……독존이시구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운학이라 하오.”
“껄껄. 뭘 또 영광씩이나.”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정광의 사부가 되려 하오.”
곤륜 도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독존이라는 이름이 세상을 울리더니 과연!
듣던 대로 미친 늙은이 아닌가!
독존이고 나발이고 당장 쫓아내려는데 당기황이 덧붙였다.
“정광은 앞으로도 곤륜의 문하일 것이오. 다만 내 깨달음의 일부를 전해주려는 것뿐이외다. 서로 어르신, 이 녀석 하기엔 삭막하니 사부, 제자로 부르자는 것이지.”
“……사승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가르침만 베푸시겠다?”
“당연한 것 아니오? 설마 내가 정광을 뺏으려는 것이라 오해하셨소이까? 허허. 나는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니외다.”
곤륜 도사들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당신은 그러고도 남을 만큼 경우 없는 사람이잖소!’
무림의 선배가 다른 문파의 후배를 어여삐 보고 무공을 전수한다.
이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말이 사부지 선배의 예로 대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악명을 떨치는 독존이 왜 그런 호의를?
“……깨달음이라 하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내가 근래에 깨달은, 본가의 무공과는 관계없는 것들이오. 정광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터. 허락해 주시오.”
“왜 그러려는지 이유를 말해주시겠소이까?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당기황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우. 내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천하제일의 기재(奇才)여야 하오.”
“……최소한 천하제일기재?”
“하지만 마땅한 인재가 없어 시름하던 중, 정광을 만나게 된 것이오. 다행스럽게도 내 가르침을 받을 만한 자질이 있더이다. 그리고…….”
“……?”
“저 녀석에게서 내 젊은 시절을 보았소. 그래서 더 욕심이 나는구려.”
당기황은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귀에 정광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저런 얼굴을 닮았다고? 말도 안 돼.”
* * *
운학은 ‘내 얼굴이 어때서!’라며 날뛰는 당기황을 겨우 달래서 보냈다.
“다시 올 것이오! 그때는 꼭 대답을 받아낼 것이외다!”
“배웅하지 않겠소이다.”
운학은 당기황이 사라지자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군.”
“그러게요.”
“……네가 지금 그런 말이 나오느냐?”
“제일 황당한 건 전데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정광은 당가의 숙소에서부터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독을 그렇게 먹어댔는데 괜찮고?”
“과식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주의하거라. 다 배출했으니 다행이긴 하나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아니더냐?”
“전부 배출한 건 아닌데.”
“……무어라?”
“조금씩은 남겨뒀죠.”
“왜!”
“내성 키우려고요.”
“…….”
운학을 비롯한 곤륜 도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이제 가도 되죠?”
“아직이다. 네 생각은 어떤지 말해다오.”
“독존한테 배우는 거요?”
“그래. 사실 나쁜 일은 아니야. 오히려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지.”
“생각 없어요.”
“이유가 무엇이냐?”
뻔한 걸 왜 묻는지.
아무리 잘해준다 한들 잔소리꾼은 한 명으로 족하지 않은가.
“사부는 한 명도 많거든요.”
그 의미를 오해한 허청의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정광아! 나도 그렇다! 나도 너 하나면…… 아니! 아니! 승무 너도 포함해서 두 명이면 차고도 넘친다는 말이다! 승무야, 내 말 이해했지? 응?”
혼이 빠져나간 듯한 백승무를 허청이 달래는 와중에도 운학은 다시 한번 물었다.
“네 마음. 확실한 것이겠지?”
“네.”
“알았다. 대신 마음을 단단히 먹거라. 독존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자다.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올 것이야.”
“은신해 있다가 칠까요?”
“……차라리 지금 나를 치거라.”
운학은 정광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렸다.
“찾아오면 어떡해요?”
“내일 날이 밝으면 당가의 가주에게 찾아가 따질 것이다.”
“독존의 아들이요? 독존이 콧방귀를 뀔 것 같은데요.”
“아니. 그가 유일하게 꺼림칙하게 여기는 이가 아들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운학은 정광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신신당부했다.
“만에 하나, 그가 와서 귀찮게 하더라도 참는 거다. 싸울 생각은 하지도 말고. 알겠느냐?”
“…….”
“어허! 잔소리 좀 들어볼 테냐!”
“그렇게 할게요.”
그제야 정광은 풀려날 수 있었다.
‘외출금지라…….’
생소한 경험 아닌가.
‘뭐 이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게으름 피우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법. 정광은 시체처럼 쉬어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운 자 배와 허 자 배가 전각을 나섰다.
그들은 무림맹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당가의 숙소로 먼저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독존이 나타났다.
“내 제자가 되어라.”
“와. 빨리 오셨네요.”
“그만큼 마음이 급해서 그런다. 어때, 마음이 동하느냐?”
“싫은데요.”
“내 제자가 되라니까!”
“싫다니까요.”
똑같은 대화가 끝없이 반복되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건 곤륜의 정 자 배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이 녀석이 진짜!”
“네. 진짜 필요 없어요. 이제 들어가도 되나요?”
당기황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튀어나왔다.
“깨달음을 전수하기 전에 네 녀석의 버르장머리부터 고쳐주마!”
“어? 때리려고요?”
당기황은 멈칫했다.
배분과 명성이 있지, 열 받는다고 어찌 새파란 녀석을 때리겠는가?
그런데.
정광의 티 없이 맑은 눈을 보자 괜히 자신이 고약한 늙은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뭔가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면?”
“그럼 저도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정광이 내공을 끌어 올리는 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대단한 기운이었다.
‘이놈이 감히! 나와 싸우겠다고?’
당기황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네 녀석이 비록 난 놈이지만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걸 알려주마!’
정광은 그의 생각보다 더 난 놈이었다.
‘정파에서 가장 강한 열 명 중 하나라고 했지?’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정광으로서도 그 경지를 확실히 가늠할 순 없었으니 사실이리라.
절대자와의 싸움!
보통의 무인이라면 즉시 꼬리를 말 상황이었으나…….
‘재밌겠네.’
정광은 상대를 재면서 싸우는 이가 아니었다.
‘어디 놀아볼까.’
투지가 활활 타오르는 그때!
‘이런.’
운학을 비롯한 곤륜 도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싸웠다간 종일 잔소리 들을 게 뻔하잖아.’
이번만큼은 허청도 합세해서 괴롭히리라.
‘그렇다고 마공으로 쓱싹 할 수도 없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는 마음을 정했다.
‘무난하게 가자.’
정광은 상청무상신공으로 끌어모은 진기를 주즉시공으로 운기했다.
그래서 그의 몸속에 남아 있던 독기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끌어모았다.
‘이거 좀 아까운데.’
그래도 귀 따갑게 시달리는 것보단 나으리라.
‘뭐 다시 받으면 되니까.’
정광은 독기를 배출했다.
손가락이 아닌 입으로.
“커허헉!”
촤아악!
독기가 담긴 핏줄기가 뿜어졌다.
그것을 뒤집어쓴 바닥의 풀들은 매캐한 연기를 내며 시커멓게 죽어버렸다.
“도, 독을…….”
정광이 억지로 소리를 죽여 중얼거리자 당기황이 황당한 얼굴로 외쳤다.
“독이라니! 내가 언제…….”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주위에서 지켜보던 자들이 경악해서 외쳤다.
“독존이 곤륜 제자를 독으로 암습했다!”